공신들의 봄, 살기 위해 기다리고 구부려라
세상을 떠난 혜제에게는 장성한 아들이 없어 승상 같은 대신들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여씨 문중인 여태, 여산 및 여록을 장군으로 삼은 뒤 남군과 북군을 통솔케 하고 여씨 일족을 모두 입궁시켜 조정 일을 보도록 청하면 태후가 안심할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다행히 화를 면할 수 있습니다
– 「외척전」, 『한서』 9권, 명문당, 425쪽
고조께서 천하를 차지하시고 자제를 왕으로 봉했는데 지금 태후께서 황제 일을 하시니 형제나 여씨들을 왕으로 봉하려 하신다면 안 될 것은 없습니다.
– 「장진왕주전」, 『한서』 2권, 명문당, 576쪽

얼굴을 맞대고 비판하거나 조정에서 간쟁을 한다면 우리가 당신만 못합니다. 그러나 사직을 보존하고 유씨 후손들을 안정시키는 일은 당신 또한 우리만 못할 것입니다.
– 「장진왕주전」, 『한서』 2권, 명문당, 576쪽
개인과 가족을 넘어 ‘생명 비전’을 향한 활동
효문제 당시 사람들은 역기가 벗을 이용했다는 말을 했었다. 본래 벗을 이용한다는 말은 이득을 얻으려 의리를 버리는 것이다. 역기의 경우에 부친이 나라의 공신이었고 또 강요를 당하는 상태였는데 비록 여록을 꺾어 버렸지만 사직을 편안케 했고 주군과 부친에게 도리를 지켰으니 옳은 일이었다.
– 「변역등관부근주전」, 『한서』 3권, 명문당, 66~67쪽
재상이란 위로는 천자를 보좌하여 음양을 고르게 하고 사시를 순환하게 하며 아래로는 만물이 때맞춰 성장케 하고, 밖으로는 사이(四夷)와 제후들을 어루만지며 안으로는 백성들을 가까이 살펴주면서 경과 대부들로 하여금 직분을 충실히 수행토록 해야 합니다.
– 「장진왕주전」, 『한서』 2권, 명문당, 581쪽
나는 음모를 많이 썼는데 이는 도가에서 금기하는 것이다. 내 세대에서 바로 망하더라도 그뿐이지만 끝내 다시 일어나지는 못할 것이니 이는 나의 음모에 대한 재앙일 것이다.
– 「장진왕주전」, 『한서』 2권, 명문당, 582쪽

혹시나 진평이 대의를 위해 개인의 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오해하면 안된다. 개인의 욕망과 국가의 비전이 어떻게 일치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진평은 던지고 있다. 그는 집안의 번영을 포기한 자가 아니라 생명의 비전을 향해 가는 자일 뿐이다. 그 선택에는 희생, 옳고 그름 따위로 움직이지 않는다. 단지 생명의 흐름에 따를 뿐이다. 그것은 사심에 찬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흐름이다. 자기 가족, 자기에게 갇히면 전체를 볼 수가 없다. 진평은 개인의 이익과 가족에 갇히지 않았기 때문에 번영없는 집안을 결핍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변치 않는 한나라의 비전
솔직히 능력 면에서 보면 고후가 고조보다 더 출중하다. 그럼에도 결정적으로 고후와 유방의 다른 점이 있다. 유방 옆에는 사람들이 많았고 여후는 단 한명의 사람도 키우지 못했다. 여씨가 아무리 공신들의 마음을 사려고 해도 마음을 얻을 수가 없었고, 여씨 일족에게 몰빵을 했지만 결국 자손들은 물려준 것조차 지키지 못했다.
속담에는 농기구가 있더라도 때를 잘 만나는 것만 못 하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사실이다. 번쾌와 하후영과 관영 같은 사람들이 한창 개를 잡고 마부노릇을 하며 비단을 팔 때 훌륭한 사람을 만나서 나라의 큰일을 하고 그 복록을 자손에게 물려줄 것이라 어찌 알았겠는가.
– 「변역등관부근주전」, 『한서』 3권, 명문당, 66~67쪽

그렇기 때문에 유방과 공신들은 일방적인 복종 관계라고 할 수 없다. 합체가 되어야 새로운 신체가 만들어진다. 한나라 비전이 유방과 대신들을 의기투합하게 만들었다. 유방이 죽은 후 15년이 흘렀지만 유씨 재건을 위한 비전은 공신들의 열망이기도 했던 것이다. 여전히 변색되지 않는 그들의 비전이 참으로 충성스럽고, 한편으로는 미스터리하게 여겨지지만 진평이 승상의 역할에 대해 대답하는 장면을 떠올려보라. ‘재상이란 천자를 보좌하고 음양, 사시를 순환하게 하고 만물이 때 맞춰 성장하게 하고, 밖으로는 흉노와 제후를 어루만지고 안으로는 백성들을 살피고 신하들이 직분을 충실하게 수행해야 한다’는 그 내용 속에 한나라의 비전이 녹아있다. 진평이 15년 동안 변질되지 않고 활동했던 비밀이기도 하다.
봄은 시련을 겪으면서 온다

효혜제와 고후 시대에는 나라 안(海內)은 전쟁의 고통에서 벗어났고 군신이 모두 무위의 정치를 원했기 때문에 혜제는 팔짱끼고 있었으며 고후가 여주로 정사를 재단했으나 궁궐 문밖을 벗어나지 않았으니 천하는 태평했고 형벌을 거의 쓰지 않았으며 백성은 농사에 힘써 의식이 넉넉하였다.
– 「고후기」, 『한서』1권, 명문당, 19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