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원하는 윤리

김재겸

니체는 종교적으로 경건한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니체의 선조들은 루터교 가문이었으며, 그의 아버지, 친할아버지 그리고 외할아버지도 루터교 목사였다. 그는 다섯 살까지를 목사관에서 생활했다. 그에게 기독교는 자신과도 같은 것이 였을 것이다. 훗날 그는 기독교로부터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로부터 나온 도덕에 대한 가치를 전도하는 작업을 한 것이다. 그의 ‘도덕’이라는 가치와의 싸움은 이론의 작업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 속에 있는 낡은 신념을 조사하고 파고들었다. 그 신념은 철학자들이 수천 년 동안 신봉해온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탐사하고 자신과 대결하여 철학을 생산했을 것이다. 심지어 자신을 ‘지하에서 작업하고 있는 한사람’으로 묘사했다. 

생각해보면 도덕은 묘하다. 자신이 탐사하지도 않은 사회적인 신념을 원래부터 자신의 것인 양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우리들이 도덕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두렵거나 귀찮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떤 사건을 마주하면 그에 대한 가치 판단을 하게 마련이다. 그 때 통념을 받아들이면 마음이 편안해 진다. 주변의 평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니체처럼 ‘도덕’을 질문하지 않는다. 자신의 체험이 어떤 것인지 탐사하지 않는다.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어떤 신념을 질문하지 않고 그 것으로 살아간다. 그 통념이 나에게서 어떻게 살아내고 있는지를 탐사하지도 않고 그 것으로 살아간다. 그 통념으로 내가 겨우 겨우 살아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치의 가치를 묻는다

 만약 그 반대가 진리라고 하면 어떠할까? ‘선한 사람’에게도 퇴보의 징후가 있다면,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위험, 유혹, 독이며, 가령 현재를 살기 위해 미래를 희생한 마취제가 있다면 어떠할까? 아마 현재의 삶이 좀 더 안락하고 덜 위험하지만 또한 보다 하찮은 방식으로 더 저열해지는 것은 아닐까?

『도덕의 계보학 』, 연암서가 , 머리말 , 19쪽

니체는 ‘선한 사람’을 ‘악한 사람’ 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다는 통념적 평가에 동의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선악이 조야한 질문이라고 단언한다. 그는 자신의 체험을 사유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예민한 후각으로 도덕에서 나쁜 냄새를 맡았다.

나에게는 ‘연민’이라는 감정이 그런 것이었다. 남을 돕는다는 감정이야 말로 절대 ‘선’이었다. 연민은 내가 이타주의자라는 증거이기도 했다. 인간적인 사람이라는 평판으로 돌아올 때는 뿌듯한 감정에 휩싸이곤 했다. 그리고 그 도덕은 주변의 이기주의자들을 비난하는 근거가 되었다.

 

예민한 후각으로 도덕에서 나쁜 냄새를 맡은 니체

여기서 니체의 질문을 가져와 보자. 우리는 왜 ‘연민’은 선하다고 판단할까? 연민은 나에게는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 그 질문은 니체를 만나지 않았으면 평생 한 번도 해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연민이 선하다는 것은 학교의 수업시간, 교회의 주일학교에서 배운 후에 질문없이 받아들인 가치이다. 더구나 연민은 상대를 낮춰서 나를 만족시키는 심리적 기재로 작동한다. 니체는 내 힘을 쓰는 손쉬운 감정이라 비판한다. 배울 상대나 우정을 나누는 친구라면 가져야할 긴장을 가져 오지 않는다. 어쩌면 긴장하며 배우고 대등하게 주고받는 감정을 연민으로 대체해 버린 것일 수 있다. 니체는 ‘연민’에서 우리가 손쉽게 얻는 만족감이 생명을 쇠퇴시킬 수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가치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사실 우리는 무언가를 ‘집으로 가져가는 단 한 가지 일에만 진심으로 마음을 쏟는다. 그 외에 삶, 이른바 ‘체험’에 관한 일에 우리 중에서 과연 누가 진지하게 마음을 쓰겠는가?

『도덕의 계보학 』, 연암서가 , 머리말 , 11쪽

가치의 가치를 물을 때 니체는 체험의 문제를 가지고 온다. 인식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면, 체험에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이다. 체험은 누군가가 겪는 구체적인 사건에서 것이다. 체험의 주인공은 물론 몸이다. 만일 몸을 제거한다면 그 것을 체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몸은 자기가 아닌 것, 타자를 물질적으로 감각한다. 몸이 체험하는 것이 ‘사물’이든 ‘언어’이든 상관이 없다. 신체는 체험의 과정에서 변용된다. 생리학이 필요하 순간이다. 어떤 가치에 대한 가치는 ‘그 신체를 어떻게 변용 시키는 가?’로 평가할 수 있다.

몸은 타자를 물질적으로 감각한다

몸이 말하는 윤리

니체에 의하면 선악의 도덕은 좋음과 나쁨에서 나왔다.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건 사람들의 선호이다. 사람들은 좋고 싫음을 감각적으로 선택한다. 어떤 음식의 맛있고 없음을 판단해서 좋고 싫음으로 평가하는 건 그 사람의 미각이다. 그리고 그 누구의 선호가 좋음과 나쁨으로 가치가 되는 것이다.

 좋음과 나쁨이 선악으로 전도 되는 과정에는 도약을 필요로 한다. 도덕은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보편성을 가져야 한다. 만일 사람에 따라 다르게 적용하는 가치라면 도덕이 될 수 없었다. 여기에서 ‘누구’를 생략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도덕은 마치 ‘누구’를 제거하고 얻은 초월한 가치와도 같다. 역설적이게도 ‘누구’를 제거함으로써 초월성을 획득한 도덕은 변용의 능력이 없는 뜬 그름과도 같은 것이 되었다. 
 

 니체는 그 ‘누구’를 ‘신체성’이라고 표현했다. 어쩌면, 니체의 도덕과의 전쟁은 ‘신체성’을 찾아내고 초월적이 되어버린 가치에 현장을 부여하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 만일 도덕을 실재 유용한 것으로 만들고 싶다면 몸에서 작동할 수 있도록 현장으로 끌어와야 한다.

선악을 감별하는 도덕을 사람들은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 가치가 나를 변화시키고 공동체를 더 낳은 것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어떠한 사건에 도덕적 평가를 내려버리고 나면 그 평가 속에 갇혀버리고 만다. 도덕이 맥락을 상실한 당위 이상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상대를 도덕적으로 판정해 버리거나, 그 것을 나에 대한 평판의 잣대로 사용하고 나면 변화의 출구가 막혀버린다. 도덕은 ‘신체성’을 상실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몸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묻지 않고 뚝 떨어진 명제는 어떠한 변용의 능력도 없는 것이다. 


 당위의 도덕에서 벗어나 생명이 원하는 것을 하는 삶을 살 때 자기를 변용시킬 수도 있게 된다. 자기를 변용하는 능력이야 말로 유용한 도덕을 생산할 수 있다. 생명에 유익한 것을 감각하고, 그 감각에 유익한 것만을 하고 싶은 신체로 만들 때 자신의 윤리가 생성된다. 생명의 감각에 유익한 일을 하는 것이야 말로 몸이 원하는 윤리인 셈이다. 그 때야 통념으로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내 몸에 유익한 것들을 활용하여 살아가는 일이 가능해 질 것이다.

댓글

avat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