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노를 몰아내고 사방천리 영토의 주인이 되다!

강보순

유목군대보다 더 유목군대 같은 무제의 장수들

 주지하듯 경제치세까지 한나라의 군대는 흉노를 당해낼 수 없었다. 방어만 하기에도 급급한 수준이었던 것. 한나라가 수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일까? 아니다. 군사의 수는 늘 한나라가 흉노보다 많았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일까? 

   어린아이도 양을 타며 활로 새나 들쥐를 사냥하고 좀 자라면 여우나 토끼를 사냥하여 고기를 먹었고, 장사가 되어 만궁을 당길 수 있으면 모두 기병이 되었다. 그 풍속에 여유가 있으면 목축과 짐승 사냥으로 살아가지만 위기에 처하면 모두가 전투를 익혀 남을 침략하는 것이 그들의 습성이었다. 그들의 주된 무기는 활과 화살이지만 근접해서는 칼과 창을 사용했다. 우세하면 진격하고 불리하면 후퇴하였는데 도주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흉노전」, 『한서』9권, 명문당, 14쪽

흉노의 군사는 어렸을 때부터 활시위를 당겨 활쏘기에 능하다. 농경이 아닌 목축과 짐승 사냥으로 식량을 삼기에 그들의 활쏘기는 언제나 실전이었다. 그런데 무엇보다 흉노의 활이 위협적인 것은 그들이 말위에서 활을 쏜다는 사실에 있다. 말의 속도에 활의 속도가 더해지니‘활시위 당기는 소리가 나면 이미 적은 쓰러져 있는 것’이다. 흉노는 이렇듯 활을 잘 쏘고, 말을 잘 타는 것을 장점으로 삼아 재빠르게 치고 빠지는 게릴라전술을 즐겨 구사했다. 게릴라전의 핵심은 변칙성에 있다. 기동성이 좋은 흉노 전사의 이동과 활시위는 한나라의 군사들이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경로로 등장해 날아왔고, 짧은 공격으로 큰 타격을 입힌 후, 도주로를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재빠르게 퇴각했다. 한나라의 군대는 흉노의 이러한 변칙적인 전략으로 인해 늘 고전을 면치 못했다. 

  게다가 흉노는 공격도 잘했지만 후퇴도 잘했다. 후퇴를 잘하였다니? 한서에 등장하는 한나라 장수들은 대부분 후퇴를 모른다. 후퇴는 곧 죽음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사실 무제는 후퇴하여 패배한 장수에게는 거의 예외 없이 죄를 물었으므로, 한나라의 군사들에게 후퇴는 진짜 죽음이기도 했다. 이릉만 하더라도 물러서는 법을 모르는 장수였다. 자기 부대의 50만개의 활이 다 떨어지고, 휘하의 부하 병사가 아무도 없을 때까지 싸우다 끝내 포로가 되지 않았던가. 그러나 흉노는 후퇴에 대한 감각이 달랐다. 반고의 표현대로 ‘후퇴를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이다. 그들에게 후퇴는 유목의 이동처럼 그냥 다른 곳으로 이동한 것 일뿐, 결코 후퇴와 패배를 연결 짓지 않았다. 그래서 흉노는 언제든 후일을 도모 할 수 있었다.

게릴라전의 핵심은 변칙성!

무제는 이러한 흉노 군대의 유목적 특이성을 너무나 잘 파악하고 있었다. 하여 무제는 유목군대보다 더 유목스러운 군대를 갖추었다. 무제는 흉노의 활이 위협적이니 흉노보다 더 활을 잘 쏘는 장수를 뽑아 그로 하여금 흉노에 대항하게 한다. 대표적으로 ‘이광’은 활로 바위도 뚫을 만큼 활을 잘 쏘는 명장이었다. 또한 무제는 흉노의 기동성이 위협적이니 흉노보다 더 기동성이 뛰어난 기마병을 양성하기 위해, 흉노의 말보다 더 좋은 말을 구해오기에 이른다. 대표적으로 대원의 한혈마는 ‘붉은 땀을 흘리는 말’로 하루에 천리를 가는 명마다. 무제는 이 한혈마로 흉노의 기동성을 압도한다. 이렇게 더 나은 활쏘기 실력과 더 좋은 말로 군대를 양성하니, 남은 것은 이것을 잘 활용할 전술과 전법이다. 무제는 흉노의 게릴라전보다 더 게릴라스러운, 더 변칙적인 전술을 구사할 수 있는 장수를 뽑았다. 그 대표 장수가 노예출신 ‘위청’이었다. 노예라도 실력만 있으면 인재로 쓴다는 무제의 인사원칙은 그 자체가 이미 변칙적이기도 하다. 어제까지 노예였던 자가, 오늘은 수십만 대군을 이끄는 장군이라니. 이 얼마나 변칙적인 인사인가! 여기에 한 가지 더! 무제는 흉노에는 없는 보병을 강군으로 키워내 기병을 보완했다. 앞서 보았던 이릉의 경우 보병 5천기로 흉노의 3만 대군과 호각으로 싸울 정도였으니 한나라 보병의 강성함이 어떠했는지 그 수준을 짐작할 만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준비된 무제의 군대가 흉노와 실전에서는 어떻게 싸웠을까? 

한에서는 위청을 보내 6명의 장군과 10여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삭방군 고궐에서 출병하게 하였다. 흉노 우현왕은 한의 군사가 올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밤에 술을 마셔취했다. 한군은 국경 6,7백리를 나가 밤에 우현왕의 군사를 포위하였다. 우현왕은 크게 놀라 몸을 빼내 도주하였고 그 정병들도 가끔 뒤를 따랐다. 한 장수들은 우현왕의 무리 남녀 1만5천명과 하급 군리 비소왕 10여명을 죽이고 1천여 명을 잡아갔다.

「흉노전」, 『한서』4권, 명문당, 65쪽

  세계 최강 군대라 불리는 칭기즈칸의 군대가 하루에 이동한 거리가 평균 100~150km라고 하는데, 이는 논외로 하더라도 군대가 하루에 이동할 수 있는 행군거리에 대한 상식은 누구나 있었을 것이다. 흉노의 우현왕이 한나라의 군대를 코앞에 두고 술판을 벌인 것도 사실 그러한 행군속도에 대한 상식 때문이었다. 10만 대군이 하루만에 7백리를 행군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상식. 그런데 위청의 군대는 그런 우현왕의 예상을 비웃듯, 하루에 6~7백리를 이동했다. km로 환산하면 무려 250km 정도다. 와우! 저 수치가 정확한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당시 위청과 그의 부하 장수들이 냈던 행군속도는 흉노가 예상했던 속도에 대한 상식을 깨버리는 속도였음에는 분명하다. 적이 예상하지 못한 속도에, 예상할 수 없었던 포위 공격! 한나라의 군대는 진정 유목의 리듬을 자신의 리듬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정보의 바다! 실크로드를 장악한, 반전의 인물 장건

    사실 흉노의 강점은 하드웨어적인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흉노는 당시 실크로드, 즉 비단길의 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올리고 있었는데, 사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실크로드의 가치는 이 길을 통해 유영하는 전 세계의 정보들이었다. 각 나라의 경제동향, 정치동향, 자연현상 등의 온갖 정보들이 이 실크로드 위에서 입에서 입으로, 걸음에서 걸음으로 모이고 흩어졌다. 오늘날 스마트폰에 전 세계의 지식과 정보가 몰리듯, 당시 실크로드라는 길은 그런 정보의 교통로였다. 무제는 흉노가 보유하고 있던 이 실크로드에 대한 패권을 가져오고 싶었다. 그러나 실크로드를 가져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가본 사람이 없으니 지도도 없었을 터, 무제 곁에는 무척 많은 인재가 있었지만 정작 중국 밖을 나가 본 신하가 없었다. 이런 무제의 고민은 예기치 못했던 곳에서 해결되는데, 그 고민을 해결해 준 사람이 바로 서역을 개척한 장건이다. 

  이야기는 두태후 섭정기인 건원(建元) 연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무제는 흉노에 대항하기 위해 서역의 여러 나라들과 동맹을 맺을 필요가 있어 사신단을 모집한다. 이름하여 서역원정대! 그런데 이 서역원정대 앞에는 시작 자체를 어렵게 하는 중요한 문제가 한 가지 있었다. 그 문제는 서역으로 가는 길에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흉노의 영토였다. 실크로드의 패권자인 흉노가 한나라의 사신단에게 서역으로 가는 길을 순순히 내어줄 리는 당연히 없다. 게다가 그 목적이 자신들(흉노)에게 대항하기 위해 동맹을 맺으러 가는 길이라는 것을 알면 흉노는 더더욱 길을 열어주지 않을 것이다. 하여, 무제가 뽑고자 했던 사신단은 단순 외교사절 수준의 사신이 아니라, 흉노의 영토에서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지혜와 담력 그리고 무예를 두루 갖춘 사신이여야 했다. 장건은 바로 이러한 사신단 모집에 스스로 지원했고, 무제는 장건의 사람됨이 ‘힘이 강하고 관대하며 신용이 있어 만이(蠻夷)들이 좋아할만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낭관으로 발탁한다. 

  낭관이 된 장건은 월지국과 동맹을 맺기 위해 떠났다. 그러나 장건 일행은 무제의 기대가 무색할 정도로 시작부터 황당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서역 땅도 밟기 전에 흉노에 붙잡혀 포로가 된 것이다. 그것도 무려 10년씩이나. 와우! 그러나 장건의 진정한 놀라움은 그의 10년간의 포로생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억류된 와중에 흉노여인을 부인으로 얻고 아이도 낳으며 흉노에서의 삶을 이어나갔으면서도, 끝내 무제의 부절을, 황제의 명을 잊지 않은 사실에 있었다. 무려 10년 동안이나 황제의 명을 가슴에 품고 다닌 사내라니. 탈출의 기회를 엿보던 장건은 흉노의 느슨한 감시망을 틈타 10년 만에 탈출에 성공한다. 그리고 곧장 무제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대원을 거쳐 대월지로 향했다. 

황제의 명을 10년동안 가슴에 품은 장건

  대월지에 도착한 장건. 과연 동맹을 이끌어냈을까? 10년 동안 억류되어 절치부심했을 장건을 생각하니 ‘동맹’이라는 임무완수는 마치 따 놓은 당상일 것만 같다. 상상만으로 얼마나 많은 시뮬레이션을 돌렸겠는가. 그러나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는 법이다. 장건이 흉노에 발이 묶인 사이에 국제정세는 몰라보게 많이 변해 있었다. 10년이란 시간은 흉노에 대한 대월지의 복수심을 약화시켰고, 무엇보다 대월지는 현재 이주한 땅에서 너무나 만족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결국 장건은 대월지와의 동맹이라는 무제의 임무를 완수하지는 못하고 귀국길에 오른다. 귀국길은 순탄했을까? 그렇지 않았다. 강거를 지나던 장건은 또 다시 흉노에 붙잡히고 만다. 이럴 수가! ‘쇼생크탈출’도 이러한 반전은 선사하지 못했다. 장건은 정말이지 삶 자체가 반전이다.^^ 그러나 이번 포로생활은 짧았다. 흉노의 군신선우가 죽으면서 몰고 온 혼란을 틈타 1년도 안되어 탈출에 성공한 것이다. 이쯤되면 ‘탈출 장인’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겠다.   

  장건은 한나라를 떠난 지 도합 13년 만에 무제 앞에 서게 되었다. 13년 만에 마주한 무제와 장건. 장건은 무제에게 임무의 진행상황에 대해 보고했고 실패했음을 고백한다. 주지하듯 무제에게 신하들의 실적 없음은 곧 죄다. 장건도 어떤 벌을 받아야 했음이 분명해보였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한 번 장건의 반전이 있다. 장건은 대월지와 동맹을 이끌어내지 못했지만 13년간 억류되고 여행하면서 서역의 여러 나라들에서 듣고 보고 경험한 정보를 무제에게 이야기한다. 북방의 흉노를 비롯하여 서역 50여 개국의 지도와 그들의 풍습, 인구수, 특징 등이 장건의 머릿속에 있었던 것이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기이한 이야기를 쏟아내는 장건의 이야기가 무제에겐 얼마나 흥미로웠던지, 무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주 장건을 불러다가 서역에 대해 물어 손에 잡히지 않던 ‘외부’에 대한 갈증을 풀었다. 무제가 흉노를 몰아내고 실크로드를 장악한 배경에는, 중국 밖의 사해에 대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 배경에는, 이렇게 13년 동안 무제의 비전을 잊지 않고 명을 수행한 장건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무제의 후회! <윤대죄기조>를 반포하다

  무제의 정복전쟁은 이런 식으로 무려 45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 결과 흉노를 서역으로 몰아내고, 동월과 민월을 정복하고, 한사군을 설치해 한나라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한 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전쟁은 늘 힘든 것! 흉노와의 전쟁은 시간이 길어지자 결국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되고 말았다. 

한의 위청, 곽거병 두 장군이 선우를 크게 포위하여 죽이거나 생포한 자가 8,9만 명이었는데, 한의 군사로 죽은 자 역시 수 만명 이었고 말 10여만 필이 죽었다. 흉노가 비록 병약해져 멀리 도주하였지만 한에서도 말이 부족하여 더 추격할 수도 없었다.

「흉노전」, 『한서』9권, 명문당, 73쪽 

흉노와 한나라의 전쟁은 점령한 영토의 크기로만 보면 한나라의 압승이었다. 그러나 내실을 들여다보면 결코 이겼다고 볼 수 없는 승리였다. 반고의 언급처럼 아군의 손실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흉노를 병약해진 상태로 만들 때까지 전쟁을 한 무제의 집념도 놀랐지만, 더욱더 놀라운 것은 그들을 끝내 멸하지 못한 이유가 아군에 말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말이 없을 정도로 싸웠다니. 아마도 무제는 말만 더 있었으면 아군의 피해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싸웠을 것이다. 어쨌든 한나라의 상황도 이렇게나 좋지 않았다. 이것을 진정 승리한 나라의 형세로 볼 수 있는 것일까. 무제도 이와 같은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는지 죽기 2년 전, 돌연 대외정벌을 중단하고 내실을 보충하라는 <윤대죄기조>를 반포한다. 

 이전에 담당자가 백성의 부세를 30전을 늘려 변방의 비용을 충당하자고 했는데, 이는 노약자나 고독한 빈민만을 힘들게 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다시 서역 윤대에 사졸을 파견하여 둔전 할 것을 주청하였다. 윤대는 거사국에서도 서쪽으로 1천여 리 떨어진 곳인데 전에 개릉후를 시켜 거사국을 공격할 때 위수, 위리, 누란 등 육국의 자제로 경사에 머물던 자들을 모두 귀국시켜 비축된 군량을 내어 한의 군사를 맞이하게 했었으며 또 자발적으로 수만 명을 동원하면서 국왕 자신들이 직접 지휘하여 거사를 포위했고 결국 거사왕의 항복을 받았었다. 서역 여러 나라의 군사는 곧 해산했지만 귀국하는 한나라 군사에게 군량을 공급할 수가 없었다. 한의 군사가 성을 격파 했을 때는 군량이 충분했지만 군사들이 스스로 운반하는 것만으로는 귀국할 때까지 먹기에는 부족하였으니 강한 자들은 가축을 먹어치웠지만 약한 자 수 천명은 귀국하는 도중에 죽어야 했다. 짐이 주천군의 나귀나 낙타에 군량을 실어 옥문관을 나가 맞이하게 했었다. 이졸들은 장액군에서 출발하였기에 아주 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서역에 낙오한 자는 매우 많았다. 

「흉노전」, 『한서』9권, 명문당, 376쪽

 윤대는 현재 신장위구르 자치구에 해당하는 곳으로, 서한에서는 천리나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 곳이다. 이제 한나라의 영토가 서한에서 천리에 이르는 거리까지 확장된 것이다. <윤대죄기조>는 정복한 변방을 안정시키고, 한나라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자 윤대에 둔전을 세우자는 신하들의 건의를, 무제가 만류하기 위해 쓴 조서다. 무제는 왜 윤대의 둔전을 만류한 것일까? 무제의 서역 원정은 군사적 측면에서는 성공적이었다. 당시 실크로드를 장악하고 있던 군사강국 흉노를 압도하는 한나라의 군세였으니 그야 당연하지 않겠는가. 서역에서 한나라의 군대를 막을 나라는 없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무제의 군사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에 봉착하는데, 그것은 서한에서 너무도 먼 원정거리였다. 대외원정에 가장 중요한 것은 군량미다. 한고조 유방이 평성에서 흉노에 포위당해 30만 대군이 7일 동안 쫄쫄 굶었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듯, 제 아무리 30만 대군이라도 군량미가 없어 굶으면 그 군사의 수는 0이다. 그런데 무제의 군사들은 이것과는 사뭇 다른 이유로 곤경에 처한다. 전쟁에서 승리한 군사들이 서역에서 돌아오는 길에 길 위에서 굶어죽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무제도 이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설마 승리한 군사들이 길 위에서 굶어죽을 줄이야. 

  무제의 군사들은 전투를 수행하러 가는 천리 길의 군량미는 맞춰 갔으나, 돌아오는 천리 길에 대한 변수는 고려하지 못했다. 서역 천리는 그렇게나 먼 거리였던 것이다. 이런 문제를 알게 된 무제는 군대가 성을 격파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군사들이 스스로 자기의 식량을 운반토록 해 이러한 굶주림을 막아보려 했으나, 스스로 운반하는 군량미로는 돌아오는 천리 길의 허기를 채우는 것에는 충분치 않았다. 주지하듯 한나라의 군사는 보급대에 의존한다. 자기 식량을 스스로 보급할 일도 없었고, 보급한 적도 없었다. 그들에겐 전투보다 보급이 더 어려운 일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서역에서 낙오하는 이가 늘어나자 무제는 친히 서역 실크로드의 관문 옥문관까지 식량을 싣고 군사들을 마중했지만 낙오자를 줄이지는 못했다

돌아오는 천리 길의 군량미는 예상치 못한 무제

  사실 이것을 진작부터 예상했던 한안국은 흉노와의 화친을 주청하며 ‘천리를 가기도 전에 군졸과 말은 군량이 부족해질 것입니다.’라고 간언한 바 있었다. 한안국의 진단은 정확했지만 아쉽게도 당시에 무제는 이런 한안국의 의견을 귀담아 들을 귀가 없었다. 길 위에는 길 위의 의식주가 필요하다. 흉노처럼 이동을 삶의 중심에 두는 유목민의 경우 길 위에서 굶어죽지 않는다. 『사기』 어느 곳에서도, 『한서』 어느 곳에서도 유목민이 이동하다 길 위에서 굵어죽었다는 언급은 없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이동이 곧 삶이었기 때문이다. 정주민이 정착해서 그들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듯, 길 위에서의 의식주는 유목민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무제의 군사들은 길 위의 생존법을 몰랐다. 전투는 유목스럽게 했을지 몰라도, 그들은 어디까지나 농경과 정착을 중심에 둔 정주국가의 군사들. 그들은 보급대에 의존할 뿐 길 위에서의 생존법은 배우지 못한 것이다. 

  무제는 죽기 2년 전이 되어서야 군사들의 죽음이 눈에 들어왔다. 수십만의 군사들이 죽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던 무제가 그제서야 비로소 그들의 죽임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무제는 <윤대죄기조>를 통해 자신의 대외정벌이 실패했음을 천명한다. 그리고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남은 시간 동안 ‘백성을 휴식케 하며 백성을 부유하게 양생하겠다는 뜻’을 밝힌다. 백성들은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사방천리의 영토보다 전쟁 없는 하루가 백성에겐 더 절실했던 것이다. 

  반고는 사마천이 주목하지 않은 바로 이 부분에 주목했다. 황제의 자리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기 쉽지 않은 위치다. 게다가 나이 든 황제라면 더더욱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끝내 고집을 부려 백성들을 사지로 몰아넣어 망국으로 치달은 사례가 얼마나 많던가. 그러나 노년의 무제는 달랐다. 무제는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추진해왔던 45년간의 정치행로를 바꾼 것이다. 무제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끝끝내 변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끝내 변할 수 있었기에 위대함으로 남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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