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겸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자유는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이다. 압박이 없는 상태에서 무언가 애쓰지 않아도 되는 상태로부터 자유를 연상한다. 만일 행동을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면 자유를 박탈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자유에서 권리가 연상한다. 

우리는 자유에서 행동에 구속을 받지 않아도 되는 조건을 연상하기도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자유의 이미지와 오버랩 되는 건 돈으로 다른 가능성들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로소득만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을 하고 살아도 된다면, 그 삶이 자유로운 삶이라 평가하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에게 '자유'란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이다

그런데 의문이 남는다. 최근 재벌 3세나 유명 아이돌의 일탈 사건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다. 굳이 더 애쓰지 않아도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의 일탈을 보고 있노라면 자유가 불행을 기획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때 자유는 진정한 자유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돈이 되었던 마약이 되었던 그 것에 의존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는 삶을 우리는 자유롭다고 할 수 없지 않을까? 통념적 ‘자유’가 사람을 얽어매는 묘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자유에 대한 다른 감각은 없을까? 어떤 감각이 진정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가? 

니체의 자유에 대한 감각

 니체는 현대인들이 가지는 자유에 대한 감각에 대해 이의를 제기를 한다. 그의 다음 문장을 보라. 

  그들은 고통 자체를 반드시 근절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인간’이란 식물이 이제까지 어디에서 그리고 어떻게 가장 힘차게 높이 성장했는가 하는 문제에 눈과 양심을 열어두어 왔던 우리는 그들과는 정반대로 이렇게 생각한다. 이러한 성장은 안락한 조건과는 정반대의 조건에서만 항상 일어났으며, 그러한 성장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인간이 처한 상황의 위험성이 극한에 이를 정도로 증대되어야 하며, 그의 창의력과 기만할 수 있는 능력이 오랜 압박과 강제로 인해 정교하고 대담한 것으로 발전해야 하며, 그의 생명 의지는 무조건적인 힘 의지로까지 고양되어야만 했다고.

프리드리히 니체 , 『선악의 저편』, 「제2장 자유정신」, 아카넷, 109쪽

니체는 현대인들이 가지는 자유에 대한 이데올로기가 마치 목자들에게 보호되고 사육되는 가축 때들의 소망과 같은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것은 마치 과잉보호 되는 자유로운 듯 보이지만 그 상태에서 조금만 떨어져도 어쩔 줄 모르게 되는 아이와 같다. 그렇기에 현대인들은 안전한 보호망 안쪽에만 머무르려고 한다. 

 그러나 니체는 자유란 안락함과 평온함을 누리는 상태의 반대 항에 존재한다, 고 한다. 압박과 강제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저항하고 대결하는 상황이 자유정신이 발휘되는 상황이다. 저항과 싸움이 있는 상황에서 생명의 의지가 솟구쳐 오른다고나 할까. 편안하고 안락한 상황에서 힘의 의지는 저하된다. 니체는 생명력이 고양된 상태와 자유를 연결시키고 있다. 위험해지려는 사람에게서 자유정신이 발현된다

니체는 생명력이 고양된 상태와 자유를 연결시킨다

 그는 어떤 제도적 조건으로부터 자유가 주어진다고 하는 주장에도 반대하고 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싸워왔다. 민주주의 제도로부터 자유가 가능해 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권리를 확장하게 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니체의 자유에 대해 주목하고 있는 지점은 다르다. 그는 폭정의 상황에서 저항하는 그 때 자유정신이 발휘된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가 제도로서 보장되고 나면 평준화가 하나의 권리로서 주어지게 된다. 그 상황에서 우리는 저항을 할 필요도 대결을 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인간을 왜소하게 하게 만든다. 왜소한 인간에게는 자유로운 정신은 없는 것이다. 

 애써 자기를 단련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 소득이 주어져 생활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자유라고 상상하지만 그 때의 나의 생명력은 바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음을 경험한다. 니체는 제도적 조건, 경제적 조건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다는 우리의 통념을 뒤집는다. 

머무르게 하는 모든 것에 반대하여

우리는 정신의 여러 나라에서 거주한 적이 있으며 적어도 손님으로 머문 적이 있었다. 우리는 편애와 편협한 증오, 젊음, 출신, 우연히 접하게 되는 인간들과 책들 또는 방랑의 피로 등이 우리를 가두어 두는 것 같았던 곰팡내 나는 편안한 밀실에서 항상 다시 빠져 나왔다. 명예나 돈, 관직이나 관능의 도취 속에 숨어 있는 [사람들을] 종속시키는 유혹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 , 『선악의 저편』, 「제2장 자유정신」, 아카넷, 110쪽

니체는 ‘부자나 관리 등을 다시 적극적으로 경멸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했다. 부자나 관리로 살아가게 되면 안정되고 보장된 삶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부와 지위가 나를 만드는 삶이며, 그것이 정해진 틀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는 없게 한다. 그러한 삶은 독특한 인격을 지닌 한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돈이나 지위, 관능과 명예는 우리를 도취시킨다. 처음 그것들이 주어지면 그것으로부터 편안함을 느낀다. 돈이나 지위를 얻게 되면 애쓰지 않고도 할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난다. 돈이 실현할 수 있는 욕망의 범위를 넓혀 준다. 쇼핑의 자유와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생겨난다. 지위가 생기면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늘어나게 된다. 거기로부터 돈과 지위가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는 착각이 생겨난다. 마치 스스로의 능력이 늘어난 것과 같은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돈과 지위는 스스로의 능력이 늘어난 것과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관능과 명예는 우리에게 향락을 선사한다. 향락은 저항 없는 달콤함이다. 고통 없는 쾌락은 우리를 도취시켜 그 감각에 우리를 머물게 한다. 감각이 취하고 나면 그 신체는 주인으로 살아갈 수 없다. 향락이 주인으로 살아가고 신체는 무력화 된다.

 이런 생각이 든다. 니체가 부자나 관리의 삶을 경멸하는 것은 그것이 주는 달콤함이 우리의 감각을 마취시키고 거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게 때문이라고. 떠날 수 없게 만드는 모든 것은 우리를 주인으로 살지 못하게 한다. 자유의 정신은 훼손되고 노예의 삶이 시작된다. 그래도 노예의 삶이 더 좋다고 하면 할 수 없다. 어쩌면 노예라도 좋으니 부자나 관리의 삶이 더 좋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노예의 정신이 자유로운 정신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떠나게 하는 것들에게 감사하며

  우리는 심지어 궁핍이나 변덕스러운 병에 대해서도 감사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를 항상 어떤 규칙이나 이것의 ‘편견’으로부터 해방시켰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존재하는 신, 악마, 잠과 벌레에 대해서 감사한다. 사악할 정도로 호기심이 많고 잔인할 정도로 탐구하며, 포착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도 주저 없이 붙잡으려 하고, 가장 소화하기 어려운 것도 소화해내는 이빨과 위장을 가지고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 , 『선악의 저편』, 「제2장 자유정신」, 아카넷, 110쪽

 인간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존재가 아니다. 이상적인 상태에 도달하기 위하여 살아가는 존재도 아니다. 니체는 ‘심지어 그것이 진리’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위해 순교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만일 삶에 목적도 의미도 없는 것이라면 허무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니체는 ‘무목적’한 삶에서 ‘살아감’ 자체만을 얻어낸다. 목적과 의미가 삶의 지표라면 ‘무엇을’을 질문 하고 도달할 수 있는 길을 찾는다. 생성하고 소멸하는 삶 자체에는 ‘어떻게’만을 질문한다. 길을 잃어야 과거에 진리였고 지금은 편견인 것으로부터 떠날 수 있다. 그래야 지금의 현장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살아가는 우리들은 길을 떠나게 하는 모든 것에 감사하다. 궁핍은 그 가난이 주는 관점을 배우게 한다. 우리는 궁핍에게 감사한다. 심지어 병에도 감사한다. 병은 우리를 보존하게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병들었을 때 그 병이 주는 관점으로부터 배우고 그 배움이 지금의 상태로부터 떠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감사하다.  

 살아간다는 건 지금의 나를 떠난다는 말과 같다. 떠날 수 없다면 조건이 주인으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정신은 나를 예속시키는 것들에 반대하고 그 것에서 떠나 다른 나로 살아가게 한다. 우리가 철학을 도구 삼아서 통념적 자유에 반대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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