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대중지성 정리

 

질문자1: 불필요한 욕망인지 필요한 욕망인지를 선별하는 사유의 통로는 어떻게 만들 수 있나요?

요즘 욕망이라는 단어가 자꾸 들려오더라고요. 근데 전 욕망을 원하지 않는 연습을 했거든요. 그게 살기가 편할 것 같아서. 근데 계속 살아있는 존재는 욕망하는 거고 욕망을 통해서 존재함을 인식한다.” 이런 말이 들리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여기를 오게 됐거든요. 불필요한 욕망을 선별하는 게 사유의 통로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그 사유의 통로를 어떻게 만들어야 될지, 그리고 불필요한 욕망인지 필요한 욕망인지 식별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세요.

 

정화스님: 가장 중요한 것은 생물학에 대한 지식을 충분히 습득하는 것이 1번입니다. 생물학. 예를 들면, 여기 흰색이 있잖아요. 그런데 이 흰색을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생물학적으로 근본적으로 다르게 보고 있답니다. 또는 내가 “너를 사랑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사랑을 해석하는 내용이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다 다르단 말이에요. 그런데 다른 사람이 내 말을 완벽하게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고 욕망을 하는데 이것은 인간의 생물학적 기제로는 해결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 욕망을 갖는다고 하는 것이 자신의 괴로움을 만들어가는 거예요. 욕망 그 자체는 선악, 시비는 아니에요. 다만 욕망의 조건을 잘못 이해하고, 되지 않는 것을 욕망하는 순간 괴로움이 발생하는 거예요. 그것을 이해하는데 ‘유전적 다형’이라고 하는 것을 알 필요가 있어요. 사람은 30억 개의 유전자 사다리가 한 번 복사할 때마다 세자씩, 양면 해서 여섯 자가 틀려요. 이것이 오랜 세월 쌓이면 빨간색을 보는 부위에서도 빨간색을 감지한 색에서 느끼는 양태가 사람마다 다 달라져요. 빨간색을 해석하는 유전적인 정보는 똑같지만, 유전적 다형으로 인해 단순한 차이뿐 아니라 감성 등도 차이를 만들어내요. 이것을 유전적 다형이라고 해요. 그런데 “왜 너는 내가 이해한 빨강을 이해 못 해?” 그러면 내가 괴로울 수밖에 없고, 동시에 “내가 말한 빨강을 네가 좀 이해해줘!” 그러면 나는 “그것은 빨강이 아닌데.”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고 하는 것은 노력하면 될 수 있는 것도 있고, 어떤 것들은 불필요한 노력을 시종일관 하는 거예요.

특히 사람 관계에서, 같이 사는 가족이 내 뜻대로 살아줬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것이 안 이루어져. 그래서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가족 관계는 가능하면 어렸을 때부터 무조건 좋아하는 연습을 하는 것 외에는 별 방법이 없어요. ‘내 마음에 들어서 좋아!’는 친구라든가 먼 타인이라든가 이런 것은 할 수가 있어. 그냥 보면 되고 안 보면 되니까. 하지만 가족들은 매일 부딪쳐야 하는데 아까 말한 대로 같은 빨간색도, 같은 부모에 태어난 아이들도 서로 다르게 형성되어 있는데, 똑같이 보는 일은 일어나지 않죠.

생물은 가능하면 같은 상태로 존재할 수 없도록 유전이 진행됐어요. 그래서 어머님이 가지고 있는 난자에 똑같은 유전적 배열이 하나도 없어요.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정자도 단 하나도 똑같은 것이 없어요. 그래서 모든 정자 난자가 헤아릴 수 없이 숫자가 많아도 다 달라. 그것은 형제간이라도 다를 수밖에 없게 되어 있어요. 일란성 쌍둥이도 똑같죠. 그런데 유전자가 ‘이쪽 부분은 내가 관여하지 않을 테니까 네가 환경하고 만나서 네 삶을 살아가’라고 하는 부분을 1/3은 여백으로 남겨놨어요. 그래서 일란성 쌍둥이가 똑같은 순간은 딱 이 세포 두 개로 떨어진 0.0001초. 그 순간부터 똑같지 않아요. 그다음부터 달라지기 시작해요. 그것이 달라져야만 생명이 살아남을 수 있는 확률이 높아져요.

일본에서 20, 30년 전 연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느 한 지역에 전염병이 돌았어요. 독감이라던가 뭐 이런 병이 왔는데, 한 몇 10%는 다 걸리고, 몇 10%는 안 걸렸어요. 걸린 사람들의 부류는 식생활과 주거생활이 거의 유사해. 계속 그렇게 살다 보니까 그냥 이웃집도 걸리고 쉽게 걸리죠. 안 걸리는 사람의 지역을 가보면 고유한 식생활과 주거생활 등등 달라. 해서 그 사람들은 잘 안 걸려. 여기에 있는 분들은 걸리는데. 식생활만 비슷했어도 걸리기 쉬운 거지. 예를 들면 저렇게 아파트를 만들어 놨으니까 주거 형태는 우리에게 생각을 단일하게 만드는데 굉장히 좋은 역할을 합니다. 더 많아지면 생각이 없는 국민이 됩니다. 그러면서 히틀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생각이 없는 교민하고 사는 지도자야말로 가장 행복한 지도자”라고. 생물들은 각자 다른 유전적 조건에 다른 생각을 하도록 이미 진화가 된 채로 설정이 됐어요. 욕망이 통일성이라서 살고 싶다는 기본적인 욕망으로 보면 같은 것처럼 보이는데, 어떻게 살 것인가? 하고 가는 순간 각자 다르게 사는 거에요. 엄마가 자식들한테 SKY 갔을 때 “너 이렇게 살아라!”하고 계속 말하잖아요. 그것은 생물의 원칙에 어긋나요. 그래서는 별로 안팎이 즐거움을 발생시키는 데에 좋은 일이 안 생겨.

질문자2: 이야기를 나눌 때 그 자리에서 내가 할 말을 다 못하는 것은 왜 그럴까요?

이야기를 나눌 때 그 자리에서 내가 할 말을 다 못하는 거는 왜 그럴까요? 나중에 집에 가서야 “아! 그때 내가 이 말을 해야 했는데”하고 생각이 드는 거예요. 공격을 당했다고 하는 상황에선 더 그래요. 그 자리에서 어떤 반응을 탁 보여야하는데 항상 나중에 그러지 못한 거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돼요. 다음에는 꼭 그렇게 해봐야지 생각을 하지만 반복이 돼요.

 

정화스님: 그거는 대화를 어떻게 해왔는가에 관한 기술의 습관의 강도 차이 때문에 그렇게 된 거예요. 지금은 그래도 젊은 사람들도 많은 얘기를 하잖아요. 참고로 제가 이야기를 할 때는 항상 원래 좋고 나쁘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예전에 용산에 있는 미국 사람 집에 초청을 받아서 한 번 가봤어요. 우리 절에 사는 스님들 몇 분하고 또 자기 친구도 몇 분 불러 초청을 해서 갔지요. 그 집에서 한 십여 명 앉아서 얘기하는데, 그 집 큰딸이 5살 먹었고, 막내가 3살 먹은 아들이에요. 그러고 자기네끼리 이야기를 떠들어. 그런데 이제 3살 먹은 애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요. 그래서 “아이 씽크…”, 딱 그러니까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입을 다물고 이 아이 말을 들으려고 하더라고. 그러나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그 순간에 어떤 말을 할 것인가, 아버지나 윗사람 말고는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지요. 그래서 한국은 전반적으로 어렸을 때부터 자기의 고유한 생각을, 자기 논리로 맞게 이야기하는 습성을 별로 못 길러왔어요.

그래서 그런 순간에 자기 생각을 1분이면 1분, 30초면 30초 딱딱 맞게 말하는 게 상대적으로 약한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었는데 못했다.’라고 하는 느낌이 드는 경우가 많은데, 질문자만 그런 게 아니고 매우 많은 사람이 그럴 수가 있어요. 그래서 ‘아, 이것은 그래서 그런 거구나.’ 하는 정도만 생각을 가져가셔야 해요. ‘아! 여기에 무슨 문제가 있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 생각의 훈련을 자꾸 하시다 보면 잘 정리하는 습성이 길러지면서 어느 순간 말이 잘 되겠지요. 그런 것이 좀 약하신 분들은 미리 간결하게 이야기 순서를 쓰셔서 거기에 맞게 말하는 훈련이 필요해요.

질문자3: 저를 보시는 선생님들이 공통으로 하시는 말씀이 너무 느슨하게 공부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여기서 공부한 지 3년 정도 됐는데 저를 보신 선생님들이 공통으로 하시는 말씀이 “너무 느슨하게 공부한다. 치열하게 좀 해라.” 하십니다. 저는 나름대로 열심히 하거든요. 티비도 안보고 유튜브도 거의 안 보고요. 시간을 되게 촘촘히 쓰면서 나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정화스님: 우선, 남들 생각에 너무 맞추려고 할 필요가 없어요. 그분들이 말씀하시면 의견을 존중해드릴 뿐이지 안 맞춰도 됩니다. 두 번째, 창의력이나 창조성이라고 하는 거는 다양한 정보를 자기 고유한 생각의 무늬로 엮어내는 힘이에요. 만일 텔레비전도 안 보고 뭣도 안 하는데 이 정보들을 엮어서 내 색깔 있는 무늬로 그것을 표출하는 방법이 뚜렷이 나타나지 않으면 열심히 해도 안 하는 것처럼 보여요. 그래서 많은 정보를 습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습득된 정보를, ABCD를 ADBC로 엮기도 하고 거꾸로 엮기도 하고 다른 걸 엮기도 하면서 다른 식으로 보는 자기만의 고유한 사유의 길들을 계속 연습하는 게 중요해요. 그리고 이것은 전혀 다를 수가 없어. 왜냐면 내가 보는 것이니까. 어떤 사실들을 얘기하는 게 아니고 사실들을 가지고 엮어서 세상을 내가 해석하는 거거든요. 그렇게 해서 이제 어떤 하나의 키워드가 만들어져서 세상을 독특하게 해석하면은 그것이 역사상의 대가가 되는 거죠. 예를 들어 부처님은 키워드가 연기라는 키워드에요. 세상의 모든 생명은 생명 공동체라는 말이에요. 그것이 연기라고 하는 키워드인데 그 이전엔 아무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어요. 고대 인도에서는 생명은 신이 부여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부처님은 그것을 부정하며 ‘생명은 전체 우주가 가지고 있는 생명 공동체를 통해서 사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죠. 그게 연기라는 키워든데 그걸 말하는 데 6년 걸린 거죠. 출가한 이후로 온갖 수행을 다 해봤는데 마지막 깨닫기 일주일 동안 삶을 보는 하나의 키워드가 생긴 것이죠. 이런 식으로 전 역사에서 사유의 다른 패턴을 만들어내면 이제 그것이 대사상가 되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다들 적당한 사상을 만들어 자기 색깔이 있는 사람도 있고 아니면 되풀이하는 사람도 있고 해요.

불교의 선종에선 특히 자기 색깔이 없는 것들은 전부 다 죽은 말이라고 불러요. 그래서 ‘네 삶을 네가 사는 것이지’ 이것을 가장 강력하게 말하는 대표적인 사람은 운문스님하고 임제스님하고 두 분이 계시는데, 운문스님이 뭐라고 말했냐면 “만일 석가모니 부처가 그 말을 할 때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석가모니 부처님을 절구에 빻아서 세상에다가 해악을 끼치는 일을 더는 못하게 했겠다.” 이렇게 말을 해요. 자칫하면 유아독존을 잘못 해석할 수가 있는 거예요. 그다음에 임제스님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구를 만나면 친구를 죽여라.”라고 말했어요. 부처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조사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부모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선생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고 말하는 순간 전부 이제 부처, 조사, 부모님, 선생님, 위대한 사람의 종이 돼요. 종이 되지 않으려면 사상적으로 그 사람들을 죽일 힘이 있어야 해요. 그래서 생물 그 자체는 하나하나 삶 그 자체가 완벽하게 고유한 무늬로써 자기 삶을 사는 거예요. 중요한 것은 배움을 잘 꿰어서 ‘어떻게 해석하는 새로운 고리를 만들 것인가?’ 이것이 중요한 것이지 스트레스를 줘서 자기를 끌고 가는 데만 있는 건 아닙니다. 너무 거기에 대해서 하는 척만 하시고 꼭 거기에 안 따라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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