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대중지성 정리

 

질문자1: 상대방과 잘 공감할 수 있는 관계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데 있어서 자꾸 경쟁심이 올라와요. 그래서 상대보다 내가 더 잘난 사람이고 싶은 마음이 자꾸 올라와서 관계를 맺는데 어려움을 겪는 게 아닐까요? 이런 마음을 좀 내려놓고 상대방이랑 좀 잘 공감할 수 있는 관계를 맺으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정화스님 “나의 존재 가치가 무엇인가?”라고 하는 것의 설정을 바꾸어야 되요. “나는 이런 것이 있어야만 내가 돋보이고, 내 삶의 가치가 있어.”라고 우리가 배워왔던 많은 것들이 사실상 어떤 의미에서는 그냥 지배 이데올로기가 주입 시켜 놓은 가치체계인 경우가 굉장히 많아요. 그런데 오늘날에는 자동기계, AI 등을 통해서 사람이 재화를 만들어내는 직접적인 일을 하지 않아도 될 일이 많아지니까 그런 것이 좀 약해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속에는 주입된 가치체계들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이긴다고 하는 말은 그냥 다른 사람을 이기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이와 같은 것을 갖고 있을 때에 더 잘나 보이는 것처럼 만들어진 내부의 신념 체계가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 거예요. 여기까지는 우리가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어요. 이미 우리가 살아온 과정 중에서 알게 모르게 마치 그렇게 하면은 잘 사는 것처럼 교육으로 많이 배웠어요. “아! 나는 이런 것으로 삶을 살려고 이렇게 살아왔구나. 그런 과정에서 우리가 많은 고생을 했구나.” 여기까지만 내가 해 줄 수 있는 이야기예요. 그 다음부터는 이제 삶이란 그렇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자기 나름대로 가치체계를 설립해야 해요. 그 설정이 안 되어 있으면 이미 설정되어 있는 것으로써 자기를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요즘에는 “나란 무엇인가?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하는 것을 사람들이 막연히 밝혀 놓지 않고 생물이나 물리나 여러 가지 인지, 과학이나 이런 것을 통해 가지고 훨씬 사실에 기반을 두어 볼 수 있는 체계가 많아요. 그걸 보고 읽고 이해하게 되면 내가 설정한 가치체계에 내가 그렇게까지 할 이유도 없는 경우를 좀 쉽게 자기 납득이 돼서 설정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경쟁심은 이미 설정되어 있는 삶의 계획 때문에 불쑥불쑥 올라오는 것이죠. 불쑥불쑥 올라오는 것을 지켜보고 그다음에 숨을 한 세 번쯤 쉬었다가 경쟁심으로 가는 생각을 다른 방향으로 바꾸는 연습을 자꾸 해야 되요. 그런데 경쟁심이 올라왔는데 어떻게 볼 것 인가에 대한 이론적인 체계가 없으면 막연한 것이죠. 예를 들면 요즘은 이성애니 동성애니 양성애니 이런 것이 많잖아요. 그래서 어떤 학자는 지구상에는 70억 개의 성적인 애정 관계가 존재한다고 봅니다. 각 사람마다 전부 다른 성적인 애정 관계가 존재할 정도로 신체가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이성애자라 할지라도 마치 남자와 여자로써만 사랑을 한 것처럼 보였는데 내부에서 엄밀하게 이루어지게 하는 것은 각 사람마다 다 다르다는 거예요. 좀 더 깊게 보면 각 사람마다 세계를 이해하는 지도를 전부 다르게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다른 걸 갖고 있는 기계(사람)는 사실상 존재 가치로써 비교할 수 있는 게 아닌 것이죠. 재빨리 그런 걸 설정해 놓고 보면 “아! 나는 이렇게 세계를 보고 있구나. 그러나 이걸 가지고 다른 사람과 경쟁할 이유는 없어. 나도, 저 사람도 나름대로 아까 말한 70억 개의 세계지도 중에 하나로 살고 있는 거고, 나도 70억 개의 세계지도 중에 하나를 갖고 있기 때문에 내가 이 일을 좋아서 할 뿐이지 이기려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가능한 일도 아니고, 내가 이겼다고 착각을 하는 거구나.” 권력 관계에 있어 그런 것을 설정한 다음에 자기를 보고 그리고 그렇게 살아온 자기에 대해서 고생했다고 말해 주고. 그러나 그런 쓸데없는 고생을 하지 말고 ‘다른 쪽으로 가자’라는 길의 설정을 빨리 만들어야 되요. 그걸 누가 어떻게 만드느냐? 사실상 이것이 공부죠. 아까 말한 대로 성적인 지향성조차도 70억 개가 있다고 생물학자가 말하고 있는 판에 어떤 한 사람이 정해 주는 길로 모두 간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약간씩 다른 것으로써 자기 삶을 보는 길을 만들어 가는 것. 그 다음에 그러한 과정에서 90초 동안 감정이 동반된 생각이 일어나면 그냥 감정이 일어나는 게 아니라 호르몬이라든가 신경조절 물질이라는 것이 나와 가지고 뇌 속에 90초간 머물다가 나로 하여금 그런 생각을 하게 하는 거예요. 그리고 가만히 90초 있으면 사라지는 거예요. 그러면 편히 그런 것을 자기가 객관화해서 볼 수가 있어요. 그것이 올라올 때는 이미 우리가 습관화되어있어 쉽게 보기 어려울 뿐이죠. 그런 과정에서 이제 자기 외부에서 주어진, 즉 학습 받아진 것 가운데 불필요한 가치체계를 덜어내는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질문자2: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최근에 저희 시아버지도 그렇고 세입자도 그렇고 상황을 모면하려고 뻔뻔한 거짓말을 저도 다 아는 사실인데 그때그때 둘러대고 있어요. 이렇게 태연하게 거짓말하는 사람들을 겪다 보니까 “저 사람들의 심리가 뭘까? 어떻게 저렇게 형성이 되었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쨌든 거짓말은 오계를 어기는 것 중 하나잖아요? 그래서 이걸 그냥 그 사람의 특성으로 받아줘야 하나? 아니면 호통을 쳐야 하나? 뭔가 그 자리에서 화를 좀 내서 다음에는 거짓말을 못하게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정화스님 생각의 중추 기관인 뇌가 하는 일 중에 하나는 자기가 하는 말과 행동을 합리화시키는 거예요. ‘옳다. 그르다.’ 라고 하는 일반상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보면 옳지 않은 일을 해놓고 그것을 자기가 합리화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이 합리화를 잘못 만들어 놓으면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를 주고도 자기는 별로 그런 것을 잘 안 느껴요. 그래서 기본적으로 내가 가지고 있는 세계 판단기준 중에 하나가 자기합리화라는 것을 이해해야 되요. 그래서 그 사람은 다른 사람 열 사람이 봐도 거짓말 하고 있는 것이 확실해도, 그 사람은 ‘내가 그럴 수밖에 없다.’라고 자기합리화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사람은 “네가 틀렸다.”라고 하는 말 자체를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과 가까운 관계있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그 사람이 하는 자기합리화를 통해서 기분 나쁘거나 마음이 흔들리면 나만 괴로운 거예요. 거짓말 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는 것이 합리화가 되어 있어서 별로 안 괴로워요. 왜냐하면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당연한 거야.”라고 자기한테 말해서 그것 가지고 전혀 괴로워하지 않는 거예요. 내가 괴로워하는 것 자체, 도덕 일반의 상(相)으로 보면 내가 옳은 일인 것 같기는 하지만 괴로워하는 일은 자기만을 힘들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괴로워하는 쪽으로 가지 않는 훈련을 하면서, 나중에 좋은 쪽으로 납득되는 일들을 이야기하는 그런 단계를 만들어내는 훈련을 하는 수밖에 없어요. 기본적으로는 ‘자기합리화’입니다. 그것이 안 일어나면은 사람은 견디기가 어려워요. 자기가 자기를 부정하는 일이 생기거든요. 그래서 그것이 강한 사람들은 견디지 못하고 돌아가시는 분들도 계시는데, 어떤 분들은 태연하게 다른 사람들을 막 비난해도 하나도 괴로워하지 않는 것을 뉴스에서 자주 보잖아요. 그럼 이 사람들은 비난하고, 욕하고, 약자를 혐오하는 것에 대해서 오히려 굉장히 자기의 존재 가치를 느끼고 있는 사람이지요. 이 사람들은 이러한 일들이 습관이 되어 가지고 백 마디 말을 이야기해봐야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래서 방법과 태도나 이런 것들을 다 설정해 가지고 오랜 기간 동안 뭔가 이야기하는 것 이외에는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것을 보고 괴로워하고 힘들어하면 내가 거짓말에 대한 허물을 줘서 그런 것이 아니고 그 사실을 보고 ‘불필요하게 자기가 자기를 힘들게 했던 것’ 이것을 내가 받게 되는 거예요. 자기 자신이 잘못한 일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몸과 마음을 괴롭게 하는 일을 만들어내지 않는 습성을 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질문자3: 삶이 무상하기 때문에 오히려 괴로운 게 아닐까요?

저는 불교에서 “모든 것은 무상이다.(諸行無常)” 라는 것은 진리라고 생각하는데 거기에 또 “모든 것은 다 고통이다.(一切皆苦)”가 붙어있거든요. 그래서 “무상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이 변화하고 그래서 내가 더 가질 필요도 없고 아무런 욕심도 가질 것 없음. 그 생각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게 아니냐?”고 하는데. “무상하기 때문에 내가 가질 수도 없고, 내 것이 아니니까 괴롭다.”는 그 생각으로 봐서는 저는 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거든요. 그래서 이걸 어떻게 받아들이고 제가 이렇게 간직을 해야 할까 조금 궁금합니다.

 

정화스님 우선 우리가 사물을 이해하는 것은 사물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이 사물이 무엇이다.”라고 규정되어 있는 기억정보를 조합해서 이해를 해요. 우리 인식 안에서 이해된 그림자는 자기 내부에서 만든 영상이나 이미지에요. 그런데 이런 내부의 영상이나 이미지들은 잘 안 바뀌어요. 그래서 영상이나 이미지는 무상하지 않는 거예요. 세상은 무상한데 내가 가지고 있는 기억 정보는 항상(恒常)인거죠. 세상의 흐름과 내가 가지고 있는 기억과는 어긋나는 거예요. 근데 보다 더 내부화 되어 있는 것은 자기가 세상을 인식하는 태도예요. 그런데 이 인식 태도하고 세상의 흐름은 항상 어긋나는 일이 많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것을 집착이라고 해요. 내가 어떤 것을 가지려고 집착하는 것이 아니고, “이것이 좋다.”라고 내부화되어 있는 영상의 메커니즘이 무상한 외부하고 어긋나요. 그래서 괴로운 거예요.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니고, 내부화되어 있는 이미지를 구성하는 기억 정보들의 항상(恒常) 때문에 괴로운 거예요. 내부의 기억 정보들은 세상의 기억 정보와 항상 매칭 되지 않는 거예요.

 

질문자3: 그러면 수행을 하고자 할 적에 내부에 가지고 있는 영상의 기억들을 외부가 무상하다는 진리와 맞추기 위한 그런 과정을 수행이라고 하는 건가요?

정화스님 예 그렇죠. 예를 들어 내부를 영상화시켜서, 우리가 옛날에는 60년, 오래 살면 80년을 사는데, 80년 동안 내부가 가지고 있는 고정된 이미지로 세상을 볼 때는 크게 불편하지 않아요. 그런데 ‘외부하고 조금 초점이 어긋난다.’는 것을 내가 먼저 이해하면 자기가 세상을 보는 방법으로 내부의 이미지를 조정해 놓았으니까 내부의 이미지 자체가 없으면 살 수가 없어요. 그래서 자기한테는 이것만이 세상은 아니지만 또 이것만이 세상이라고 이야기 할 수도 있어요. 그것 이외에 그것 아닌 것으로서 자기가 외부하고 접속하려면 내부에서 외부를 인식하는 마음 자체가 한 번 바뀌어야 되요. 이렇게 분별도 필요하고 무분별도 필요하고 그런 거요. 근데 우리는 주로 세계하고 일체의 상으로 존재하는 무분별은, 특히 요즘 사회에서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사건, 사물을 잘 분별하고 요약해서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한 학습과제이기 때문에 우리 뇌에서 세상을 보는 것들은 내부화된 이미지를 공고히 하는 것뿐이에요. 이것을 내려놓아야만 다른 식으로 세상이 보이는 것이 일어나니까, 수행을 한다는 것은, “세상을 보는 것이 내가 만든 내부 이미지라고 하는 창을 통해서 본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을 확실히 경험해야 되고, 그다음에 이 경험을 내려놓고 다른 양상으로 세상을 접속하는 경험을 하면서 자기 생각으로부터 유연해지는 거예요. 그래야 인제 무상과 항상성에 대해서 이해를 제대로 하게 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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