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연

 작년 한해, 나는 니체를 배우면서 ‘원한감정’에 꽂혔다. 나는 ‘원한감정’이 실질적으로는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하면서 마음으로만 복수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내가 싫어하지만 특별히 대항할 수 없는 사람들, 특히 시어머니에 대한 마음이 그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 문제를 풀어보고 싶었지만 결론적으로는 무엇이 원한감정인지 조차 명확하게 말하기 어렵다.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원한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면 지금이랑 다를까? 그것을 알게 되면 시어머니를 덜 미워할 수 있을까? 내 생일 날, 불같이 화를 낼 때를 모두 잊었다는 듯 웃으며 꽃다발과 용돈을 안겨주는 시어머니를 보며 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어머니에게 진 것이 아니라, 내가 나에게 진 것이다. 어머니를 대하는 나의 태도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보낸 문자를 보고 주말에 이러면 안 된다고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나를 보며 남편이 한마디 한다. 그냥 무시하면 되지 뭘 일일이 반응하느냐고 말이다. 그렇다. 나는 꽤 반응적인 인간이다. 니체는 반응적인 것을 ‘약자’의 특징으로 능동적인 것을 ‘강자’의 특징으로 보았다. 반응적인 약자는 원한감정에 빠지기 쉽지만 강자는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반응적인 약자를 벗어나 어떻게 능동적인 강자가 될 수 있을까? 

수동적 반응하기

 나는 불합리한 일에 화를 내야 하지만 상대의 힘이 나보다 세기 때문에 마음으로만 복수하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니체는 상상의 복수밖에 하지 못하는 자들의 생리적 패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모든 고상한 도덕이 자기 자신을 의기양양하게 긍정하는 데서 생겨나는 반면, 노예 도덕은 애당초부터 ‘외부적인 것’, ‘다른 것’, ‘자기자신이 아닌 것’을 부정한다. 그리고 이 부정이야말로 노예도덕의 창조적 행위이다. 이처럼 가치를 정하는 시선을 바꾸는 것, 이렇게 시선을 자신에게 되돌리는 대신 반드시 바깥을 향하는 것이 사실 원한에 속한다. 즉 노예 도덕이 생기기 위해서는 언제나 먼저 반대 세계, 외부 세계가 필요하다.

프리드리히 니체,『도덕의 계보』, 연암서가, 43쪽 

 내게 시어머니는 남편을 선택하며 따라온 원치 않은 존재이다. 그녀는 그동안 내가 만나지 못했던 새롭고 이질적이며 당황스러운 세계,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진 외부였다. 그녀는 설거지는 당연히 며느리의 몫이라고 말하거나, 문안 인사를 하지 않았다, 생일상을 차리지 않았다 등의 말로 나를 당황하게 했다. 나는 남녀는 동등하며 내가 남편보다 스펙이 좋기에, 시댁입장에서 오히려 내게 고마워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시어머니의 행동이 전근대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앞에서는 어찌할 줄을 몰라 속으로만 열불을 내며 괴로워했다. 하지만 피할 수도 없는 관계이기에 갈등은 쌓여만 갔고 나는 고리타분하고 지배적이며 못된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상대의 힘(자극)을 받기만 하는 수동적 상태에서는 상대와 자신에 대한 불만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 때 우리는 자극을 주는 상대를 ‘악한 적’, ‘악한 사람’으로, 그에 대립하는 자신을 ‘선한 사람’으로 설정한다. 마음속에서 악한 사람에게 비난하고 복수하는 쾌감을 누리고, 자극을 받기만하는 자신에 대한 불만도 해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악의 구도는 자신의 수동적 상태를 보기 보다는 ‘상대’에게 모든 시선을 돌리게 한다. 악한 인간이 선한 인간을 괴롭히는 일방적 구도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선악의 구도를 지우고 본다면 나는 행위 할 수 없었고, 상대는 행위 한 것뿐이다. 그런데 행위 자체가 ‘죄’가 되어 버린다. 

노예 도덕이 생기기 위해서는 외부 세계가 필요하다

 이것이 노예 도덕의 창조성이다. 이 창조성은 가치의 전복에 있다. 적극적 행위가 ‘악’으로,  수동적 행위가 ‘선’으로 전도된다. 약자는 가치의 전도를 통해 무력한 자신이 선하다고 기만한다. 세계는 작동하며 경합하는 충동(힘)들의 질서이다. 충동들의 세계에서는 힘들의 충돌과 경합만이 있으며 언제나 강한 힘이 약한 힘을 희생시킨다. 하지만 약자는 이 세계를 보는 것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것을 넘어 가치를 전복시킨다. 선과 악, 도덕이라는 옮고 그름, 가해자와 피해자 등의 대립구도를 덧씌워야만 자신의 무력함을 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행위하는 기쁨

니체는 선악이 아니라 행위 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강자와 약자를 구분한다. 충동들의 경합인 세계에서 어떻게 힘을 쓸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제 도덕의 장에서 행위의 관점으로 시선은 이동한다. 선악의 구도, 가해자와 피해자를 벗어나 행위와 행위(힘과 힘)가 어떻게 상호작용 할 것인가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고귀한 인간 자신이 원한을 느끼는 경우에는 말하자면 즉각적인 반작용을 일으키며 대단히 약화되기 때문에 아무런 해독을 끼치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약한 자와 무력한 자는 수많은 경우에 불가피하게 원한을 느끼지만 고귀한 인간은 결코 그렇지 않다. 자신의 적, 자신의 재난, 자신의 악행조차 오랫동안 진지하게 생각할 수 없다는 것 – 이것이야말로 조형하고 형성하며 치유하는 힘과 또한 망각하게 하는 힘을 넘치게 지닌 강하고 충만한 인간의 표시이다. 

프리드리히 니체,『도덕의 계보』, 연암서가, 46쪽 

그렇다면 강자도 원한감정을 느낄까? 그렇다. 하지만 약자가 힘을 받기만 하고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다면, 강자는 바로 반작용을 일으킨다. 힘과 힘은 충돌하고 더 작은 힘이 더 큰 힘에 흡수된다. 강자는 자신의 몸에 해로운 벌레를 발견한 것처럼 단번에 원한감정을 털어버린다. 바로 털어버렸기에 원한감정이라는 약한 힘은 강자에게 아무런 해독도 끼치지 않으며 더 이상 작동하지 않기에 오랫동안 생각하며 복수할 수도 없다.  

어머니를 통해 보게 된 내 문제는 싫어하는 것은 쉽게 배척하고 관계 맺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익숙하고 편한 관계만 맺고, 낯선 것이 압력을 준다고 느끼면 바로 배척해버린다. 하지만 힘의 차원에서 보면 사자는 양을 잡아먹을 수밖에 없다. 양은 사자에게 공포를 느끼며 비난할 수 있으나 선악의 문제는 아니다. 강자라면 어떻게 행동할까?

힘과 힘은 충돌하고 더 작은 힘이 더 큰 힘에 흡수된다.

어머니는 전근대적인 시대의 사람이기에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제 나는 그 힘에 어떻게 반작용을 일으킬까? 속으로만 복수하는 찌질이가 아니라 어머니의 지속적인 압력과 강제 속에서 어떻게 대처할까? 시원하게 맞짱을 뜰까 아니면 상냥하게 웃으며 ‘네’라고 말하면서 어이없는 말들을 흘려보낼까? 힘을 써보면 누가 사자이고 양인지 알게 될 것이다. 

힘을 어떻게 쓸지의 문제로 보면 존재와 행위를 분리하며 상상으로만 복수할 필요가 없다. 힘을 썼는데 상대에게 진다면 상대의 우위를 인정하고 복종하던지 다음에는 어떤 전략으로 이길지를 고민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최소한 자신은 속이지 않아도 된다. 니체는 강자의 특징으로 무의식적으로 완벽하고 확실하게 작용하는 조절능력을 말한다. 이는 존재와 행위의 일치 상태이다. ‘머리로는 아는데 실천으로는 안돼요’라는 흔한 변명은 강자가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말일 것이다. 

강자는 힘을 쓸 수 있기에 때문에 존재와 행위를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다. 낯선 것과 충돌하면서 예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자신을 만들어가는 사람,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 나가는 기쁨, 이것이 강자의 행복이다. 행위하기에 행복한 사람, 행위하기에 자신에게 솔직한 사람, 이것이 강자의 행위와 행복이 분리될 수 없는 이유이다.

스스로에게 선물이 되기

 스스로가 강자가 되기를 포기하고 한 발짝도 달라지지 않기로 선택했을 때, 안락과 휴식을 택했을 때, 우리에게 남은 것이 원한감정이다. 이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서 존재와 행위가 분리된다. 존재하지만 행복하지 않고, 강한 힘을 악으로 전도해야만 살아있다고 느끼는 나약한 상태, 안락을 대가로 생명력이 약화되어 간다. 나는 힘을 쓰지 못하기에 작은 자극에도 점점 반응적이며 불씨처럼 타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상태를 외부가, 적이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약자는 자신에게 가장 해로운 일을 하고 있다. 스스로를 외면하면서 스스로를 나약화시키는 일을 가열차게 푸쉬하는 것이다. 

 고귀한자가 약자를 칭했던 어원을 살펴보면 ‘나쁜’, ‘비겁한’, ‘불행한’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들은 약자를 불행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자신을 속이지 않으면서 행복할 수 있는데 스스로가 그 일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예속에 가두는 삶, 얼마나 불행한가. 원한감정의 늪에 빠지려할 때마다 내가 스스로에게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볼 수 있어야 한다. 스스로를 나약하게 만들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를 고귀하게 만들어가는 기쁨을 선물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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