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찬영(감이당 장자스쿨)

우리가 인생이라고 부르는 이 기묘하고도 복잡한 사태에는 우주 전체가 어마어마한 규모의 장난이나 농담으로 여겨지는 야릇한 순간이 있다.

허먼 멜빌,『모비딕』, 작가정신, 291쪽

   문득 우주 전체가 내게 장난을 치거나 농을 건네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내게는 이 글을 쓰는 지금이 그러하다. 어쩌다 <모비딕>을 만났지?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이 책을 만나기 전에 2년간의 대중지성 프로그램들이 있었고, 그 이전에는 또 사주명리가 있었고, 사주명리 이전에는 교회가 있었고, 엄마가 있었고…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과거가 이러했기에 오늘 이렇게 되었다라는 설명은 뭔가 좀 부족하다. 물론 인과의 고리는 당연히 작동했겠으나, 왜 ‘그 때’였으며 또 ‘하필’ 나일까라는 이 질문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공백을 채우기 위해 우리가 자주 쓰는 말이 바로 ‘운명’이다. 그렇다, <모비딕>을 쓰게 된 이유를 묻는다면 거두절미하고 감히 운명이라고 말하고 싶다. 두 번의 수업을 거치며 여러 동기를 구구절절 설명했지만, 그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는 단어는 바로 이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주 우연히 지난 방학 때 심심풀이 땅콩으로 읽어나 보자, 라고 집어 들었던 이 책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선택해버리고, 또 한참 후에야 거기서 내 질문을 만났던 순간의 놀라움이 설명될 수가 없다. 사실 내가 책을 선택했다기보다, 차라리 선택되어진 건 아닐까? 내게는 이 모든 것이 거꾸로 진행되었다.

사실 내가 책을 선택했다기보다, 차라리 선택되어진 건 아닐까?

   이 운명적 만남은 내가 지난 2년간 겪었던 사상의 지각변동 때문에 더 극적이다. 그때만 해도 신의 공명정대한 섭리 위에서 움직이는 코스모스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제 내가 발 디디고 있는 세상은 절대자도, 공평무사한 그 무엇도 없는 무진장한 흐름, 즉 카오스 그 자체인 자연 속에 놓여있음을 안다. 이런 앎의 전환을 겪으며 바야흐로 이 자연 속의 삶과 죽음, 또 운명이란 무엇인지 탐구해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흰 고래를 쫓아 망망대해를 누비는 에이허브 선장처럼, 저 먼 원시 부족의 젊은이들이 성인식을 치르기 위해 깊고 깊은 정글 속으로 고독하게 걸어 들어가는 것처럼. <모비딕>의 작가인 허먼 멜빌 역시 청년 시절 고래잡이의 위험을 겪으면서 자유롭고 편안한 악당 철학을 낳게 되었다고 털어놓는다. 만약 당신이 삶 속에 산재한 위험과 고통, 심지어 죽음조차도 운명의 짓궂은 장난이라고 느끼게 된다면, 또 인생에서 중차대한 모든 순위들을 뒤바꿔버리는 철학을 만나게 된다면 그것은 충분히 악당이라 불릴만하다. 허먼 멜빌이 포경선 위에서 배운 철학이 바로 그러했다.

   작가 스스로도 그렇게 명명한 탓인지 <모비딕>은 항상 그 앞에 “사악한 책”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한마디로 이 책은 악명 높다. 무엇이 이 책을 악으로 들끓게 만들었을까? 니체는 악이란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하나하나의 덕(德,virtue)들이 벌이는 전쟁과 싸움(Z, 58쪽)”이라고 말했다. 선에 대비되는 성질로서의 악이 아니라, 존재를 뒤흔들고 정신의 전부를 차지하길 원하는 이 들개 같은 힘이 바로 악이다.

 이 정도의 악의를 가지고 덤벼야 비로소 위엄 넘치는 흰 고래를 볼 수 있게 된다. 지구의 3분의 2를 뒤덮고 있는 이 거대한 바다 위에서 자신의 목표물인 모비딕 한 마리를 정확하게 추격할 수 있는 이 초인간적 능력은 에이허브가 가진 악마적 힘을 가장 잘 보여준다. 삶과 운명에 대한 새로운 청사진을 조심스레 그려보고 있는 나로서는 이런 사악함이야말로 절실하게 필요한 동력이다. 현재 내게 주어진 실존적이고 근원적인 질문을 어물쩍거리다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나를 사로잡은 <모비딕>의 넘치는 악의만큼이나 나에게도 삶에 던져진 질문에 스스로 답하려고 몸부림칠 수 있는 힘이 있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또 쓰면서 말이다. 결국 <모비딕>만큼 지금의 나에게 가장 시의적절한 탐구서는 없다. 이 치열한 사악함이 들려주는 삶과 죽음, 궁극적으로는 운명에 대한 이야기, 이것이 바로 모비딕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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