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스님 4월 선물강좌 중

마음을 들여다보는 훈련

미래에 없어지지 않을 직업 중에 하나가, ‘심리’. 심리치료사, 심리연구사, 심리쪽. 마음 훈련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른 사람들. 앞으로는 많은 남는 시간에 지금까지는 내가 그런 것을 하고 싶어도,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내가 이런 마음을 먹어야 되겠지’ 라고 해서는 절대 마음대로 안 됩니다.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따로 있으면 그렇게 할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 점점 밝혀진 것에 의하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요 안에서 신경 세포들끼리 주고받는 이야기예요. 이 안에서 계속 조잘조잘 댄다구요.

오늘 잠깐 어떤 신문을 봤더니, 꿀벌이야기를 하더군요. 벌이 집단 지성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벌이나 개미, 이것은 한 마리가 개미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벌이 한 마리로서는 그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거예요. 수천만 마리가 하나에 모여 있으면 그것이 마치 하나의 유기체처럼, 우리 몸으로 보면 벌 하나하나가 세포 하나하나예요. 그래서 이것들이 이야기를 해야 거기서 뭔가 언어들이 펼쳐집니다.

개미들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개미 수십만 마리가 하나의 유기체로 움직이는 거예요. 우리 감히 지금 내 뇌가 뭘 하는지 잘 모릅니다. 그냥 지 일만 해요. 머리는 머리 일만 합니다. 그런데 제 유기체가 이렇게 가게 됩니다. 개미집을 지을 때 보면 막 집을 짓고 있는데, 그 집이 어떻게 될지, 뭐가 어떻게 될지 아는 개미가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DNA를 통해서 주어진 일만 하면 그냥 하나의 집이 되어버려요. 내 발톱세포가 내 머리끝 세포의 이야기를 전혀 모릅니다. 그런데 안에서 화학분자나 전기신호 등등을 내 가지고 뭔 일 하는지는 모르지만 어떻게 일이 돼 가지고, 이것이 매일매일 돌아가듯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전체가.

자 그런데 그 일을 뇌에 천억 개나 되는 심장 세포들이 마치 하나처럼 움직이는 거예요. 그래서 그 나름대로 전부 다 생각 길이 다 정해져 있어요. ‘난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몰라.’라고 말해도 이미 자기한테는 그런 생각 길이 있어요. 근데 이 생각 길이 쉽게 안 바뀌기 때문에, 앞서 말했듯이 일생동안 같이 살면서 배우자를 한 번 바꿔보려고 노력해도 안 바뀌는 거예요.

그런데 묘하게도,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훈련을 하는 거예요. 근래에 제가 읽는 책 중에 하나가 자코메티의 ‘아뜰리에’라고 하는 책을 서평이 나와서 한 번 읽어봤는데, 그 사람이 …아무튼 해 가지고, 그게 뭐냐면은 한 사람을 볼 때 내 역사가 참여하지 않고 저 사람 속에 들어있는 다른 사람의 역사를 다 걷어내는 거예요. 다 걷어내요. 그래놓고 내가 생각할 때에는 ‘이것이 이것이다.’라고 생각하는 부분만 드러내려고 하는 작업을 했다는 거예요. 우리 삶은 절대 그렇게 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내 삶 속에는 이미 어마어마한 생명들의 역사가 함께하고 있기 때문에 덜어낼 수가 없어요.

서구에…보면 자기 정합성, 자기 정체성을 알려고 하면 내 속에 들어있는 다른 역사를 걷어내야 해요. 근데 우리 안에는 걷어내도 되는 역사가 많이 있어요. 걷어내도 되는. 여기 안에서 훈련하면 내가 다른 사람의 시선을 그렇게 의식을 덜 해도 되는 부분들은 덜어내도 돼야 해요. 자기 역사니까. 근데 어떨 때는 자기 역사의 색깔보다도, 나에게 참여한 다른 역사의 색깔이 너무 진해가지고 스스로 같이 있는 존재이면서도 나는 다른 사람의 시선이 와서 내 역사에 참여하니까 마치 내 역사는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일이 많아지는 거예요.

그런데 마음 들여다보기 하면 묘하게 이렇게 시간 추상과 외부를 극도로 생각했었던 부분의 역할을 하는 뇌의 신경세포들이 잠시 휴식을 취합니다. 실제로 촬영했을 때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어디로 가느냐 하면, 지금 여기에 온전히 존재했었던 기억의 층위들이 굉장히 강한 힘을 갖고 뚫고 나오는 겁니다.

인류에게 생긴 ‘불안’이라는 병

우리가 미래를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 학자들에 따르면 5만 8천 년 전에 시작됐다고 합니다. 58천 년 이전에는 미래라고 하는 생각이 없었어요. 항상 지금 여기만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 여기에 접근하는 방법은 과거의 기억들이에요. 근데 5만 8천 년 전에 갑자기 이것을 지금 여기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고 하는 하나의 시간 축을 형성하는 사유가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지금 여기를 살았던 것보다는 미래를 살기 위한 준비가 훨씬 강하게 여겨집니다. 근데 미래는 우리 삶에 참여한 제3의 역사에 제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온갖 역사들이 개입을 하는 거예요. 제가 원해서 개입하는 게 아닙니다. 제가 60년대 농업시대에 살면 그냥 농업시대 사회가 역사가 개입되기 시작하는 거예요. 지금 시대를 살면 지금 시대의 사회적 그런 역사가 개입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안 되는 미래가 굉장히 많이 경험하기 시작해요. 그래서 불안도 동시에 증장되기 시작했답니다. 그래서 한 6만 년 전부터 인류한테 생기는 병이 불안병입니다. 부모가 자식이 밖에 가서 문 앞에서 사라지기만 하면 걱정이 생기는 병이에요. 즉 그 애가 있는, 즉 지금 여기가 아니죠. 일어날 수 있는 미래를 생각하면 그냥 불안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걱정이 되는 거야.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라고 하는 사람은 ‘죽음에 이르는 병은 불안’이라고 말했죠. 근데 그것이 그냥 한 불과 6만 년 전에 생겼다고 하는 거예요. 불안이라고 하는 게.

공포라는 감정은 있었지만, 미래를 불안스럽게 보는 감정이 없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를 들여다보고 나면, 묘하게 그런 것들을 가지고 미래를 추측하고 판별하는 불들이 사그라듭니다. 작업을 안 해요. 그러면서 지금 여기의 과정을 극대화시킵니다. 그런데 자기가 자기 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으면 대부분 다 기뻐해요. 어린 아이들이 놀이에 빠져있는 것하고 똑같아요. 자기 마음을 들여다봐서 미래로 가 있지 않고, 과거로 가 있지 않고 지금 여기로 온다면, 마치 애가 부모님의 우산 속에서 내일을 걱정하지 않고 지금을 사는 것과 비슷해져요. 행복감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한테 자기 자신을 잘 들여다보게 해가지고 자기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들이, 그 전에는 그 일을 우선적 가치로 두고 싶어도 목구멍이 포도청이어서 할 수가 없었어요. 근데 앞으로는 그 일을 사회 공공 재화를 통해서 해 줄 테니까, 네가 너 자신한테 ‘행복하세요’라고 하는 일을 옆 사람 눈치 안 보고 할 수 있게 되는 거예요. 옆 사람 눈치 안 보고. 지금 애기가 배고프다고 울고 있는데 밖에 나가서 일 안하고 있으면 아내든 남편이든 서로가 서로한테 부끄러울 것 아니에요. 그런데 그런 일들이 어느 정도 사회적 함의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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