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남(감이당 금요 대중지성)

작년 추석 연휴기간 벌어진 사건이다. 모두가 잠든 새벽녘, 고성과 폭언으로 동네 개들마저 따라 짖을 정도로 우리 부부는 흥분해 있었다. 감이당 공부를 그만두라는 남편의 일방적 통보에 나는 치솟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실례합니다.” 예기치 않은 경찰의 방문에 부부싸움은 자동 종결됐지만, 나와 남편은 큰 충격을 받았다. 평소 아빠의 폭언에 불만을 품었던 딸이 용단을 내린 것이었다. 놀랍게도 우리 부부는 그날 이후 폭언을 딱 끊게 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나는 ‘가족의 지반’에 의심을 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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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엄마-나’라는 가족삼각형 안에서 나는 지극히 모범적인 아내, 엄마로 살아왔다. 남편은 또 어떤가. 성실하고 가족밖에 모르는 가장이다. 하지만 그는 전제군주였다. 남편이 가정에서 전제군주가 되는 힘의 베이스는 돈이다. 즉 신민(?)에게 돈을 주고 대신 우리를 ‘스윗홈’이라는 허상으로 포섭하면서 가족파시즘 안에 구겨 넣었다. 아이들도 그 회로에 머무는 건 마찬가지다. 

돈 주는 아빠, 돈 주는 엄마. 그것 말고 바라는 것이 더 있을까? 결국 핵가족은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관계보다 화폐로 연결된 공동체라는 사실이 더 근원적이다. 사랑이라고 믿었던 가족 관계가 민낯으로 얼굴을 드러낼 때 얼마나 폭력적이고 참을 수 없는 관계인가.

이런 고민을 안고 있던 차, 고질적인 ‘가족파시즘’과 정면으로 대결하고 있는 책을 만나게 됐다. 들뢰즈 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다. 들뢰즈 가타리는 이 책에서 생명과 기계를 넘나드는 존재론을 이야기한다. 그들은 자연과 인간의 동일성을 ‘생명론’으로 설명하기에 한계를 느껴 ‘욕망기계’ 개념을 펼친다. 그들이 보기에 자연과 인간은 몽땅 기계 부품들이다. 그래서 우리 삶의 참모습을 기계들끼리 연결하고 접속하고 다시 분리, 종합하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즉 욕망기계는 생산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오이디푸스(핵가족) 안에서는 오로지 ‘돈과 성욕’만 흡수한다. 생산 즉 생성이 멈춘 ‘미로’다. 돈으로 교환되는 수많은 쾌락들. 그런데 그 쾌락은 꼭 대가를 치러야만 따라오는 보상들이다. 그 쾌감을 맛보려고 우리는 예속을 기꺼이 감수한다.

몇 년 전 남편이 머리를 기르는 조건으로 천만 원을 제안한 적이 있다. 나는 숏컷트에서 단발머리로 간신히 길러 교환한 돈으로 1년간 해외여행을 다니며 다 탕진했다. 나는 돈의 권력을 누리는 파시스트가 되고자 스스로 예속을 선택했다. 그러나 쾌락은 짧았고 그 때 과로로 얻은 허리디스크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쾌락만 누리려하고 욕망기계로 생성하지 못할 때 신체는 무능해지고 아프다. 

사실 우리의 욕망은 쉬지 않고 생성하는 공장과도 같다. 열 내고 먹고 이야기하고 싸는 존재! 다시 말해 그것들은 주역에서 말하는 ‘생생지위역(生生之謂易)’처럼 낳고, 낳고 또 낳는 변화 과정만이 있다. 그래서 욕망기계로 산다는 것은 이미지와 역할이 고정된 ‘아빠-엄마-나’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무엇과 결합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주체로 살기, 억압이 아니라 무의식의 생산 그 자체로 사는 것이다. 생성은 그 자체로 충만하다. 돈과 성욕만이 교환되는 오이디푸스 미로 안에서는 생성이 없다. ‘미로’안에 갇혀 있을 때 나도 남편도 아이도 모두 파시스트가 되고 만다. 들뢰즈 가타리가 열어놓은 생성의 길을 가야 하는 이유가 생겼다. 욕망기계로 사는 것. 다른 기계들과 접속하며 ‘생생지위역’하는 삶. 그것은 폭력에서 충만함으로 방향전환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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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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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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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주

오늘 나는 무엇과 결합하고 있는지 생각하게 되네요.
생생지위역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도…

성남
Guest
성남

세미나와의 결합^^
제일 재미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