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겸

몇 년 전 몸의 이상으로 고생한 적이 있다. 밤이 되면 몸에 열이 나고 심장이 박동이 이상적으로 빨라졌다. 피로에서 온 증상으로 치부하고 병원 가는 일을 미루고 있었다. 몇 날이 더 흐르자 발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앉아있는 상태에서 일어서는 일마저 쉽지 않게 되었다. 급기야는 사무실 책상에서 일어 설 수도 없는 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병원으로 이동을 하면서 여러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순간 정상으로 돌아올 수 없다면 어쩔까하는 걱정도 되었다. 의사는 몇 가지 가능성을 이야기 하면서 채혈을 하여 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하루 이틀이 길게만 느껴졌다. 며칠 사이 3~4 킬로나 빠져버린 몸을 보면서 몸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는 생각을 했다. 이틀 후 검사결과가 나왔다. 갑상선 항진증으로 생긴 문제였다. 과잉 작동하는 엔진처럼 몸이 움직이고 있었고 미량요소가 몸 밖으로 과다하게 빠져나가면서 나타난 증세일 것이라고 의사는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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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때는 몸이 빨리 정상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의사의 처방을 받아 약을 복용하고 무리하지 않은 생활을 하니 두 달 쯤 후에 정상이라는 판정을 받을 수 있었다. 병이 걸렸던 그 전처럼 심장 박동도 빨리 뛰지 않았고 다리에도 힘이 다시 들어갔다. 그러나 몸이 정상이 되었다고 느끼게 되자 슬슬 생활도 이전의 정상으로 돌아갔다. 병이 나기 전 생활의 리듬으로 회귀하기 시작했다. 

 2년 후 비슷한 증세가 몸을 찾아왔다. 병원에서 똑같은 병명을 확진을 받았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했다. 몸에서 병을 도려낸 듯이 제거하기만 하면 건강해진다는 생각에는 무언가 문제가 분명히 있다. 분명히 병은 몸에 신호를 보내고 있었지만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병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무언가를 놓치고 있었다. 병으로부터 다른 신체 리듬을 만들려면 병을 어떻게 맞이해야 했던 것일까? 병에서 다른 자기를 만날 수는 없었던 것일까?

니체의 건강

 니체의 건강은 좋지 못했다. 평생 두통에 시달려야 했다. 편두통이 시작되면 책을 도저히 읽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아픔이 심해지면 구토를 동반하였다. 음식을 먹을 수 없었고 먹었다 해도 위액까지 토해내야 했다. 그는 바젤대학 교수직을 35세의 젊은 나이에 사임하게 되는데 건강 때문이었다. 눈은 피로했고 시력은 악화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나는 총체적으로 건강했다.’라고 그의 자서전에 쓴다. 

 

 나는 내 자신을 떠맡아, 내 스스로 다시 건강하게 만들었다 : 그럴 수 있었던 전제 조건은 – 모든 생리학자가 인정할 것이지만 –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건강하다는 사실이었다. 전형적인 병든 존재는 건강해질 수 없고, 자기 스스로 건강하게 만들기는 더욱 어렵다 : 전형적인 건강한 존재가 그 반대인 반면에 말이다. 그에게는 심지어는 병들어 있는 것이 삶을 위한, 더 풍부한 삶을 위한 효과적인 자극제이다. 그래서 내게는 현재가 사실상 오랫동안 병들어 있는 시기로 여겨지는 것이다 : 나는 나 자신을 포함하여 삶을, 말하자면 새롭게 발견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책세상, 334쪽 

 니체는 말한다. 그는 건강하다고. 그가 병든 존재라면 스스로를 건강하게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평생 병을 떠날 수 없었다. 병과 함께 살았다. 건강에 대한 통념이 병이 없는 상태라면 그는 건강하지 않은 병자이다. 그에게 건강은 병을 수용하는 능력일 것이다. 병을 수용하여 자신을 변용하는데 쓸 수 있는 능력이야 말로 건강함이다. 

그렇기에 건강한 존재는 병을 삶의 자극제로 활용할 수 있다. 병의 자극이 삶을 새롭게 변용하도록 활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병들어 있는 시간이야 말로 다른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계기로 작동한다. 

 니체가 10년간의 바젤대학의 문헌학 교수직을 그만두게 된 것은 그의 병 때문이었다. 심각해진 병의 증세가 수업과 연구를 수행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교수직을 그만둔 후 니체는 왕성하게 글을 쓴다. 병이 그에게 교수직으로부터 떠나게 했고, 글을 생산하도록 자극했다. 그 시기 니체는 ‘아침놀’과 ‘즐거운 학문’을 썼다. 그리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생산했다.

병이 그에게 교수직으로부터 떠나게 했고, 글을 생산하도록 자극했다

 병은 교수 니체의 사유를 다르게 바꾸었다. 그의 병이 그를 자신으로부터 떠나게 했다. 병 이전의 그의 사유로 부터 떠나게 했다. ‘인간적인 너무 인간적인’이 허무주의의 극치를 보여주는 책이라면 그가 병으로 교수직을 그만둔 다음 해에 쓴 ‘아침놀’은 비전의 문서이다. 그는 ‘생명력이 가장 낮았던 시기’에 비전의 철학을 길어 올린다. 비전의 철학을 생성하는 존재가 어떻게 아픈 자 일 수 있을까? 그는 건강하고 또 건강하다. 

건강함이란 어떤 상태인가?

 우리는 심지어 궁핍이나 변덕스러운 병에 대해서도 감사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를 항상 어떤 규칙이나 이것의 ‘편견’으로부터 해방시켰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니체,『선악의 저편』, 아카넷, 110쪽 

 병은 머물러 있던 신체를 다른 신체로 바꾼다. 그 전과 달라진 신체는 같은 신체의 규칙을 적용할 수 없게 된다. 하나의 규범은 무력화 되고 병든 신체의 규범이 필요해진다. 건강한자는 병을 제거하여서 그전 자신의 규범으로 회귀하기를 원치 않는다. 오히려 병을 활용하여 다른 규범으로 이동할 수 있다. 병을 자기 스스로를 예속시키고 있던 규칙으로부터 해방 시키는 것에 활용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고정된 관점에 묶여있다면 그는 편견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병은 신체에 다른 관점으로 이동할 수 있는 계기를 부여한다. 그가 건강하다면 병을 활용하여 다른 관점으로 이동할 수 있을 것이다. 관점을 이동하지 못하고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자야 말로 병든 자일 것이다. 건강한자는 다른 관점을 준 병에 감사한다. 

강한자는 다른 관점을 준 병에 감사한다

 건강함이란 단순히 병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신체의 수용능력 만큼이 건강함이다. 병이 들더라도 그 병을 활용하여 내 신체 상태를 바꾸어 새로운 적용체로 만들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건강한 상태일 것이다. 그때 병을 신체를 변용하는데 활용할 수 없다면 그는 병든 상태일 것이다. 병자는 병을 수용해낼 수 있는 능력이 미미한 존재이다. 

즉 위대한 건강이 – 이것은 사람들이 보유하는 것만이 아니다. 지속적으로 획득하고 계속 획득해야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건강은 계속해서 포기되고 포기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니체,『즐거운 학문』, 책세상, 392쪽 

 건강함은 어떠한 상태를 잘 관리하고 유지하는 자기보존과 같은 것일 수 없다.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변용할 수 있는 능력, 한 사유에서 다른 사유로 이행할 수 있는 능력일 것이다. 니체에게 건강은 과거의 상태를 포기하고 현재의 신체를 획득하는 것이고 현재의 사유를 포기하고 다른 사유를 획득하는 것이다. 건강은 자기를 보존 하는데 있지 않고 자기극복에 있다.

 병으로 앓고 있을 때는 나를 바꿀 수 있는 계기가 열린 시간이었다. 병이 나를 변용하려고 자극하는 시기였다. 그러나 그 신호를 읽지 못했다. 병은 치료되었지만 나를 다른 나로 바꾸지는 못했다. 병이 주는 관점을 취하지 못했기에 고정된 편견을 벗어나지 못했다. 

 니체는 견디기 힘든 병의 고통에서도 병으로부터 배우고 그 것을 활용하여 자신을 변용하고 그 변용된 신체로부터 사유를 생성해 냈다. 그것이 니체의 자기극복이었을 것이다. 니체로부터 병을 잘 수용하는 방법을 배워보자. 그리고 병을 자기극복의 기예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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