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완

1학년 2학기 끝자락의 풍경

   요즘 우리들이 이야기하는 꼴을 보면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하는 애기들 같다. 수다를 떠는 중간중간 최근에 수업에서 배운 새로운 의학 용어를 막 집어넣는다. 가령, 버스에서 낙서를 하고 있는 중딩 애들을 보면 “쟤네 뉴런은 다중 시냅스를 못 하나봐”라고 말하거나, 산만하게 굴면서 자꾸 귀찮게 하는 친구를 두고는 “이 사람은 내 신경계의 통합성을 해치는 사람이야. 도저히 적응(adaptation; adaptación)이 일어나질 않네” 라고 멘트를 날린다. 또 공부에 지쳐 정신줄 놓고 아무 말이나 하는 친구에게는 “너 브로카 영역(Broca area; Área de Broca. 뇌에서 언어 표현을 담당하는 부분)는 멀쩡한데 베르니케 중추(Wernicke’s center; Área de Wernicke. 뇌에서 언어의 이해를 담당하는 부분)는 맛이 갔구나” 라고 말해준다. (실제로 이런 경우 환자는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는 없는 말’을 유창하게 떠들게 된다.)

   물론 다 말도 안 된다. 엉터리 용법이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새로 배운 단어를 어디에나 쓰고 싶어하는 것처럼, 우리도 이 지루한 학기를 견뎌볼 요량으로 아무 생각 없이 조잘거리는 것 뿐이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매일 새로운 단어들을 머리에 쑤셔넣는 단순 반복의 과정을 견딜 수가 없다. 그렇게 미래의 어린 의사들은 한참을 떠들다가, 한숨으로 수다를 마무리한다. 도대체 이번 학기는 언제 끝나는 거야? 1학기가 5개월이라니, 참으로 길기도 하지!

   이번 학기에 우리들의 새 어휘 목록을 가득 채운 것은 신경계와 내분비계다. 이제 곧 생식계도 추가될 거다. 이 세 가지 거대한 시스템을 통째로 관통하는 과목은 바로 SNER(Sistemas Nervioso Endocrino y Reproductor)이다. 1학년 과정에서 가장 어렵고 또 양이 많은, 가장 많은 학생들을 낙제시킨다는 전설의 과목이다. 양은 산더미처럼 많은데, 정작 기말고사에는 딱 7문제만 나오기 때문이다(만약 여기서 2문제 초과로 틀리면 낙제 직행이다). 책상 위에 쌓여가는 노트 정리를 보고 있노라면, 과연 내가 이 모든 디테일들을 기말고사 전에 머릿속에 쑤셔넣는 게 가능할까 의심이 든다. 그렇지만 절반이 낙제한다는 사실을 달리 말하면 나머지 절반은 늘 합격한다는 이야기니까, 너무 겁 먹지는 말아야겠다. 낙제를 빌미로 한 이런 ‘협박’과 ‘으름장’이 없다면 우리는 아예 공부를 시작할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99%의 정보를 망각하는 시상하부(hypothalamus; hipotálamo) 속에 선택받은 1%의 기억을 새기는 것은 결국 ‘보상—처벌’ 메커니즘이니까. 당근과 채찍이라는 고전적인 전략이 괜히 나온 게 아닌거다….. 이런, 또 신경 이야기다!

이런, 또 신경 이야기다!

신경과 호르몬의 노래

   시험의 압박만 없다면 SNER은 정말 흥미진진한 공부거리다. 지난 학기에 공부했던 단백질, 세포, 뼈, 근육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물론 그때 그 공부가 재미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단백질이 우리 몸 속에서 얼마나 많은 역할을 담당하는지, 칼슘이 어떻게 뼈 세포를 벽돌처럼 딱딱하게 만드는지, 손목 하나를 까딱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근육 조직들이 수축*이완해야 하는지, 이런 지식을 소화하는 것만으로도 그때 당시에는 감동에 (그리고 피로에) 벅찼다. 하지만 이것들은 정적인 지도다. 아무 짓도 하지 않는 몸을 가만히 뉘어놓고, 각 부분들을 떼어내어 따로 분석하는 것이다.

   실제 삶에서 몸의 모든 부분들은 움직인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함께, 동시에, 다발적으로 움직인다. 우리는 이 동적인 그림을 ‘기능(functioning; funcionamiento)’이라고 부른다. 음, 사실 나는 이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마치 몸의 특정한 기관이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 디자인된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부를 조금만 해보면 알 수 있듯이, 기능의 메커니즘을 설명할 수는 있어도 어째서 ‘그 기관’이 꼭 ‘그렇게 기능해야’ 하는지 그 필연성은 설명할 수는 없다. 게다가 한 기관이 수많은 다른 기능을 담당하거나, 하나의 기능을 위해서 수많은 기관들이 협동을 하는 경우도 몹시 흔하다. 그러니까 한 기관의 역할(기능)은 다른 기관들과의 상호작용하는 관계 속에서 정해질 뿐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상호작용, 즉 수많은 운동들이 서로 겹치고 갈라지고 충돌하면서 만들어내는 전체 그림이다. 이처럼 동시다발적으로 터져나오는 운동들을 조금씩 더듬어 가노라면, 이것이 곧 ‘생기(生氣)’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뭐랄까, 지난 학기에는 사람을 닮은 마네킹을 공부하는 기분이었다면, 지금은 정말 살아있는 사람을 보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이런 생명의 노래를 지휘하는 주인공들이 있다. 신경과 호르몬, 더 정확히 말하면 신경계와 내분비계다. 이 두 시스템은 몸 내부의 국소적인 부분들을 컨트롤하고 또 통합해낸다. 밥 먹으면 소화가 되고 운동을 하면 목이 마른 것과 같은 일상의 당연한 반응들은 바로 이들의 작품이다. 또, 이들의 능력은 몸 밖으로도 뻗어나간다. 시시각각 변하는 외부 세계에 대응하여 몸의 상태를 빠르게 바꾸고, 그에 알맞은 반응을 고르며,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를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재활용한다. 몸 내부 뿐만 아니라 몸과 세계 사이에도 수많은 운동들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즉, 이들은 몸이라는 세계의 통합성 뿐만 아니라, 바깥 세계 속에 존재하는 몸의 통합성도 보장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시스템들은 우리를 세계와 직통으로 연결시켜주는 다리다. 은유가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그렇다. 이들이 없다면 우리 몸은 바깥과의 연결고리를 잃어버릴 것이고, 그럼으로써 세계라는 거대한 운동 속에 어떻게 끼어들어야 할 지 모를 것이며, 그렇게 세계에서도 삶에서도 튕겨져나갈 것이다. 통합성이 와해되는 것이다. 당연히, 생명도 지속되지 않는다.

이런 생명의 노래를 지휘하는 주인공들이 있다. 신경과 호르몬, 더 정확히 말하면 신경계와 내분비계다. ... 이들이 없다면 우리 몸은 바깥과의 연결고리를 잃어버릴 것이고, 그럼으로써 세계라는 거대한 운동 속에 어떻게 끼어들어야 할 지 모를 것이며, 그렇게 세계에서도 삶에서도 튕겨져나갈 것이다

   신경계와 내분비계는 서로 연결되어 있긴 하지만 캐릭터는 다르다. 일단 신경계는 내분비계보다 훨씬 더 빠르다. 전기 신호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신호가 전달될 수 있는 범위는 짧다. 그래서 운동회에서 계주들이 서로 바톤을 건네주듯, 신경 세포는 그 다음 신경 세포에게 신호를 이어서 전달해줘야 한다.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말이다. 이 전달을 시냅스(sinapsis ; sinapsis)라고 부른다. 그리고 시냅스를 할 수 있는 신경 세포는 뉴런(neuron; neurona)이라고 불린다. 이 시냅스 경주를 위하여 신경계는 온 몸 구석구석에 길을 내야 한다. 즉, 몽땅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신호가 감각 기관에서 시작해서 척수를 거쳐 뇌에서 끝을 낸다면 이것이 바로 감각 신경계다. 반대로 신호가 뇌에서 시작해서 척수를 거쳐 사지(四肢)에서 끝난다면, 그리하여 움직임을 야기한다면 이것은 운동 신경계다. 또, 신호가 뇌에서 시작하되 심장이나 눈처럼 몸 속 장기 및 기관으로 향한다면 이것은 자율 신경계다. 그리고 이런 시냅스 경주는 우리가 엄마의 자궁 속에 잉태된 순간부터 마지막 숨을 내뱉고 무기물로 되돌아갈 때까지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

   내분비계는 전기 신호가 아니라 화학 신호를 활용한다. 몸 속에 변화를 야기하는 화학 물질을 생성하고 또 분비하는 것인데, 이 물질을 호르몬이라고 한다. 이 친구들은 신경 신호보다 훨씬 더 느리다. 혈액 속에 섞여서 느긋하게 온 몸을 순환하면서 그들에게 주어진 역할을 해낸다. 그 대신 호르몬은 먼 거리를 여행할 수 있다. 따라서, 내분비계는 신경계처럼 몸 전체에 퍼져 있을 필요가 없다. 군데 군데 베이스캠프를 만들어서 필요할 때마다 호르몬을 쏴주면 그만이다. 이 베이스 캠프를 내분비선이라고 하는데, 우리 몸에는 총 7개가 있다. 뇌하수체, 송과선, 갑상선, 부갑상선, 췌장섬, 부신, 그리고 생식선이다. 그리고 이들이 하는 일은 셀 수도 없다. 일차 성장, 이차 성장, 소화 활동, 온도 조절, 신진대사 향상 혹은 저하……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눈 뜰 때나 잠잘 때나 절대로 일을 쉬지 않는 신경계와 달리, 내분비계는 일하는 시간과 시기가 확실하다. 바이오 리듬과 자연의 리듬을 함께 타는 것이다. 가령, 성장 호르몬(GH)은 격한 운동을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잠들었을 때 처음 두 시간 동안에 분비된다. 또, 생의 첫 20년 동안 강도 높게 분비되다가, 그 후에는 점점 줄어든다. 이러한 호르몬의 리듬은 생명 전체의 리듬을 만든다. 가령, 성장 호르몬이 사춘기 때 멈추기 때문에 우리는 신체적 성장을 멈추고 어른으로서 있다. 만약 성장 호르몬이 제때 제어되지 않고 계속 분비된다면 환자는 정말로 끝없이 성장하는 거인이 되며, 일찍 명을 다하고 만다. (이 병을 거인증이라고 부른다.)

   종종 나는 신경계와 내분비계의 운동이 함께 자아내는 노래를 상상해보곤 한다. 내분비계는 묵직한 드럼의 비트 소리와 반주의 코드 진행에 해당될 것이다. 티나지 않게 노래 전체를 진행시키는 역할을 맡는 것이다. 그리고 신경계는 그 위에서 화려하게 등장하는 곡의 메인 멜로디이자, 비트와 코드와 멜로디가 제대로 조화를 이루는지 시시때때로 확인하는 지휘관이다. 그리고 이 노래는 각 사람마다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펼쳐질 것이다. 무럭무럭 자라는 아이들이 저마다 다른 체형을 갖게 되고, 말레꼰에서 부서지는 파도소리가 사람마다 다른 감각을 자극하며, 사랑의 몸짓이 연인마다 다르게 표현되듯이. 모두 다 생명의 운동, 생명의 노래다.

무럭무럭 자라는 아이들이 저마다 다른 체형을 갖게 되고, 말레꼰에서 부서지는 파도소리가 사람마다 다른 감각을 자극하며, 사랑의 몸짓이 연인마다 다르게 표현되듯이. 모두 다 생명의 운동, 생명의 노래다

감각, 오감(五感) 그 이상

    자, 그러면 이제 신경 이야기 보따리를 하나씩 풀어보자. 감각부터 시작해보려고 한다. 감각이라고 하면 자동적으로 오감(五感)부터들 떠올린다. 오감은 네 가지 특수감각과 한 가지 일반감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이 특수감각이요, 촉각은 일반감각이다. 일반감각이라 함은 눈, 코, 귀, 혀와 같은 특수한 감각기관이 따로 없고 몸 전체를 통해 느껴진다는 뜻이다. 촉각의 감각기관은 피부 바로 밑에, 몸 전체에 퍼져 있다.

   그렇지만 이런 오감 말고도 우리 몸에는 감각들이 많다. 단지 오감만큼 유명세를 누리지 못할 뿐이다. 가령, 성적 쾌락을 생각해보자. 누가 이 감각을 중요하지 않다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 쾌락은 역시 일반감각에 분류된다. 일종의 특별한 촉각인 것이다. 또, 올리버 색스가 <나는 침대에서 내 다리를 주웠다>라는 에세이에서 흥미진진하게 서술한 자기수용성감각도 해당된다. 자기수용성감각은 내 몸이 공간 속에서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알려주는 감각이다. 우리 몸의 자가 GPS 탐지기랄까? 이 감각 덕분에 우리는 눈으로 보지 않고도 지금 내 오른발이 왼발보다 뒤쪽에 있다는 사실을 안다. 사실 이것은 공기처럼 자연스러운 자극인지라, 우리는 이런 감각이 존재한다는 것을 평소에는 의식하지도 못한다. 그렇지만 만약 오른팔의 자기수용성감각이 사라진다면 나는 더 이상 팔을 세상 속에 위치 지을 수 없게 되고, 눈으로 멀쩡히 바라보고 있더라도 그것이 무엇인지 실감할 수 없게 된다.

   만약 나보고 감각 신경계의 꽃을 꼽으라면, 역시 오감 중에서 고르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최고로 흥미로운 감각은 바로 통각, 즉 고통이다. 고통! 이것은 에로스만큼이나 인간이 가장 집착하는 감각이다. 고통은 기억을 과거의 석판 위에 지울 수 없도록 새겨넣는 칼이며, 방황 끝에 종교로 발길을 돌리게 하는 마음 속 사막이다. 고통은 상실이라는 감정에 꺼지지 않는 불을 때우는 연료이지만, 또한 타인의 불행에 대하여 공감에 이를 수 있는 가장 확고한 길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들은 고통 앞에 멈추고 질문을 던졌다. 부처님마저도 ‘왜 인생은 고(苦)인가’라는 화두를 들고 출가를 하시지 않았는가? 그런데 감각 신경계를 공부하니 여기에는 그럴만한 생물학적 이유가 있었다. 고통은 여러모로 다른 감각들보다 특별했다.

   보통 무언가를 감각한다고 할 때, 우리는 그 자극을 있는 그대로 느끼지 않는다. 그것이 온도든, 빛이든, 공기의 떨림이든, 땅의 진동이든, 이 중 어떤 것도 우리의 뇌로 직접 전달되지 않는다. 외부 자극을 뇌까지 전달하는 것은 뉴런의 몫인데, 뉴런은 어차피 전기 신호밖에는 송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각기관이 필요한 것이다. 감각기관의 역할은 외부 자극을 신경 세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전기 신호로 번역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극이 번역되고 나면 이 자극은 첫 번째 감각 뉴런을 따라서 척수로 이동한다. 그리고 척수를 따라 등줄기를 타고 쭉 올라가는데, 대뇌 바로 밑에 있는 간뇌, 간뇌 중에서도 시상(thalamus; tálamo)에서 다른 종류의 감각들과 다 함께 만난다. 시상에서 한 번 가지런히 정리된 뉴런은 마지막 도착지를 향해 신호를 송신한다. 그곳은 바로 대뇌피질이다. 바로 이곳에서 우리가 ‘느낀다’고 표현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감각이란 결국 대뇌피질에 가해지는 자극인 것이다. 만약 시각을 담당하는 뒷통수의 아랫부분, 즉 후두부의 대뇌피질이 망가진다면, 우리는 멀쩡히 눈을 뜨고 있어도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만약 나보고 감각 신경계의 꽃을 꼽으라면, 역시 오감 중에서 고르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최고로 흥미로운 감각은 바로 통각, 즉 고통이다. 고통!

   통각 역시 전체적으로 봤을 때 동일한 스텝을 밟는다. 통증을 번역하는 감각기관은 통각수용체(nociceptor; nociceptor)라고 불린다. 이 감각기관은 우리 몸이 생명에 위협을 가할 만한 조건에 놓이면, 이러한 외부 자극을 번역해서 신호를 쏜다. 이 신호는 다른 여러 촉각들과 공유하는 길(전외측 시스템; anterolateral system; anterolateral sistema)을 따라서 뇌에 도달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곳에서 ‘고통’이라고 인식이 된다.

   여기서 한 번 더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우리는 고통 받는 상황에 놓이면 무조건 고통을 피하려고 한다. 자연스러운 생명의 반응이다. 그러나 정말로 피해야 할 것은 고통이라는 감각이 아니다. 고통은 몸 바깥에 실재하지 않는다.  감각을 번역하고, 운송하고, 마침내 그것을 ‘고통’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 몸 내부의 신경계다. 그리고 통각수용체를 비롯하여 수많은 뉴런들이 이처럼 수고로운 일을 하는 이유는, 고통을 야기하는 상황을 벗어나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고통이라는 감각은 명백한 메시지와 함께 뇌에 도착한다. 무엇이 고통이 야기하는지, 지금 당장 제대로 파악해라. 그리고 싸우든가, 속이든가, 도망쳐라. 아이러니하게도 고통이라는 감각은 생명의 본질과 가까이 있다. 삶이 계속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을 세포 하나하나에게 일깨운다.

고통, 특별한 선물

   고통이라는 메시지의 중요성은 뇌의 각 파트가 어떻게 역할 분담을 하는지 살펴보면 더 분명히 드러난다. 위에서 감각이란 대뇌피질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는 고통만큼은 예외다. 한 번은 과학자들이 동물의 대뇌피질을 제거하는 실험을 했는데, 예상한 대로 이 불쌍한 동물은 모든 감각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딱 하나, 고통만큼은 제외하고 말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이는 우리가 고통을 느끼기 위해서는 자극이 꼭 대뇌피질까지 도달할 필요가 없음을 뜻한다. 대뇌피질이라는 도착지의 이전 정거장인 시상에만 도달해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는 뜻이다. 심지어시상을 포함한 간뇌를 제거해도 고통은 미약하게나마 느껴진다. 간뇌보다 더 아래에 있는 중뇌 역시 고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뇌의 절반을 잃어버려도 느껴지는 감각이 바로 고통이라니……! 참 지독하다.

   그렇지만 고통의 최종 도착지는 분명 대뇌피질이다. 그렇다면 왜 고통이라는 자극은 굳이 대뇌피질까지 송신되어야 하는 걸까? 그 전에 충분히 감각될 수 있다면 말이다. 여기서 대뇌피질은 몹시 특별한 역할을 맡고 있다. 그것은 고통의 감지가 아니다. 바로 고통의 해석이다. 내가 어째서 고통스러운 것인지, 무엇이 내게 고통을 야기하는 것인지, 이 앞에서 내가 어떻게 결단해야 하는 것인지….. 이런 모든 사고활동을 대뇌피질이 담당한다. 대뇌피질이 제거된 동물은 고통을 느낄 수는 있어도 그에 대해 의미 부여를 할 수 없다. 거꾸로, 멀쩡한 의식을 지진 우리 인간은 고통을 느끼는 이상 고통의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우리의 대뇌피질의 본능이니, 뭐 어쩌겠는가. 이쯤되니 니체의 경구가 생각난다. 세상에서 가장 괴로운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의미 없는 고통,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고통이라고. (정확하게 생각나는 건 아닌데, 이와 비슷한 뜻이었다.) 그렇다. 의미 없는 고통이 계속될 때, 우리의 중뇌와 시상은 전기 충격(신경 신호)에 짜릿하게 구워진다. 그리고 우리의 대뇌피질은 갈 길을 잃고 슬프게 운다.

   그 외에도 고통의 별난 면모는 많다. 가령, 통각은 다른 일반감각들에 비해서 속도가 느리다. 또 분별력도 많이 떨어져서, 아픈 와중에도 어디가 어떻게 아픈 것인지 파악도 잘 안 된다. 그래서 환자들이 병원을 찾을 때 여기도 아프고, 저기도 아프고, 저~~기도 아프다고 광범위한 호소를 하는 것이다. (물론 칼에 찔린 것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은 예외다. 이런 고통은 ‘빠른 통각(fast pain; dolor rápido)’로 따로 분류가 된다.) 최악인 것은 신경계의 특징 중 하나인 적응(adaptation; adaptación)이 고통에는 적용이 안 된다는 점이다. 적응이란, 동일한 자극이 반복될 때 신경 세포가 이에 대해서 신호를 멈추는 현상을 말한다. 우리는 이를 두고 익숙해졌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이 신통방통한 기능은 고통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고통은 거의 적응이 불가능한 감각이라고들 한다. 제길, 적응도 안 되고 파악도 안 되니, 어쩌란 말인가?

   어쩌긴 어쩌겠는가. 열심히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 이제야 알 것 같다. 어째서 인류의 위대한 사상가들이 고(苦)를 가지고 숙고를 하셨는지. 고통은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특별한 감각이다. 인간이 생각하는 동물이라면, 고통은 인간에게 선사된 특별한 선물인 셈이다. 이런, 참으로 고난이도의 선물이 아닌가(ㅠㅠ).

고통은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특별한 감각이다

투 비 컨티뉴…..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신경계는 할 이야기가 무궁무진하니까. 동작, 감정, 기억, 행실, 신경계의 아우격인 내분비계인 호르몬도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신경 이야기가 몇 편까지 갈 지 모르겠지만, 가 보는데까지 해보려고 한다. 언어를 배우는 아기처럼 초보자인 나도 ‘의학 옹알이’를 해보는 중이다. 그렇게 가다보면, SNER 시험에 무겁게 눌려 있는 나의 2학기도 조금 더 빨리 끝나지 않을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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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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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민

의사 공부가 이리 재미있었는지~ 혜완샘의 글을 보면 과거 레지던트 시절이 떠오릅니다. 인문학적 베이스로 흥미진진한 관찰을 하는 여정에 동참하니 참 즐겁습니다. 이 글을 읽으니 감각관찰을 하는 위빠사나 수행법을 생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네요. 힘든 의대 공부에 ‘화이팅’을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