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연

바야흐로 결핍과 상처의 시대이다. 타인의 말 한마디에 상처받거나 어릴 적 부모님에게 사랑을 못 받았다고 칭얼대거나 입만 열면 모두 상처를 자랑하기 바쁘다. 나와 친구들의 대화도 이 흐름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워킹맘인 친구들은 아이가 학교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면 일하는 엄마를 둔 탓이라고 여기거나, 아이가 크게 아팠던 일을 두고 자신이 미숙해서 그랬다며 죄책감을 느낀다. 나 또한 많은 경우에서 결핍을 찾으려 한다는 것을 최근에야 인지하기 시작했다. 주로 전혀 예상치 못한 문제인데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막막함을 느낄 때 그렇다. 그럴 때 이런 문제가 왜 생겼을까, 어떻게, 누구에 의해 발생했는지 원인을 찾는다. 그 후에는 나의 부족 또는 다른 이에 의한 상처 때문에 이러한 일이 생겼다며 괴로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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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에 집착하며 결핍을 찾는 것, 상처를 받았다며 괴로워하는 것을 니체는 ‘양심의 가책’이라고 불렀다. ‘양심의 가책’이라고 했을 때 떠오르는 것은 도덕이나 법규를 지키지 못해 괴로워하는 모습이다. 이때의 도덕과 법규는 외부적인 것 뿐 아니라 자신이 정해놓은 질서 등도 포함한다. 니체는 ‘잔인성’이라는 본능이 외부가 아닌 내면으로 향하게 되었을 때 ‘양심의 가책’이 생겨났으며, 이것은 인류가 지금까지도 치유하지 못한 무시무시한 병이라고 말한다. 잔인성이라고? 인간이 ‘잔인하다’라는 말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데 이것이 내면으로 향한 것이 양심의 가책이라고? 그렇다면 습관적으로 결핍을 찾는 우리는 모두 병에 걸린 상태란 말인가? 니체는 어떤 맥락에서 양심의 가책을 병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인간의 본성, 잔인성

 양심의 가책의 발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본성 중 하나인 ‘잔인성’을 살펴봐야 한다. 인간이 ‘잔인하다‘라는 말은 온순한 양처럼 사는 우리에게 그다지 납득이 가는 발언은 아닌 것 같다. 어렸을 때 tv에서 ‘동물의 왕국’을 보면 그렇게 가슴이 아플 수 없었다. 사자가 사슴을 잡아 먹으려할 때마다 “도망가! 도망가!”를 외치며 가슴을 졸여야 했기 때문이다. 사슴이 불쌍하다며 사자를 비난했지만 내 뱃속으로 사라진 수많은 소, 닭, 돼지를 떠올려보면 나 역시 잔인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즉 채권자는 손해를 본 대가로 직접적인 이득을 취하는 대신에(즉 금전이나 토지 및 어떤 종류의 소유물로 배상을 받는 대신에) 일종의 쾌감을 맛봄으로써 배상이나 보상을 받았던 것이다. 이는 무력한 자에게 자신의 권한을 마음껏 행사할 수 있다는 쾌감이기도 하다. ‘악을 저지르는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 악을 저지른다’는 쾌락이기도 하며, 폭행을 가함으로써 누리는 만족감이기도 하다. 이러한 만족감은 채권자의 지위가 낮고 비천할수록 더욱 커지는데, 채권자는 그것을 더없이 맛좋은 음식으로, 그러니까 좀 더 높은 지위를 미리 맛보는 것으로 가볍게 생각할 수 있다. 채권자는 채무자에게 ‘형벌’을 가함으로써 주인의 권리에 가담하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도덕의 계보』, 연암서가, 84쪽 

 고대의 채권-채무의 계약관계에서 채무자가 빚을 갚지 못하면 채권자는 채무자의 몸 일부를 도려내는 고통을 행사해 그것으로부터 보상 받았다. 채무자는 자신이 정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채권자는 이를 보상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때의 보상은 물질이 아니라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힘을 행사하는데서 오는 쾌감이었다. 만약 채권자가 채무자보다 낮은 지위에 있다면 고통을 행사하는 순간 이들의 힘은 역전된다. 채권자가 고통을 행사하는 순간, 자신보다 높은 지위에 있던 채무자의 주인이 되면서 우월감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주목할 것은 채무자는 고통을 받음으로써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만큼의 고통을 당함으로써 채권-채무의 관계는 서로에게 원한감정 없이 소멸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잔인성을 행사할 때 느끼는 쾌락은 ‘주인이 되었다’라는 기분이다. 이렇게 자신의 힘을 타인에게 행사하는 것, 타인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드러나는 부분이 ‘고통’이다. 따라서 잔인성은 타인에게 행사하는 폭력에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의 힘을 행사하는 것, 주인이 되고자하는 의지에 있다. 힘을 행사해 영향력을 미치려는 것, 주인이 된 기분을 느끼려는 것, 이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이 본성을 실현할 때 나타나는 것이 잔인성이다.  

잔인성을 행사할 때 느끼는 쾌락은 ‘주인이 되었다’라는 기분이다

 우리의 삶, 모든 존재와 관계는 이러한 잔인성의 기반위에 서있다. 삶이란 서로를 침투해 들어가며 폭력을 행사하고 착취하며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전 예고 따위는 없으며 갑작스럽게 여기저기서 나를 침투해 들어오는 힘과 그 힘에 맞서는 힘들의 충돌들만이 있다. 만약  파괴하고 착취하는 힘이 없다면 새롭게 건설되고 창조될 가능성도 없다. 우리의 본성은 잔인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또한 세계를 창조하는 가능성을 낳는 것이다.

인간의 병든 본성, 양심의 가책

 그런데 인간의 잔인성이 밖으로 표출되지 못한다면, 서로를 침투해 들어가고 파괴하고 착취하며 주인이 되려는 힘을 행사하지 못한다면 병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은 본능이기에 사라질 수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힘을 행사하기 위한 가장 안전한 방식을 택한다. 밖이 아니라 안으로! 이러한 본능을 소유한 자신을 향해 잔인성의 방향을 돌리는 것이다.

자유라는 오래된 본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국가 조적이 구축해놓은 저 끔직한 방벽-특히 형벌도 이러한 방벽 중의 하나이다-은 야생 생활을 하고 아무 거리낌 없으며 이리저리 유랑하던 인간의 저 모든 본능을 반대 방향으로 돌려 인간 자신을 향하게 했다. 적의, 잔인함, 그리고 박해, 기습, 변혁 및 파괴의 욕구-이 모든 것이 그러한 본능을 소유한 자를 향해 돌리는 것, 이것이 바로 ‘양심의 가책’의 기원인 것이다. 외부의 적과 저항이 없어지고, 관습의 답답한 기분을 주는 협소함과 규칙성 속에 처넣어진 인간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자기 자신을 찢어 버리고 책망하고 물어뜯고 몰아대고 학대했다. …(중략) 그러나 이와 더불어 인류가 지금까지도 치유하지 못하고 있는 가장 중대하고도 무시무시한 병, 즉 인간이 인간에게, 자기 자신에게 시달리는 병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도덕의 계보』, 연암서가, 112쪽 

 국가를 창조한 무시무시한 금발의 맹수들의 휘두르는 폭력 앞에서 약한 사람들은 길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약자는 어찌해야할지를 몰랐다. 국가는 어느 날 갑자기 운명처럼 나타난 폭력적인 힘이며 그들은 창조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길들여지는 대신 국가의 보호를 받고,  외부의 적은 없어졌지만 전제군주라는 유일한 법에 복종해야만 하는 공포의 삶을 산다. 밖으로 마음껏 잔인성을 펼치며 자유롭게 살던 인간은 이제 전제군주의 법이 허용하는 한에서의 삶만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순간 전제군주에 의해 파리 목숨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황야를, 모험을, 야생에서 힘을 펼치며 자유를 느끼던 본능을 잊을 수가 없기에 자기자신을 괴롭히는 것으로 잔인성을 표출한다. 

 기독교에서의 신과 인간의 관계는 양심의 가책의 원형을 보여준다. 신은 죄 많은 인간을 대신해 모든 죄를 짊어지고 희생했다. 더 이상 죄, 부채를 갚을 수 없게 된 인간은 신에게 영원한 죄를 지었다. 인간은 이러한 자신을 더러운 존재, 씻을 수 원죄를 진 존재로 상정하며 자신을 괴롭히고 자책한다. 이 상황을 고대의 채권-채무 관계의 상황과 비교해보자. 만약 약속을 지킬 수 없으면 고통을 받아 그것을 깨끗이 갚음으로써 계속 주인이 되려는 의지를 실현하면서 살면 된다. 하지만 약속을 지킬 수 있는 힘은 없는데 고통도 겪기 싫다면? 신이 모든 죄를 대신 갚아버렸다고 만들면 된다. 부채를 상환할 길이 영원히 막히면 약속을 지킬 필요도 고통을 당할 이유도 없다. 힘을 행사하지 않아도 되는 명분이 생기는 것이다. 신의 보호 속에서 서로를 침투해 들어가고 폭력을 행사하며 살지 않아도 되는 안전하고 지루한 생존의 길이 열린 것이다. 

 오늘날 그 누구보다 유순하고 길들여진 존재, 현대인은 기본적으로 부모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관계에서 불편함이 생기면 자신이나 타인의 부모, 가정 및 교육환경 등의 결핍 때문이라고 생각이 흐른다. 아이의 문제를 엄마의 원인으로 돌리는 워킹맘들의 고민도 마찬가지이다. 이 모습은 기독교의 신과 인간이 맺은 관계의 현대판 버전이다. 스스로 존재적 결핍을 만들어내서 이를 괴로워하는 것, 결핍과 상처를 찾는데 집착하는 모습은 기독교인의 자기 박해와 다를 바 없다. 힘의 의지를 어떻게든 밖으로 펼치지 않으려는 나약하고 병든 인간의 모습인 것이다.    

밖으로 힘을 펼치기

 우리는 왜 양심의 가책을 멈추지 못할까? 힘의 의지(주인의 되려는 의지)를 실현하지 못하는 인간이 쾌락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밖이 아니라 안으로 향하는 잔인성은 파괴일 뿐 창조가 될 수 없다. 창조를 위해서는 나와는 다른 것, 즉 바깥 세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심의 가책은 자신을 파괴할 뿐이다. 

 이렇게 위험하며 자신을 병들게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양심의 가책이 주는 고통은 달콤한 쾌락이기도 하다. 위험하게 밖에서, 타인과 부대끼며 관계를 맺지 않아도 상상 안에서 모든 걸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상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지만 스스로가 창조한 상상 속에서 괴로워하며 온갖 감정을 느끼는 것, 이것이 양심의 가책이 주는 쾌락이다. 니체는 양심의 가책을 절대적으로 ‘자신의 무가치함을 확인하려는 의지’라고 말했다. 우리에게 원죄, 존재적 결핍, 상처 따위는 없다. 오히려 자신의 무능을 유지하면서까지 쾌락을 느끼려는 소심하고 비루한 인간의 의지만이 있다.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풀어야 할지 해결에 집중하면 된다. 타인과의 문제라면 대화든 몸 싸움이든 부딪혀야 하며, 못된 습관이 문제라면 다른 습관을 만드는데 집중하면 된다. 힘을 행사함으로써 관계 속에 침투함으로써 주인이 되려는 의지를 펼쳐야 하는 것이다. 힘과 힘의 충돌만이 있는 세계에서 모든 일은 내 힘을 행사 했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로 밖에는 얘기할 수 없다. 힘은 행사하지 않으면서 상상의 죄, 원인 찾기에 집착하는 양심의 가책은 스스로를 무능함 속으로 밀어 넣으려는 의지이다. 세계와 단절한 채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스스로를 할퀴며 병들어가겠다는 강한 의지이다. 

 양심의 가책은 우리를 병들게 할 뿐 주인으로 살게 하지 못한다. 이제 아무런 죄도, 결핍도 찾지 말자. 우리가 집중할 것은 오직 한 가지! 어떻게 힘을 행사할 것인가! 우리는 힘을 행사할 때만 진정한 주인으로 사는 법을 배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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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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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彬

양심의 가책이 어떻게 우리에게 쾌락이 되는지 궁금했는데.
실제로는 아무 것도 겪지 않지만 상상 속으로는 모든 걸 겪어 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게 흥미로운 거 같아요!
부딪히고 싫고 불편한 일을 겪기 싫을 때 이렇게 저를 괴롭히며 안 바뀌려 하는 거 같아요…ㅎㅎ

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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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연

어머. 첫댓글이당♡ ㅎㅎ 부딪히기 싫어서 나를 괴롭히는것으로 겪으려는 대체투자? 나는 계속 무능할수밖에 없는.

이달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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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팽

우리에게는 결핍이 아니라 오직 무능함을 유지하려는 의지만이 있다는 게 뼈 아프면서도 시원하네요ㅋㅋ
‘양심의 가책’이 일어나려고 할 때, 제가 어떤 세상과 단절하려고 하는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보다, 문제가 생기면 해결에 집중하면 된다, 는 말이 명쾌하게 다가와요, 정말 그러면 될텐데요..ㅎ

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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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연

ㅇㅇ 저도 양심의가책이 일어날때마다 무엇으로부터 도망가려는지. 아직도 나의 무능을 사랑하고 있는건 아닌지 계속노력해서 봐야할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