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대중지성 정리

 

질문자 : 인연과 전생이 정말 존재하는 건가요?

법구경을 공부를 하고 있는데 인연담, 전생담이 엄청나게 많더라고요. 별의별 얘기가 다 있어서 제가 굉장히 재미있게 읽고는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거를 읽으면서 그 당시에 윤회사상이 인도인들에게 다 퍼져있으니까 부처님께서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전생얘기를 하셨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읽고 있거든요.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이 얘기를 통해서 부처님께서 가르치려고 하시는 의도는 무엇일까?’ ‘부처님께서는 윤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그냥 그 시대 사람들이 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제 그거를 가지고 가르침을 펼치기 위해서 하신 걸까?’ ‘아니면 부처님도 그 시대적 한계 속에서 있는 인간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윤회라는 생각을 하셨을까?’ 이런 생각이 들면서 궁금해지더라고요. 그리고 저는 불교를 종교로 믿고 있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계속 인연과 전생 얘기가 나오다 보니까 약간의 좀 거부감도 들 때도 있고 해서요. 스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듣고 싶습니다.

 

정화스님: 우선 그 경전에는 “기억을 감지하면서 A라는 몸에 있다가 B라는 몸에 흘러 들어가는 영혼은 없다.”라고 분명히 이야기 해놨습니다. 그러니까 기억이 우리 속에 들어 있어서 이 삶의 기억을 가지고 다닌 적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불교에서는 윤회라고 하는 말을 많이 하는데, 모든 생명체는 세포막이 형성되면서부터 세포안쪽을 자아라고 여기는 무의식적인 인지를 하고 있어요. 무언가가 형성되어 경계가 만들어지면서 그 경계 안쪽을 자아라고 여기는데, 이 자아라는 추상체는 어떤 사람이든지 다 추상적으로 비슷해요. 나도 ‘나를 자아.’라하고 다른 사람도 ‘나를 자아.’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생명체가 인지능력을 갖게 되는 순간부터 모든 것은 자아라고 하는 것이 마치 연속되는 것 마냥 생각하게 되어 있어요.

물론 지구상에서 생명체가 처음 생길 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고 사람도 내일이라고 하는 시간의 추상인지가 생긴 지 대략 칠만 년 전밖에 안됩니다. 그러니까 칠만 년 전에는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전생이니 후생이니 하는 말 자체가 없었어요. 내일이라고 하는 것을 상정했을 때 어제라고 하는 말의 연속성을 상정할 수 있었는데, “내일 보자”라는 말을 처음 하는 사람이 칠만 년 전에 처음 지구상에서 생겼어요. 그 이전에는 시간의 연속성을 담보하는 인지가 아예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적으로 자아라고 하는 것은 있어요. 시간의 연속성이 아니고 그냥 이것은 무의식적으로 ‘나’라고 하는 세계에 있었는데, 시공간을 온전히 확장시켜서 ‘자아가 흐르고 있다.’라는 생각 자체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은 그 시간의 연속성을 생각하든 말든 항상 몸의 피부 경계를 중심으로 “이것은 나고 저것은 나가 아니다.”라고 하는 생각이 생명체마다 갖고 있었단 거예요. ‘생명이 된다.’라고 하는 말은, 바로 그와 같은 자아의 사유가 연속된다는 말이에요. 자아라고 하는 사유의 연속성을 불교에서는 어떻게 생각을 하냐면 부처님은 윤회라고 하죠. 왜냐하면 기억을 담보해가지고는 그런 일은 없다고 부처님이 말씀해놨는데 그럼에도 윤회를 말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을 담보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생명체는 태어나자마자 항상 자의식을 연속적으로 갖고 있기 때문이에요.

살다보면 ‘아 과거에 이러이러한 것이 있었다. 내일의 무엇이 있었다.’하는 것들은 내 안에 있는 기억의 자모음이 어떻게 있는가를 보면 대략 유추할 수 있어요. 기억을 가지고 가는 게 아니고 기억의 자모음을 가지고 가는 것처럼 말씀하는데 예를 들면, 제가 이 보살님 딱 보면 망막을 거쳐서 눈의 제일 뒷면에 있는 브이원이라고 하는 시각을 해석하는 첫 번째 영역이 있어요. 이 그림인데 이렇게 독특합니다. 제가 이 컵을 보고 있으면 이 그림이 망막을 통해서 여기에 도착을 해요. 여기에 도착하면은 뇌는 이것을 어떻게 하느냐면 이름을 해석하는 데는 이쪽으로 정보를 보내고 어디를 해석하는 것은 이쪽으로 보냅니다. 이것이 갑자기 나눠져요. 그래가지고 이리로 간 놈은 이름을 몰라요. 이름으로 간 놈은 이것이 어디에 있는지를 몰라요. 크게 보면. 그래서 이거를 이름의 통로라고 하고 여기는 장소의 통로라고 하는데 저절로 브이원에 도착만 하면 이 안에 있는 정보가 전혀 다른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되어버리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이렇게 벌어진 것들이 계속 다른 것에 끼어들면서 감정 등을 해석해 가지고 최종적으로 ‘아 여기에 있는 컵’이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졌을 때 우리는 의식하게 돼요. 근데 그것이 여기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똑같고 다른 동물들도 비슷비슷해요. 바꿔 말하면 기억을 만들어서 최종 이미지를 만드는 사건이 비슷비슷한데 그러다 보니까 마치 시간만 확장시키면 항상 과거 어느 때부터 지금까지 미래에 흐르는 기억의 연속성을 생각하게 돼있어요.

근데 문제는 방금 말했듯이 그렇게 갈라질 뿐만 아니라 갈라지면서 해석할 때 그것이 들어오는 정보는 하난데 내 과거의 기억이 이 정보를 해석하는데 얼마나 개입하느냐 하면 여섯 배 내지 열 배를 개입해요. 불교에서 말하는 업식(業識)이 개입하는 거예요. 여기서 들어오는 정보는 ‘하나’인데 이 정보를 해석할 때 내가 이미 기존에 가지고 있는 정보가 열 개가 개입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뇌는 사건, 사물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채우는 게 주특기에요. 그래서 대충 골격을 만들어 놓고는 나머지 모든 것들은 다 채워요. 거기다 시간만 딱 만들어 지면 자기의 과거가 이랬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게 되고 나의 미래가 이럴 것이라고 생각하게 돼요. 왜냐면 과거를 보는 게 아니고 미래를 보는 게 아니고 과거, 미래조차 지금 뇌가 채우는 것이에요.

그래서 시간을 사유하게 되면서 우리는 저절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속적으로 산다.’라고 사유할 수 있게 돼버렸어요. 그래서 지금의 사유를 지금 것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고 거의 과거 것을 가지고 해요. 모든 과거의 것을 가지고 이걸 하는데, 더 중요한 것은 그럼 과거는 기억하기 위해서 그런 정보로 남아있는 게 아니고 미래를 해석하기 위해서 기억정보가 남아있어요. 그래서 우리 안에 과거의 기억이 들어있어서 뭘 만들어서 지금 여기를 아는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로는 이미 뇌에서 그와 같이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여러 가지 경우의 이미지들을 만들어 놓고 그중에 뇌가 어느 것을 선택하는 것이에요. 그것이 지금 여기가 되는 거예요. 바꿔 말하면 안에는 굉장히 무수한 나의 지금이 있어요. 근데 그 지금 중에서 내가 어느 쪽으로 주의가 기울이냐가 현재 의식된 나에요. 그래서 앉아서 있다가 보면 이제 그런 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의식을 집중하고 있으면 저 같은 경우는 첫째로 몸이 참 이상해집니다. 지금하고는 다른, 몸의 감각이 달라져요. 저는 눈을 감고 주로 했는데, 눈을 떠보면 이 컵이 형태가 이렇게 길어집니다. 이렇게 길어져요. 저의 경험중의 하나가 컵이 쭉 길어지는 거예요. 여기는 실제로 아무것도 없는데 의식이 특정한 상태가 되면 여기에 그림 자체가 실제로 있어요. 컵이 연속적으로 이렇게 보이는 거예요. 제가 처음 경험할 때는 하도 이상해서 손으로 이걸 만져봤어요. 하나도 안 만져져요. 그런데 시각으로는 여기가 보여요. 그래서 인제 의식집중을 내려놔요. 그러면 원래의 컵 형태로 보여요. 의식을 조율을 하면 이 그림이 계속 바뀌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면 내 안에 이 그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여러 가지 개연성이 있는데, 지금은 이렇게 만들어 내는 거예요. 자 그러면 내 안에 나머지 그림들은, 이런 길쭉한 그림들은 어떻게 되느냐. 전부다 아까 말한 대로 자기 살아온 업식(業識)이 그렇게 하는 거예요. 업식(業識)이.

그러니까 지금만 보고 있으면 과거라고 하는 범주를 별로 생각할 필요가 없는데 이런 과정들을 전부 보니까 현재를 규정, 즉 실제로는 과거가 만들어놓은 해석 이미지가 현재로 뜨는데 그 모든 것을 그냥 전생이라고 얘기한다. 전생. 내가 지금을 사는 게 아니고 과거가 만들어놓은 현재 이미지를 선택적으로 사는 것이다. 선택적으로. 선택적으로 산다고 하는 말은 나머지 선택되지 않은 것들은 전부 어디로 가느냐면 미래를 또 준비할 것처럼 되어있어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런 경험들을 하면은 천안(天眼)을 경험했다. 천안, 하늘의 눈이라고 그래요. 미래를 보는 눈이라고 그래요. 실제 미래를 보는 게 아니고 과거가 만들어 둔 이미지가 지금 우리로 보면 현재지만 이것을 만들 때는 언제, 뭘 준비합니까? 미래를 준비하는 거예요. 그래서 준비된 미래 중에서 지금 난 하나만 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앞서 말한 대로 의식이 조금만 달라지면 준비된 미래의 다양한 것들이 그때그때마다 이렇게 나타나는 거예요. 그래서 이와 같은 그림을 보는 것은 이것만 보고 있으면 우리는 현재를 보는 것처럼 생각이 돼요. 그런데 이것이 다양하게 변하는 것을 보면 의식이 현재를 파악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는데 그 가운데 어떤 것이 나왔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과거가 준비한 미래를 보고 있다고 했을 때 다른 영상들이 왠지 조금만 달라지면 미래에 나타날 영상이라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미래에 나타날. 자. 그 미래도 뭐가 만들었습니까? 과거와 연관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과거, 현재, 미래가 한 영상 속에서 그렇게 같이 들어있는 것을 불교에서는 윤회한다고 말해요. 불교에서는 ‘찰나윤회’라고 그래요. 찰나윤회.

두 번째는 인제 ‘일생윤회’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과정을 일생의 하나의 윤회라고 그냥 보는 거예요. 그러면 인제 태어나자마자 우리 안에다 뭘 만들어 넣는가 하면 그때부터 인제 세상을 해석하는 해석기, 즉 뇌가 커갑니다. 유전자가 뇌에다가 이렇게 명령을 해놨어요. 이런 부분들은 “네가 현재를 살면서 학습된 것으로 그 부분을 채워라.” 이렇게 유전자가 말해놓은 부분이 있어요. 공란(空欄). 그러니까 학습된 것이 다음 미래를 준비하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유전자로 보면 유전자가 자기가 정해놓은 게 있어요. 이 정해놓은 것은 거의 최초의 생물이 생겨서 지나온 과정에서 지금을 준비하는 것처럼 같이 돼있어요. 그런데 그 최초의 생명체가 생기는 것이 지금부터 한 40억 년 전이에요. 지금 우리들 가운데 발견된 것으로 가장 오래된 유전정보는 16억년이나 18억 년 전에 만들어진 게 있어요. 이게 한 500개 되는데, 이 500개는 18억 년 전에도 그렇게 작용했고, 10억 년 전에도 그렇게 작용했고, 5억 년 전에도 그렇게 작용했고, 지금도 그렇게 작용해요. 그렇게 해서 생명지도는 하나가 만들어서 연속성으로 가는 게 아니고 흘러가는 과정에서 온갖 여러 가지 학습된 것들이 끼어들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거예요.

그런 것들이 좌선하는 과정에서 무슨 상승작용을 해가지고 막 나타나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니까 의식 하나가 일어날 때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중첩돼서 있는 것과 똑같아요. 이런 것을 불교에서는 윤회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뭘 하는 게 아니고 지금 의식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함께… 미래는 아까 말한 대로, 앞으로 일어날 미래가 아니고 과거의 학습을 통해서 준비한 미래들이에요. 항상. 그래서 지금 일어난 이것은 지금이지만 실제로는 과거의 기억이 준비한, 즉 과거에서 보면 미래적 사건이 지금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의 의식현상에서 관통으로 흐르고 있어요. 이러한 것들을 윤회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아의 경계망을 만들어서 ‘여기가 나다, 너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나다.’라고 하는 의식체가 그 속에 있어요. 무아인데 이것을 유아론적 인식의 흐름이라고 보는 것이죠. 이런 인식의 흐름들이 윤회이기 때문에 아까 말한 대로 세포하나가 만들어졌을 때 세포막을 중심으로 이 안쪽은 나의 영역이고 바깥은 외부영역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보는 거예요. 물론 지금 우리의 의식하고는 다릅니다.

그런데 지금은 생물 분자들의 활동자체가 그냥 지성이라 해서 분자지성이라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인간이나 고등한 동물들이 가지고 있는 인식 활동을 지성 활동이라고 보아 왔는데, 그것은 양이나 깊이나 학습의 내용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생물체 분자들이 하고 있는 앎의 활동의 양상만 다르다는 거예요. 분자 지성이라고 말합니다.

바꿔 말하면 단세포 생물이 만들어졌으면, 그 보다 훨씬 작은 분자들의 지성 활동이 이미 그 안에 있어요. 마치 우리가 100쪽의 세포들의 융합체로 인간이라고 하는 지성 활동을 하듯이 단세포 생물을 만드는 훨씬 많은 작은 분자들이 단세포 생물이라는 지성체로 작용하는 것이죠. 그 지성체의 작용 중에서 아까 말한 대로 자아라고 하는 추상적 이미지의 연속이 똑같이 있는 거예요. 자아라는 의식을 시공간에 경계를 지어서 분별하는 생각이 있으면 윤회하는 사고체계고, 그것이 없으면 윤회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현대과학은 이것을 어디서 하는 줄 요즘은 알고 있어요. 전에 한 번 말씀 드렸는데, 뇌 꼭대기에서 좌뇌 쪽으로 조금 내려가서 안쪽 깊숙이 들어가면 ‘정위연합영역(주석: 시간, 공간을 감지하는 부위)가 있어요. 정위연합영역, 위치를 정해주는 연합 영역입니다.

연합영역이라는 것은 위치를 정해줄 때 그냥 하나만 하는 것이 아니고, 안에서 오는 갖가지 정보를 융합시켜서 위치를 정하는 거야. 그니까 내가 이것의 위치를 보고 있을 때 그냥 아는 게 아니고 아까처럼 여러 가지로 갈라진 것들이 모여서, 30센티 밖에 어떻게 있다고 위치를 정해주는 거고 이를테면 시간과 공간, 지금이라는 시간과 여기라는 공간 그리고 자아의 연속성이라는 경계망을 만들어주는 부분이 있어요. 정이연합영역이라고 하는데, 그 부분이 스위치가 딱 꺼지면, 방금처럼 같은 시간과 공간의 자아성을 구별할 수 없어요. 자아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그런 것이 살아있어야 돼요. 그것만 작동하지 않으면 경계를 나누면서 자아라고 하는 생각 자체가 사라져요. 그러니까 그 경계에 의식 활동이 일어나면은 윤회한다, 윤회하지 않는다는 의미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그 다음에 또 나아가서 ‘클라우스트룸’이라는 게 있어요. 좌뇌, 우뇌 중앙 쪽에 세포가 아주 얇고 그렇게 길지 않은 영역이 하나 있는데, 이 영역의 스위치만 내리면 모든 사람이 동시에 좀비가 돼요. 좀비가 되는 순간, 그 의식 상태에서 깨어나면 어떤 상태가 되느냐면,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지난 시간 자체가 아예 사라져버려. 그래서 깨어나면 다른 사람이 볼 때 10분이 지났는데 자기는 10분전하고 완전히 다르게 연결되는 거예요. 이처럼 우리 삶이라고 하는 것은 온갖 인연들이 중첩돼서 지금 여기라고 하는 사건을 만들고 있는데, 그렇게 보지 않고 주체적 자아가 그것을 이렇게 저렇게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의식이 있는 것을 윤회라고 합니다.

청중: 마지막 부분을 조금 더 설명해 주세요.

정화스님: 독립된 내가 이곳저곳을 다니는 게 아니고 이 독립된 자아를 이루는 것이 온갖 인연이 중첩되어서 자기를 이루는데, 그렇게 보지 않고 그냥 주체적인 자기가 여기저기를 홀로 독립해서 가고 있다는 생각이 연속되는 것을 그 생각 속에는 항상 시간의 연속성이, 어제, 오늘, 내일을 연속시키는 것을, 태어나기 전, 지금, 태어난 후를 연속시키는 사유체계와 똑같아. 그래서 전생담이라고 하는 것이 이야기되어질 수 있는 개연성이 조금 있는 거지. 그런데 그 전제가 있어요. “그 전생을 기억하고 살아낸 주체적 영혼이 이렇게 다니는 것은 본래 아니다.”하고 대전제를 해놓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전제를 통해 하여튼 이 곳 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자아로 사는 영혼은 없다고 해놓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어쨌든 이해가?

청중: 이해가 잘 안 돼요.

정화스님: 잘 안 되죠? 듣다 보면 나중에 혹시 관점의 전환이 일어날지 모르겠지만 … 우리는 아까 말한 대로 분자 지성체들이 활동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만들어서 자아를 연속적으로 사유하도록 흘러왔어요. 중첩된 것을 보는 게 아니고 나누어진 것을 보는 것이 중심이에요. 왜 그렇게 되느냐면, 예를 들어 양자물질이라 하는 것은 여러 것이 될 수 있는 개연성이 중첩돼 있어요. 그런데 탁 터지고 나면? 다른 개연성들이 사라지는 것과 똑같아요. 그러면 일어난 것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여요. 마찬가지로 의식은 여러 가지 미래적 사건들을 무의식이 다 만들고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딱 떠오르면 그것만이 자신의 현재가 되고 미래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을 보는 내가 있는 것처럼 의식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진화상 이루어졌어요. 그래서 그렇게 보도록 되어있어요. 지금상태에서는.

그런데 아까 말한 대로 의식을 집중하면 중첩된 상황에서 다른 상황이 나오는 조건을 만드는 거예요. 항상 이렇게만 보였는데, 같은 것을 보고 있는데, 이렇게 보는 것이 일반적이긴 한데 의식이 바뀌면 이것이 다른 것으로 보이는 거예요. 이 안에 들어 있는 중첩된 이미지가 나한테 보이는 현상을 경험하게 되면 자아는 홀로 서서 가는 것이 아니라 중첩된 인연들이 걸어가고 있다고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이죠. 그러면서 점점 브라만의 실체를 규정하고 크샤트리아의 실체를 규정하는 자아가 있잖아요? 이런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죠.

질문자: 스님, 그러면 자의식에 따라서 윤회가 있고 없고 하는 건가요? 윤회 자체는 절대 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정화스님: 아, 그렇죠.

질문자: 윤회자체는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자의식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윤회가 생겼다가….

정화스님: 자의식이 사라지지 않는 한 윤회하는 사람인 거고….

질문자: 스님 근데 사람이 자의식이 없을 순 없잖아요.

정화스님: 자의식이 있는데, 앞서 말한 대로 자의식이 내부에서 만들어 낸 환상이라고 해석 하면은 자아 자체가 부정되진 않지만 자아 자체가 지금처럼 절대 불변의 요소처럼 자기에게 오지 않으면 자아를 제대로 보는 것이죠. 이것을 지혜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앉아서 의식이 바꿔 지면은 이 안에 중첩된 그림들이 나타나고 이런 그림을 통해서 이것이라고 하는 것은 특수한 인연일 때만 이렇게 보인다고 아는 것이죠. 자아도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인연이 중첩 되어 이렇게 드러나는 것이지 이것을 규정하는 근본적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는 거예요. 내가 없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는 관점의 변화가 오는 것입니다.

질문자: 그러면 스님, 뇌 이쪽에서 자의식을 만드는 것이 있다고 하면 이것도 물질이잖아요? 그러면 결국 자의식은 물질인가요?

정화스님: 그렇게 보면 문제가 있습니다. 왜 문제가 있느냐 하면, 우리 몸은 완벽하게 영혼이면서 완벽하게 물질 이예요. 그래서 둘이 작용면에서 차이가 있는 거예요. 영혼과 물질이라고 하는 두 개가 결합 되는 게 아니고 완벽하게 영혼이면서 완벽하게 물질 이예요.

질문자: 그러면 영혼이란 게 뭔가요?

정화스님: 아까 말한 대로 지성이라고 그랬지요. 지성. 각 분자마다 물질로 존재 하는 것이 아니고 지성체로 존재 합니다.

질문자: 지성이라는 것도 그저 이름 이지요 스님?

정화스님: 그렇죠. 그러니까 이런 사고를 경험하게 되면 자기가 이런 것들을 이렇게 이름 지어서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아요. 이것을 컵이라 이름 붙여서 쓰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지 컵이라는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그와 같은 경험을 하게 되면 언어를 쓰기는 쓰되 언어 밖을 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격외(格外)라던가 언어 밖이라고 말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물질의 활동 그 자체가 지성. 아는 거예요. 아는 거. 이것이 오면 내가 이렇게 반응해서 알 수 있는 힘 이예요. 우리 몸 자체가 완벽하게 그것을 갖췄다는 것과 똑같은 것이죠. 이것이 물질 이면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죠. 그래서 이 지성 활동은 우리 몸의 바뀜과는 아무 상관없이 언제나 계속되기 때문에 이제 그것을 알면 생사라는 말 자체가 의미가 바뀌는 것이죠. 어쨌든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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