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겸

지금과 다르게 산다는 것이 이상을 놓치지 않는 것을 의미하던 시기가 있었다. 이상을 동력으로 삶을 살아내던 시기였다. 엄혹했던 시기에 이상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살아가게 하는 근거와 같은 것이었다. 그래도 이상이 있었기에 길을 잃지 않고는 살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현실적인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 힘에 부쳤던 것일까? 어느 틈엔가 의지만으로 이상을 향해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접게 되던 것 같다. 가족들을 핑계로 현실적으로 변해가면서 이상은 어느 틈엔가 잊혀져가고 있었다. 어쩌면 이상이란 자신의 신념을 지키게 하는 원동력이면서 현실에 밀착할수록 멀어지는 그 무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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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이상은 여러 다른 모습으로 표상할 수 있다. 음악이나 미술에 자신의 이상세계를 담아 낼 수 있다. 종교에서도 천국의 모습으로 이상세계를 그려낸다. 신이 그 이상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소설을 읽으며 작가가 그려낸 이상세계를 확인하기도 한다. 어떤 작가의 소설은 정의가 항상 승리한다. 작가의 권선징악의 세계를 작품에 담아낸 것이다. 그에게 이상은 권선징악이 실현되는 세계이다. 이념에 자신의 이상을 심어 놓을 수도 있다. 이념적 이상에 달성될 세상의 모습을 담아내기도 한다. 

  기독교인들은 천국에 가기 위해 오늘을 산다. 살아가고 있는 현재를 죽음 이후의 삶의 방향에 맞추는 것이다. 신은 신앙인들에게 천국을 준비해준 존재이기에 그들에게는 ‘이상’일 것이다. 여기서 묘한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현실의 삶을 떠날 수 없다. 한편 이상은 현실과 다른 지점에 존재한다. 만일 이상이 현실과 같다면 이상일 수 없는 것이기에. 현실에 초월하여 있는 것이 이상인 셈이다. 

 우리가 이상을 향하는 순간 현실의 삶이 그것과 별개인 것을 위하여 존재하게 된다. 분명 나는 현실을 살고 있는데 그 장 바깥에 있는 이상을 위하여 존재하게 되어 버린다니. 마치 환상을 향하여 돌진하도록 유혹하는 실체처럼 이상은 작동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상에 욕이라도 한바탕 퍼부어주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 살길을 찾아가야 하는 건 아닐까? 이상은 현실을 제대로 살게 하는 기제가 아닐 수도 있겠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이상이 도대체 내 삶에 무엇이었던가, 하는 질문이 따라 나왔다.   

니체의 이상에 대한 생각

 해석 일반에 대한 (폭력, 수정, 약축, 생략, 변조, 날조, 위조, 그 밖의 모든 해석의 본질에 속하는 것에 대한) 저 단념, 이것은 대체로 말해서, 어떤 관능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덕의 금욕주의를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금욕주의를 강제하는 것, 즉 진리를 향한 무조건적 의지란 금욕주의적 이상 자체에 대한 신앙인 것이다. 비록 이 신앙의 무의식적인 명법으로 존재한다고 해도 그렇다. 이 점을 착각해서는 안 된다. – 이것은 형이상학적 가치, 진리의 가치 그 자체에 대한 신앙이며, 또한 이 가지는 저 이상 속에서 보증되고 확인된다.(이 가치는 저 이상과 더불어 흥망을 같이한다)

프리드리히 니체,『도덕의 계보』, 책세상, 526쪽 

이상에 대해 이렇게 이의를 제기 할 수 있게 된 것은 니체를 읽으면서 부터이다. 그는 자신의 논문에서 ‘금욕적 이상’을 다룬다. 이상은 변하지 않는 순수성을 가지고 있다. 이상은 현실을 초월하여 존재한다. 그 것을 추구할 수는 있어도 이상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가령 어떤 이념이 이상일 수 있으려면 현실에 닿고서도 변하지 않아야 한다. 음악이 그 자체만을 위한 요소를 지니고 있을 때 순수한 열정을 담은 이상적 음악이라 할 만하다. 

 니체는 ‘진리를 향한 의지’에서 금욕주의적 이상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앙이 담겨 있음을 간파한다. 그 진리는 변화하지 않는 실체를 표상한다. 그렇기에 그 진리는 해석을 부정하고, 해석에 담긴 욕망을 부정한다. 사실 현장에서 마주치는 어떠한 사건이라도 관점을 포함하지 않는 것은 없다. 어떤 사람이 세상을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변조이고 날조이다. 그리고 그 표현은 타인에게 폭력적으로 침투해 들어간다. 그 사람의 욕망이 그것을 표현하게 한다. 그렇기에 진리를 향한 이상은 금욕적 이상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과 같다. 욕망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순수한 이상을 추구하는 것은 변치 않는 진리를 찾고 따르려는 무조건적 의지와도 같은 것이다. 이상은 욕망을 부정한다는 의미에서 금욕적일 수밖에 없으며 금욕적으로 힘을 쓰면 현실에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애초에 이상은 금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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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향한 이상은 금욕적 이상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과 같다

 그런데 여기에 묘한 문제가 있다. 니체에 의하면 인간을 힘을 쓰면서 사는 존재이다. 어딘가를 향하여 힘을 쓰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이다. 니체는 그것을 힘에의 의지라고 하였다. 어떤 것이어도 좋다. 그것이 허깨비여도 상관이 없다. 인간은 심지어는 죽음마저도 향하는 존재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이상을 향하는 건 그것이 생명력을 고양시키고 살맛을 주기 때문이 아니다. 이상을 향하게 되면 세상살이가 고통스러운 이유가 그럴 듯하게 설명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고통 때문에 견딜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럴 듯한 이유가 없기 때문에 견딜 수 없다. 

무엇인가 결여 되어 있었다는 것, 어마어마한 균열이 인간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는 것, 실로 이것이 금욕주의적 이상을 뜻한다. – 인간은 스스로를 변명하고, 설명하고, 긍정할 줄 몰랐다. 인간은 자신의 의미의 문제 때문에 괴로워했다. 그는 그 밖의 문제로도 괴로워했다. 인간이란 대체적으로 보아 병든 동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문제는 고통 자체가 아니었고.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가?”라는 물음의 외침에 대한 해답이 없다는 것이었다. 

프리드리히 니체,『도덕의 계보』, 책세상, 540쪽 

 인간이 스스로를 설명하고, 긍정할 수 있다면 이상 따위를 찾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대체로 약한 존재이다. 약한 인간들은 삶을 긍정하고 스스로를 표현하고 고통을 겪어내는 대신에 고통의 이유를 묻는다. 그럴 듯한 대답인 이상이 그 이유가 되었다. 

 다수의 사람들은 고통을 겪어 나가며 살아가는 것보다는 고통의 이유를 찾는 것으로 그 것을 대치해 버린다. 아마 그것이 쉽다고 감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의지를 살아가는 것에 쓰기보다는 금욕적 이상을 향하는데 사용한다. 이상은 현장과 엮이지 않는다. 오히려 현장을 금욕함으로써 이상은 더욱 강력해지는 것이다. 금욕적 이상이 방향을 주었지만 의지가 향하는 그 방향은 삶의 의지를 낮추게 한다. 어쩌면 삶이 왜 고통스러운 것인지에 대답을 들은 대가로 우리는 무기력 해진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어떻게 다르게 살 수 있을까?

 살아있는 생명은 자신의 힘을 쓸 줄 안다. 자신의 힘을 발휘하여 차이를 만들어 내고자 한다. 힘을 쓰는 존재인 생명은 차이나는 삶을 원한다. 그래서 생명으로서 인간은 지금의 자기를 극복하고 다른 삶을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지금과 다른 삶을 원한다. 

  누구나 다른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문제는 그가 힘을 쓰는 방향에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삶은 크고 작은 고통의 연속이다. 다만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는데 힘을 쓰는 사람과 방향을 틀어서 그 고통을 덜어보려고 애쓰는 사람으로 나뉠 뿐이다. 말하자면 세상에서 힘을 쓰는 방법의 차이만이 존재한다. 삶을 살아가는 역량이 넘치는 자에게 고통을 덜어주는 기재는 필요치 않을 것이다. 이상은 그것을 향함으로써 고통을 잊게 하는 기재이다. 이상은 살 이유와 방향을 주지만 삶에 밀착하여 몸을 한 뼘 더 뻗게 하지는 않는다. 

현실에 자족하고 소소한 즐거움이나 즐기는 삶, 묵묵히 수모를 견디며 버티는 삶 이야 말로 니체가 조롱하는 삶이었다. 자기를 지키는 것이 전부인 삶 그래서 시대성을 따라 갈 수밖에  삶, 니체는 그를 노예적 삶이라 불렀다. 그렇다면 능동적으로 지금과 차이를 만들며 사는 것이야 말로 주인 된 삶일 것이다. 

힘과 힘은 충돌하고 더 작은 힘이 더 큰 힘에 흡수된다.

다시 ‘삶에서 이상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돌아가 보자. 오랜 기간 이상과 현실을 분기하면서 살아왔다. 이상적인 것을 따르는 삶과 현실적이 되는 길 두 가지만 있다는 사유로 의심 없이 살아왔던 것 같다. 니체를 읽고 이상에 대한 나의 통념적 사유에 의문이 일었다. 살아가는 현장을 떠나 있어야 이상적인 삶이 된다니? 이상을 떠나면 현실과 타협하는 길만 있다니? 정말 그 사유를 마음껏 비웃어 주고 싶어졌다. 

 어떤 것도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고통을 소멸시키지 못한다. 어쩌면 살면서 겪는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필요한 것도 아닐 것이다. 다만 그 운명을 감당하고 돌파해 나갈 뿐이다. 우리는 지금의 삶에서 한 발자국도 떠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삶의 장에서 다르게 살 것이다. 그렇게 ‘삶의 장에서 어떻게 다르게 살 수 있을까?’가 우리 삶의 주된 질문이 되어야 한다. 그 질문이 우리를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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