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서연(금요대중지성)
 
 
주위 사람들에게 복이 많다, 팔자가 좋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데 정작 나는 걱정과 두려움을 달고 산다. 한 마디로 걱정쟁이다. 먹고 사는 문제나 가족 관계 등 별 문제가 없는데 왜 걱정과 안달에 찌들어 사는 걸까? 
  
오래 전, 우리 부부는 텃밭을 가꾸려고 조그만 땅뙈기를 마련했다. 당장 내려갈 처지가 못 되어 근처 농사짓는 이에게 땅을 빌려주어 일 년에 한두 번 그곳을 가게 된다. 그때마다 ‘혹시 부당하게 뭘 요구하면 어쩌나? 농사를 안 짓겠다고 하면 어쩌지?’ 등 온갖 번뇌 망상을 피우다 마지못해 가곤 한다. 결국 맘 좋은 땅주인 행세를 하며 그이의 하소연과 요구사항을 들어주고 돌아오는 길 내내 자책을 한다. ‘내 땅 빌려주고 내가 왜 이렇게 굽신 대는 거지?’ 과도한 친절을 베풀고 나서 그 찝찝함이라니! 이런 서툴고 비틀린 대응방식은 큰 문제에 봉착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나는 15년 전 동화작가로 등단을 해서 창작집을 내고 작품 활동을 활발히 하던 중 두 작품을 도용당했다. 혼자서 끌탕을 하던 나는 ‘더 좋은 작품’을 쓰리라 다짐하며 별 대응도 하지 않은 채 물러섰다. 그렇게 공 들인 것을 그렇게 쉽게 포기하다니, 귀신도 나도 모를 일이다. 내가 세상을 대하는 일련의 행동들을 가만 보면 걱정, 안달, 과도한 친절, 회피 등이다. 전혀 이성적이지 못한 이런 태도는 일상이 헝클어지는 것에 대한 불안, 그 불안에 대한 알레르기 증상이다. 이 마음을 뒤집어 보면 지금까지 살아온 안정되고 평온한 일상에 대한 애착이 진하게 깔려 있다. 온갖 부딪침과 혼돈과 이해가 뒤얽힌 세상은 나에게 두려움이고 걱정거리고 피하고픈, 불편한 곳일 뿐이다.    
만약 내가 『장자』를 만나지 못했다면 편안하고 안락한 것에 대한 집착이 나를 가두고 있는 새장이라는 걸 알아챘을까? 외물에 매이지 않는 절대 자유, 대자유의 경지에 접속하지 못했다면, 지나친 배려와 보호, 안락함이 생명에 대한 폭력이라는 것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걱정에 걱정을 낳는 번뇌 망상이 자유의 큰 도적이라는 것도 모르고 망집(妄執) 속에서 동동거리고 있을 게다. 자연과 우주는 그 자체가 변화인 것을, 그러한 것을! 나는 그 명료한 진리를 망각한 채 그동안 이를 밀어내려고 얼마나 용을 쓰며 문을 닫아걸었던가! “사람들이 이미 좋게 생각한 바를 비난하려고 하지 않는다.” (『장자』 안동임 277쪽) 는 말과 같이 나는 먹이 걱정 없고 추위나 사냥꾼의 위험이 없는 새장의 새처럼 편안한 삶의 조건들에 대해 그 어떤 의심도 하지 않았다. 
 
복 많은 나의 삶이란 세상의 다양한 경험과 지혜를 거세당한 삶, 손바닥만한 안락함과 대자유를 맞바꾼 삶,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 속에서 면역력을 잃은 나의 생명에너지는 계속 신호를 보낸 것이다. 불안과 두려움으로! “작은 지혜는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하고 조균(朝菌)은 밤과 새벽을 모른다.”(같은 책 30쪽) 아침에 나서 저녁에 죽는 조균이라는 버섯과 울타리 안에서 세상의 마주침과 변화에 무지한 채 전전긍긍하며 살아온 나와 무엇이 다른가? 
 
북명에 사는 물고기 곤은 삼천리 파도치기를 해서 붕새가 되었다. 붕이 구만리 창공을 날아오르자 쓰르라미가 비웃었다. 느릅나무에 오르다 내동댕이쳐질 인생, 터무니없는 짓을 왜 하느냐고! 작은 날짐승인 쓰르라미는 붕의 날개 아래 두텁게 쌓인 위대한 바람의 힘도, 끝없는 그 푸르른 창공의 대 자유도 감히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자, 이제 나는 선택해야 한다. 수풀 속에서 비웃음을 날리는 쓰르라미가 될 것인가, 장애 없는 절대 자유 경지를 향해 날갯짓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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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彬
Guest
moon彬

편안하고 안락한 삶, 그리고 그 삶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든다는 게 신기한 거 같아요. 안전한 삶을 당연하게 좋다고만 생각하고 그것을 집착하는 저를 되돌아보게 되네요~ 어떤 상태에 멈춰 있으려 하는 게 아니라, 자연의 이치에 따라 삶이 변화한다는 것을 긍정하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