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란(감이당 금요 대중지성)

아는 만큼 보인다

얼마 전 감이당에서 같이 공부하는 친구 덕에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한불교조계종’이라고 할 때는 꼭 붙여 써야한단다. 얼핏 생각할 땐 띄어 쓰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 같은데, 굳이 붙여 쓰기로 정해져 있다니 혹시 조계종을 빙자하는 사짜(?)를 걸러내기 위한 장치인걸까? 쓰기만 그렇게 쓰는 것이 아니라 발음할 때도 역시 한 호흡에 말하는 것이 정석이라서, 조계종 스님들은 소속을 말할 때 숨차게 말씀하신다는 실없는 농담도 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거리를 지나는데, ‘대한불교조계종’, 이렇게 틈 없이 붙여 쓴 글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그 전까진 세상에 없던 것들이 뿅뿅 솟아올라서 ‘나 여기 있네~’하고 아우성이라도 치는 것처럼 말이다. ‘엇, 진짜 붙여 쓰네!’하고 속으로 웃음이 나는 한편, 새삼 신기해졌다. 알면 보인다더니 딱 그렇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몇 년째 다니는 길에서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충무로 역 대한극장 입구에서 감이당이 있는 깨봉빌딩까지 가는 길 중간에는 카페와 편의점, 생선구이집, 미주유통 같은 가게들이 있다. 역에서 감이당까지는 십여 분을 계속 오르막길로 가야한다. 카페를 거쳐 편의점을 지나 미주유통이 보이면 거의 다 왔다는 기분이 든다. 그렇게 카페-편의점-생선구이집-미주유통으로 이어지는 길만을 오가다가 어느 날 문득 ‘근아제지’를, 문득 ‘현진빌딩’을, 문득 ‘유정식당’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근아, 현진, 유정이 누구길래? 이들은 감이당에서 같이 공부하는 청년들이다(알고 보면 빌딩주, 제지업체, 식당 사장 등을 겸업하고 있는 건, 절대 아니다.^^;;) 이들을 ‘알고’ 나니 거리의 근아제지, 현진빌딩, 유정식당도 덩달아  내 눈에 ‘보이게’ 된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또 다시 생각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서문에서 유홍준 씨도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홍준,『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그러나, 알수록 지루해지는 사람들

‘앎’은 그 자체로 즐겁다. ‘알쓸신잡’이나 ‘지대넓얇’ 같은 컨텐츠가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는 이유는 그게 재미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즐거움이 즐거움으로 끝나지 않고,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또 다른 앎으로 이어진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앎이라니, 즐거움의 복리적 이득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이게 마냥 좋아할 일일까? 많이 알고, 그만큼 더 보게 되면 정말 좋은 것일까? 위에서 본 것처럼 앎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속성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앎은 기존의 인식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기 쉽다. 자기가 이미 아는 것을 세상에서 보고, 그 봄으로 인해서 더 확신하게 되기 때문이다. 차라리 모르는 게 많을 때는 자신이 부족하다고 인정이라도 할 텐데, 많이 알려고 열심히 노력한 결과가 자기만의 세상에 갇히는 꼴이 된다면 그건 너무 슬픈 일이다. 어떤 새로운 것을 봐도 기존에 자기가 알던 그것을 찾아내고야 마는 사람은 자신도, 남까지도 남도 지루하게 만든다. 

금성 2학기 에세이 발표 현장에서 우리는 그 지루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2학기 동안 우리는 각자 자기가 택한 고전의 시대적 배경과 사상사적 맥락, 저자의 생애를 공부했다. 배후의 역사적, 정치적, 사회경제적인 사건들을 찾아보고 재구성하는 일은 퍽 흥미로웠다. 배경지식이 생기면서 텍스트에서 이해할 수 없었던 문장들(의 극히 일부)을 새로 알아차리게 되었고, 행간에서 출렁거리는 보이지 않는 힘들의 작용을 감지할 수 있게 되었다. 역시 앎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문제는 그 앎이 새로운 발견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 학자들이 현장에서, 고서에서 샅샅이 훑어 모으고 검토하는데 걸린 시간과 노력을 생각하면, 나는 밑손질이 다 된 재료를 앞에 둔 요리사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이제 남은 일은 ‘논리’와 ‘독창성’이라는 최소 요건을 만족하는 ‘요리’만 만들면 된다! 하하.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아니 나는 지루한 이야기만 되풀이하고 있는 것일까?

청정함, 지루함, 더러움

거룩한 님은 규범과 금계나, 본 것이나 들은 것이나 인식한 것 

그 가운데 청정함이 있다든가 다른 것으로부터 온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공덕과 죄악에 더럽혀지지 않고 

얻은 것을 버리고,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짓지 않는다. 

청정에 대한 여덟 게송의 경, 숫타니파타

숫타니파타에서 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있다’. 위의 게송의 주제는 경의 제목에서 알 수 있는 바대로 ‘청정’이다. 깨끗함? 그게 지루함과 무슨 상관일까? 지루함을 감수하고^^ 다시 앞으로 돌아가자면 이런 프로세스다. 알면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많이 알면 많이 보게 될 것이라고, 아는 게 힘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여기엔 함정이 있다. 아는 것만 보고, 보는 것만 아는 반복의 고리가 형성될 수 있다는 것. 그러면 지루한, 몹쓸 사람이 된다. 어떤 새로운 사건, 놀라운 걸 보고 들어도 ‘아~ 그거? 내가 옛날에 해봤는데 말이야~~~’ 이런 반응이 자동생성되는 그런 사람 말이다. 말이 생성이지 그것은 생성이 아니다. 이 자동화를 강화시키는 것은 자만심과 죄책감이다. 위에서 공덕과 죄악에 더럽혀지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이 두 가지에 의해 우리가 더 쉽게 길들여지고 자동화되기 때문이다. 반면 반복과 지루함이 없는 상태, 그것이 청정이다. 

그럼 청정한 글쓰기는 어디에 있는가? 자신의 우물에서 길어 올린 언어의 창조는 본 것, 들은 것, 인식한 것, 다른 것으로부터 온 것에는 없다. 본 것, 들은 것, 인식한 것, 다른 것으로부터 온 것. 이것을 니체는 ‘리액티브(reactive)’한 것이라고 불렀다. 기존의 회로를 따라 일어나는 연쇄반응. 그것은 반응적이고 수동적인 것이고 이미 지어진 것이고 더럽혀진 것이다. 그렇다면 청정한 글쓰기란 모든 힘들의 상호작용, 밀당의 와중에 형성된 소란스러운 현장 안에 있다. 그 소란스러움을 오염된 필터로 거르지 않고 고스란히 발견하는 것, 그것이 청정함이다. 고로 이런 결론이 도출된다. 지루한 글은 청정하지 않은 글, 더러운 글이다.^^;;; 더러운 글을 쓰지 않는 것, 그것이 수련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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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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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Guest
문명

근아제지가 글에서 나올 줄이야 ㅋㅋㅋ 신선합니닷
알면 알수록 지루해질 수도 있다니 끔찍하네용ㅜㅜ
소란스러운 현장에서 글을 잘 끌어올릴 수 있도록 수련하겠습니다~~

moon彬
Guest
moon彬

아는 것만 보고, 보는 것만 알면 아무리 많은 앎이 쌓여도 자기 세계에 갇혀지내는 꼴이군요! 저도 책을 읽을 때 내가 알고 있는 것, 내 전제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만 반응적이고 자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건 아닌가 의심해보게 되네요. 청정해지기 위해서는 지금 읽고 있는 책 속에서 다른 것들을 발견해내는 힘이 필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또 한편으로는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이 고마워지는 거 같아요. 저와 다른 방식으로 책을 읽고 새로운 발견을 도와주잖아요~~

쩡하오
Guest
쩡하오

ㅋㅋ샘
앞에서 재밌는 얘기들을 하셔서 ‘도대체 앞으로 무슨 말을 하시려는 걸까?’하고 궁금해졌어여 ㅋㅋ
신선함 인정?! ㅎㅎㅎ
알수록 지루해질 수 있다는 말, 공부하면서 잘 새겨놓고 싶어요.
얻은 것을 계속해서 버리는 배움! 이 기쁨 함께 신나게 누리고 싶습니닷~~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