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혜 숙 (감이당, 금요대중지성)

지난 번 소개한 빠따짜라와 끼싸고따미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가족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빠따짜라, 자식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끼싸고따미. 슬픔과 비탄에 빠져있던 이 두 여인은 부처님에게 와서야 겨우 진정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빠져있던 괴로움의 구렁텅이에서 눈을 들어 비로소 주위를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아마 직감적으로 느끼지 않았을까요. 부처님이 자신들의 마음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는 것을. 아니 자신들보다 더 자신들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요. 그렇습니다. 누군가 내 고통에 깊이 공감하고 있다는 걸 느끼는 것보다 더 큰 위로가 있을까요. 정말 그 마음만으로도 살아갈 힘을 얻지 않을까요. 그럴 때 비로소 누군가의 소리가 귀에 들어올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제 그들이 부처님의 말을 귀담아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 이제 부처님이 이들에게 진정 하고자 하는 말을 들을 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먼저 눈을 돌려야 할 곳이 있네요. 가족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며 괴로워하고 있는 또 다른 두 사람입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빠따짜라와 끼싸고따미의 경우처럼 드라마틱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평범한 우리네 같은 이야기입니다. 이들에게 대기설법(對機說法:듣는 사람의 근기에 맞춰 하는 설법)의 달인이신 부처님이 무어라 말하는지 들어볼까요.

 

 

사랑하는 자 때문에

싸밧티 시에 살던 어떤 재산가가 아들을 잃었습니다. 그는 슬픔에 싸여 매일 화장터로 가서 울었습니다. 비탄을 억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을 할 수도 밥을 먹을 수도 없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아침 일찍 세상을 관찰하다가 그가 ‘흐름에 든 경지’(수다원과: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첫 단계)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탁발하고 돌아와 한 사미를 데리고 그의 집으로 갔습니다.

“재가신도여, 무슨 슬픈 일이 있는가?”

“아들을 잃었습니다. 슬픔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슬퍼하지 마라. 죽음이라는 것은 세상에 태어난 모든 존재, 모든 뭇삶의 것이다. 조건지어진 것은 어느 하나도 영원한 건 없다. 그러니 슬퍼하지 말고, ‘죽어야 하는 것은 죽는 것이고, 부서져야 하는 것은 부서지는 것이다’라고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여라. 옛날 현인의 가족은 아들이 죽었을 때, 이렇게 이치에 맞게 생각하여 슬퍼하지 않고 죽음에 대한 새김을 닦았다. ‘뱀이 허물을 벗듯, 사람은 자신의 몸을 버리고 저 세상으로 간다. 몸이 아름다워도 죽어 사멸할 때 무엇을 누릴 것인가? 몸이 죽어 불타면 친지들의 비탄의 소리도 듣지 못한다. 그러므로 슬퍼하지 말라. 가야할 운명이면 가는 것이다.’ 현명한 그들처럼 그대도 슬퍼하지 말고 비탄해 하지 말고 음식도 먹고 일도 하라. 슬픔이나 두려움이 일어나는 건 단지 그대가 사랑하는 자 때문이다.”

 

애착 때문에

재가여신도 비싸카는 깊은 신심을 가지고 평생 부처님과 수행승들을 도왔습니다. 비싸카가 일 할 수 없을 때는 손녀인 닷따가 그 일을 대신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닷따가 젊어서 죽어버렸습니다. 비싸카는 슬픔을 참을 수 없어 괴로워하다가 부처님을 찾아갔습니다. 부처님께서 울고 있는 비싸카에게 사정을 물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손녀가 죽었습니다. 그 아이는 사랑스럽고 성실했습니다. 그와 같은 아이는 다시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비싸카여, 싸밧티 시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는가?”

“칠천만명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모든 사람이 닷따처럼 사랑스러운 자라면, 그대는 그들을 좋아하겠는가?”

“세존이시여, 그렇습니다.”

“싸밧티 시에서는 하루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는가?”

“많은 사람이 죽습니다. 하루도 죽지 않는 날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한 순간도 슬픔에서 벗어날 시간이 없을 것이다. 밤낮으로 울면서 슬퍼하며 돌아다녀야 하지 않겠는가?”

“세존이시여 그렇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니 슬퍼하지 말라. 슬픔과 두려움은 모두 애착에서 오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슬퍼하는 걸까

죽음이라는 사건 앞에서 오랜 세월 사대양의 물보다 많이 흘린 우리의 눈물. 이 눈물 속에는 빠따짜라와 끼싸고따미의 눈물만이 아니라, 이렇게 또 다른 자식 잃은 아버지, 손녀 잃은 할머니들의 눈물, 나의 눈물, 내 부모형제의 눈물, 세상 모든 이들의 눈물이 들어있습니다. 저도 20여년전 아직은 한창 젊은 나이라 할 오빠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때 그 형용할 길 없었던 슬픔이 생각납니다. 자식을 당신보다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낸 후 어머니는 수시로 “니 오빠가 그렇게 먼저 갔는데 내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고 되뇌이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어머니의 비감한 마음이 내게 그대로 전해져 오는 것 같았지요. 동시에 그 말을 되풀이하는 어머니가 답답하고 싫기도 했습니다.

끼싸고따미가 발견한대로 집집마다 죽은 자가 없는 집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끊임없이 누군가 죽거나 죽어가고 있습니다. 사건 사고로, 질병으로, 자살로, 혹은 살만큼 살아서… 누군가의 사랑하는 부모이고 형제이고 자식일 그들. 어떻게 가슴 아프고 슬프지 않을 수 있나요? 아… 아닐 수도 있다구요? 네 그렇군요. 가족도 가족 나름, 관계 나름이니까요. 피붙이 가족이지만 남보다 못한 경우도 부지기수니까요. 또 가족이 아니어도 가슴을 메어지게 하는 무수한 죽음을 우리는 이미 경험했으니까요. 그러고보면 우리는 모든 죽음을 슬퍼하는 게 아닌 듯합니다. 아니 죽음 자체는 슬프지만 슬픔의 강도와 감정의 결이 다른 걸까요?

부처님 말이 아니어도 세상에 태어난 모든 존재는 죽게 되어있습니다. 죽음이 없으면 삶도 없습니다. 우리도 그걸 모르지 않습니다.(정말..요?^^) 그런데도 죽음은, 그저 죽는다는 것 자체로 우리에게 슬픔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그 무엇’인 것 같습니다. 대상이 누구이든 말입니다.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 본능적인 반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헌데, 부처님은 죽음을 슬퍼하지 말라합니다. 깨달으신 부처님은 감정도 없는 걸까요?^^; 부처님은 말합니다. 정작 죽은 당사자는 허물을 벗듯 몸의 굴레를 벗고 다른 세상으로 갔고 그에게는 슬픔도 비탄도 없다고. 너희들이 슬퍼하고 비탄해하는 것은 너희 자신의 ‘사랑하는 마음과 애착 때문’이라고. 아~ 그럼 우리는 정작 죽음을, 죽은 당사자를 슬퍼하는 게 아니었단 말인가요? 부처님은 묻고 있습니다. 과연 너희들은 무엇을 슬퍼하고 있는 거냐고. 너희들이 슬프다고 하는 것의 실체를 바로 들여다보라고. 자식과 손녀를 잃고 괴로워하던 재가신도와 비싸카는 부처님의 말을 듣고 뭔가 깨우친 듯합니다. 그들은 무엇을 깨우쳤을까요? 저도 궁금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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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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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彬

모든 죽음은 슬프고 안타까운 것이라는 전제가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저 역시 뉴스로 많은 죽음을 보면서 무덤덤하게 넘어갔네요. 그러고보니 저희는 모든 죽음을 비통하게 여기지는 않는 거 같아요. 하지만 정말 가까운 사람, 내가 사랑하고 의지하는 사람이 언젠가 죽는다고 생각하면 너무 쉽게 슬퍼져요. 부처님 말씀처럼 죽음을 슬퍼하는 건 나의 사랑과 애착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되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네요. 괴로움이 줄어들까요…? 한편으로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영원히 옆에 두고 싶다는 것도 끔찍한 욕심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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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담

부처님의 무엇을 슬퍼하냐는 말에 말문이 턱 막힙니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생각하면 슬프지만, 죽음이 무엇인지, 대체 무엇을 슬퍼하는지는 한 번도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슬퍼함으로써 죽음을 바라보지 않으려 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달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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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팽

이전에 죽음이라는 주제는 제가 생각하기엔 참 먼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얼마전에 가까운 분이 돌아가셔서 처음으로 죽음이라는 것을 만나게 됐던 것 같아요 . 살아 숨쉬던 사람이 가루가 되었을 때 슬프기도 했지만 경이롭기도 했어요, 정말 사람은 죽는구나 그리고 계속 죽는구나 하는 게 느껴져서요.
그래서인지 선생님이 불경과 죽음으로 쓰시는 글이 참 와닿고 감사합니다, 죽은 사람은 몸을 벗었으니 고통스럽지도 슬프지도 않겠지요. 앞으로의 붓잡다도 기다려져요, 함께 지혜로운 죽음을 만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