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해 완

나는 움직인다, 고로 존재한다

인간은 동물이다. 우리는 이 간단한 명제를 두고 치고받고 싸운다. 이 한 문장을 도대체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화라는 나무의 곁가지에서 뻗어 나온 ‘호모 사피엔스’ 종(種)이라는 사실에 한 치의 의심 없이 ‘옳다’고 말하는 때는, 글쎄, 생물학 시험 때나 되려나. 그렇게 머리로는 외워도 가슴으로는 다가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지금 아이패드를 블루투스 키보드에 연결해서 이 원고를 타이핑하고 있는 ‘나’라는 사람이 개, 쥐, 바퀴벌레, 물고기(따위)와 동질한 존재라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딱 봐도 내가 더 우월하지 않은가? 자고로 인간이란, 이 세계를 초월하는 ‘무엇’(그것이 신이든, 진화의 법칙이든, 유전자의 비밀이든)에게 선택받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겠는가?

우리 현대인의 자의식의 우물은 이처럼 좁고도 깊어, ‘동물’이라는 카테고리도 담아내지 못한다. 그러니 하물며 생명이라는 개념은 어찌 이해하겠는가. 머리로는 끄덕끄덕, 그러나 속으로는 절레절레. 동물을 넘어서 식물과의 접속을 정말로 시도하는 순간 우리의 정신은 까무러칠지도 모른다. 내가 정말로 저 풀떼기와 같다고? 도대체 어디를 봐서……?

신경계의 입장에서 보면 이 모든 패닉은 쓸데없는 일이다. 답이 나와 있는 문제에 괜히 대뇌피질을 복잡하게 풀가동 시키며 당(糖) 낭비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을 정신적으로는 ‘삽질’이라 표현한다.) 인간? 당연히 동물이다. 움직이기 때문이다. 동물의 존재론적 선언을 우리 역시 공유하기 때문이다. “나는 움직인다, 고로 존재한다!” 동물이 주어진 영토를 벗어나 움직이는 데에는 어떤 동기부여도 필요하지 않다. 태어난 순간부터 움직이고자 하는 것이 동물이고, 움직이지 않는다면 동물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운동이라는 보이지 않는 흐름을 신체에 ‘본능’으로 새겨 넣는 것은 바로 운동 신경계(Motor Nervous System; Sistema Nervioso Motor)의 몫이다. 이 신경계의 현란한 시냅스의 향연이 우리로 하여금 ‘동물(動物)’이라는 존재로 표현되게끔 한다. 빗자루를 들고 뛰어가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지는 바퀴벌레부터 마감시간에 전전긍긍하며 키보드 위에서 빠르게 손가락을 놀리는 나까지, 우리는 모두 운동신경계의 아이들이다.

운동이라는 보이지 않는 흐름을 신체에 '본능'으로 새겨 넣는 것은 바로 운동 신경계의 몫이다

운동신경계, 세상 속에 나를 던지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식물들도 움직이기는 한다. 동물처럼 자기가 뿌리박은 땅을 떠나지 못해서 그렇지, 매일 매일 조금씩 자라고 또 시든다. 식물뿐인가? 공기도 움직인다. 밤낮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그 운동을 증명한다. 물 또한 움직인다. 바닷가에서 철썩거리는 파도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지구 전체가 숨을 쉬는 것만 같다. 이처럼, 세상은 운동으로 가득 차 있다. 세상이 움직이지 않는 순간은 한 순간도 없다. 그래서 운동신경계는 감각신경계만큼이나 경이로운 세계다. 감각신경계가 세상 속의 자극들을 몸속으로 흘러 들어오게 함으로써 나를 세상의 일부로 편입시킨다면, 거꾸로 운동신경계는 나만의 독창적인 몸짓을 실현함으로써 내가 세상 속에 직접 개입할 수 있게끔 한다. 수많은 운동들 사이에서 함께 헤엄치도록, 나를 세상 속에 던지는 것이다. 이렇게 ‘나’라는 몸체는 세상에 두 번 연결된다. 얼마나 기똥찬 통합력인가.

바닷가에서 철썩거리는 파도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지구 전체가 숨쉬는 것만 같다

이를 더 자세히 알기 전에 우선 기초부터 짚고 넘어가자. 우리 몸이 운동을 실현하는 실질적인 장치부터 살펴보는 것이다. 그 장치란 바로 뼈와 근육, 그리고 관절이다. 해부학의 기초를 이루는 이 시스템을 SOMA(Sistema Osteomioarticular)라고 부른다. (Osteo는 뼈, mio는 근육, articular는 관절을 각각 의미한다.)

뼈는 차체에 해당한다. 몸의 형태를 이루고, 고정된 자세를 지탱하고, 몸 속 장기를 보호한다. 그리고 모든 뼈는 근육 조직에 꼼꼼하게 감싸져있다. 근육의 역할은 엔진과 같다. 수축 운동과 이완 운동을 번갈아 선택하면서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절묘하게 뼈를 운전한다. (실제로 수축되고 이완되는 것은 근육을 촘촘히 구성하고 있는 근육 세포다. 이 세포들은 길쭉한 실처럼 생겼는데, 이 ‘실’의 길이가 짧아지면 ‘수축’이라고 부르고 원래대로 돌아오면 ‘이완’이라고 한다.) 또, 수축과 이완이 반복되려면 근육의 가장자리가 어딘가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 장소가 바로 관절이다. 관절은 뼈와 뼈 사이의 빈 공간으로, 이 공간은 뼈보다 더 부드러운 연골과 뼈를 도와주는 인대로 채워져 있다. 이 관절의 형태에 따라서 움직임이 제한된다. 가령, 어깨 관절은 동그란 구 모양이라서 가능한 모든 움직임(회전)을 구현할 수 있다. 좌우, 전후, 내외(內外). 반면, 팔꿈치로는 전후와 내외의 회전밖에는 할 수 없다. 팔꿈치 관절의 독특한 모양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삼총사만으로는 운동을 설명할 수 없다. 뼈도, 근육도, 관절도 운동 자체를 야기하는 원인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동차가 아무리 매끈하게 잘 빠졌다고 해도, 시동키를 돌리지 않는다면 결국 움직이지 않는 고철덩어리에 불과하다. 우리의 몸도 마찬가지다. 신체의 시동키는 어디에 있을까? 물론 신경이다.

지난 회에서도 언급했지만, 감각 신경과 운동 신경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신호를 보낸다. 감각 신경이 감각 기관에서 시작해서 뇌에서 끝난다면 (이를 두고 우리는 ‘느낀다’고 한다), 거꾸로 운동 신경은 뇌에서 시작해서 근육에서 끝난다. 뇌에서 원하는 움직임을 근육/뼈/관절 삼총사가 실제로 구현해낼 때, 운동 신경의 ‘시냅스 경주’는 한 라운드를 끝낸다. 신경 신호가 어떻게 근육의 수축과 이완을 야기하는지는 예전 회에서 설명한 적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패스하겠다. 이번에 주목할 점은 뇌가 어떻게 운동 신호를 전송하느냐는 것이다. 미리 말하건대 이 과정은 자동차의 시동키를 돌리는 것보다 훨씬, 훨씬, 훠얼씬 더 머리 아프다(ㅎㅎ).

한 번의 몸짓, 수만 번의 연습

대뇌에서 운동 신호를 송신하는 장소는 크게 세 곳이다. 일차운동피질(primary motor cortex; corteza motora primaria), 전운동피질(premotor cortex; corteza premotora), 보조운동영역(supplementary motor area; área motora suplementaria)이다. 주요 동작은 일차운동피질이 책임지고 운동 신호를 보내고, 다른 두 영역은 좀 더 정교한 동작이나 정지 동작처럼 특수한 경우에 일차운동피질을 보조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 세 가지 대뇌 피질만으로는 부족하다. 운동 신호를 쏘아 보내는 것은 분명 이들이지만, 무슨 운동 신호를 선택할 것인가 혹은 어떻게 해야 최적의 움직임을 구현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셋이서만 단독으로 결정할 수가 없다. 여기에는 뇌의 또 다른 부분인 소뇌(cerebellum; cerebelo)와 기저핵(basal nucleis; nucleos basales)이 관여한다. 이들은 운동 피질들과 끊임없이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자세와 운동을 교정한다. 소뇌와 기저핵은 얼핏 보면 운동신경계와 별 상관이 없는 것 같다. 근육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 부분에 상해를 입는다고 해서 운동이 불가능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움직임이 반드시 우스워지게 된다. 균형감각을 담당하는 달팽이관에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닌데 몸이 기우뚱 무너지고, 책꽂이 맨 위에 꽂힌 노트에 손을 뻗을 때도 한 번에 효과적으로 닿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면서 헤매게 된다. 또, 동작들 사이의 연속성이 사라지면서 뻣뻣한 로봇처럼 어색해진다. 즉, 소뇌와 기저핵이 제 구실을 못한다면 우리는 멀쩡한 팔다리를 가지고도 운동의 세계 속에서 길을 잃게 된다! 그러나 이들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바로 교정 능력이다. 만약 어린 아이의 소뇌에 문제가 생긴다면, 이 아이는 수천 번을 넘어져도 어떻게 해야 넘어지지 않고 걸을 수 있는지 배울 수 없을 것이다.

근육에 신호를 보내는 운동피질, 그리고 그 밑에서 조용히 신호를 조율하는 소뇌와 기저핵. 이런 운동신경계의 배치는 운동에도 서로 다른 종류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바로 의식의 차원에서 직접 주문하는 동작과, 무의식의 차원에서 튀어나오는 몸짓이다. 의식적 운동이란 우리가 그때그때 한 생각을 그대로 구현하는 움직임이다. 이 운동 신호는 일차운동피질에서 출발해서 척추로 혹은 얼굴로 내려가는 신경의 길, 추체로(錐體路; pyramid tracts; vía piramidal)를 따라 전달된다. 추체로는 운동신경계의 고속도로로 굉장히 빠르다. 그리고 이 고속도로에 가장 많은 지분을 가지고 있는 기관은 다름 아닌 손과 입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손으로 일할 때와 입으로 말할 때 가장 많이 ‘의식적으로’ 운동에 신경을 쓰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생활하면서 모든 동작들을 세세하게 의식하지 않는다. 그래야 한다면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습관적으로 나오는 자세나 표정, 걷고 또 뛰는 방법, 혹은 위에서 언급한 균형감각이나 동작의 연속성 같은 것들은 우리가 평소에 굳이 생각하며 살지 않는 운동성이다. 이런 운동 신호는 소뇌와 기저핵이라는 ‘실질적 무의식’에 저장되어 있다가, 필요할 때마다 소환되어서 추체로에 합류하거나 다른 우회로를 통해서 근육에 전달된다. 다시 말해서 운동 패턴을 미리 떠놓은 다음, 각 상황마다 알맞은 패턴을 편리하게 골라 쓰는 것이다. 물론 이런 무의식적 몸짓만으로 생활이 가능하지는 않다. 우리가 몸으로 해내는 크고 작은 동작들은 전부 의식적 운동과 무의식적 운동의 합작이다. 그래서 운동피질과 소뇌와 기저핵은 서로 대화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이제야 운동이라는 게 얼마나 고차원적인 복합 예술인지 감이 오실 거다. 만화 영화에서 주인공이 대형 로봇의 몸체를 레버 몇 개와 버튼 몇 개로 조종하는 것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소리다. 내가 물을 마시려고 물컵을 향해 팔을 뻗을 때, 운동신경계는 나의 오른팔에게 ‘앞으로 뻗어!’라고 단순하게 지시하지 않는다. 물을 마시고 싶다는 내 의지, 소뇌 및 기저핵에 오랫동안 반복해서 새겨져 온 습관, 운동피질의 적극적인 신호 체계가 한꺼번에 작동하면서 그 찰나의 순간에 회의, 검토, 결제까지 마친 후 다 함께 최적의 운동 신호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합동 작전에는 근육 또한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그렇게 쏘아 보내진 운동 신호가 어떠한 이유로든 근육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렇게 신경의 길이 마지막에 끊기게 된다면, 결국 그 근육의 존재감은 운동신경계 내에서 지워지게 된다. 운동피질은 무의식뿐만 아니라 근육의 피드백도 받는 것이다. (이는 실제로 실험을 통해 증명되었다.) 운동신경계는 말한다. 뇌는 명령을 전달하기만 하는 컴퓨터가 아니고, 몸은 명령을 수행하기만 하는 로봇이 아니다. 움직인다는 것, 즉 산다는 것은 몸의 수많은 부분들이 다 함께 연출하는 예술 행위이다.

우리는 단 하나의 동작도 그냥 배우지 않았다

 운동신경계는 우리를 세상 속에 던진다. 그러나 거꾸로 우리는 이 운동신경계를 세상을 통해 다듬어왔다. 어떻게 소뇌와 기저핵은 그 수많은 동작 패턴을 ‘무의식’에 저장하게 되었을까? 어떻게 우리는 한 치의 오차 없이 책꽂이에 꽂힌 책을 뽑아들고, 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거침없이 뜀박질을 하고, 눈을 감고도 젓가락질을 하는 걸까? 연습했기 때문이다. 연습하고 또 연습하면서 운동신경계의 회로를 구축해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 하나의 동작도 그냥 배우지 않았다. 지나가고 잊혀져버린 유년 시절, 우리는 걸음마를 하다가 수없이 넘어지며 소뇌가 실수를 교정해 줄 때까지 기다렸다. 그렇게 ‘걸음마’가 기억되기를 기다렸다. 팔다리를 쫙 펴고 춤을 추는 법, 손가락으로 기타 치는 법, 성대를 움직여 노래하는 법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새로운 운동을 운동신경계 속에 새겨넣기 위해서 정성을 들이고 ‘신경을 쏟았다.’ 이처럼 소뇌와 기저핵 속에는 나의 땀, 근육, 기억이 녹아들어 있다. 단순한 손동작 하나, 발걸음 하나에는 나의 온 생애가 출렁이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동물로 태어날 뿐만 아니라 동물이 되는 법을 연습한다. ‘동물’이란 인간말종을 가리키는 욕이 아니라 명예로운 호칭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동물’이 보여주는 가장 경이로운 움직임은 변화를 멈추지 않고 계속 성장하는 신경계 그 자체다. 걸음마와 함께 신경계는 자라고, 산책과 함께 신경계는 튼튼해지며, 여행과 함께 신경계는 변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모든 과정을 통틀어 배움이라고 말한다. 배움은 멈추지 않는 이동이다.

정지와 마비의 차이

그렇다면 우리가 움직이지 않을 때는 어떨까? 운동신경계는 잠을 자게 되는 걸까? 물론 그렇지 않다. 정지 역시 운동 중 하나다. 근육은 휴식 상태에 있을 때도 일정한 수축 정도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것을 두고 근육 긴장 (muscular tone; tono muscular)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근육 긴장은 뇌의 거의 모든 부분들이 함께 조절한다. 가령, 근육 긴장의 자극 신호는 뇌교의 그물핵(renticular nucleus; núcleo renticular)과 앞서 본 일차운동피질, 소뇌 반구 등등이 보낸다. 반면 억제 신호는 연수의 그물핵과 일차운동피질을 제외한 모든 대뇌피질, 그리고 소뇌의 충부 등등이 보낸다. 이처럼 자극 신호와 억제 신호는 언제나 동시에, 또 항시적으로 보내진다. 이 둘이 플러스 마이너스 작용을 하면서 근육 긴장도를 늘 동일한 수준으로 조절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뇌의 한 부분에 문제가 생겨서 마비상태가 오면, 근육 긴장 신호의 균형 역시 깨져버린다. 억제 신호를 보내는 신경 회로가 끊어지면 근육의 긴장도가 높아지면서 경련 마비가 오게 되고, 거꾸로 자극 신호의 신경 회로가 끊어지면 근육이 맥을 못 추고 축 늘어지게 된다. 어느 쪽이든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는 몸 상태와는 크게 거리가 있다. 한마디로, 근육이 정지해 있는 상태는 뇌의 모든 부분이 가장 조화롭게 또 현명하게 협동하는 ‘운동 행위’이다. 쉬는 것이야말로 가장 내공이 높은 운동일지도 모른다.

오장육부도 쉼 없이 떨린다

이제 운동신경계 이야기는 다 끝난 걸까?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 역시 하나의 거대한 세계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 몸 속에서도 운동은 멈추지 않고 있다. 외부 세계를 향한 운동을 팔다리가 한다면, 내부 세계의 운동은 오장육부가 한다. 우리의 장기들은 우리가 잠든 순간에도 끊임없이 ‘떨리고’ 있다. 오장육부의 자율 운동과 이를 통째로 지휘하는 시상하부의 역할에 대해서는 다음 3편에서 계속 이야기 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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