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겸

연일 폭염이 이어지고 있다. 낮에는 이글거리는 태양을 이고 있어야하고 밤이면 식지 않은 열기에 잠을 뒤척인다. 이럴 때 정신 줄을 잠시라도 놓고 있노라면 딴 짓을 하고 있기 십상이다. 무더위에 멍한 정신으로 어떤 행동을 하고 나면 그 걸 내가 왜 했는지도 모를 때가 종종 있다. 술을 한참 좋아할 시절 어떤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1주일에 두세 번쯤은 퇴근 후에 술집에 가곤 했다. 우울한 감정을 해소하고 싶을 때도 있고 누군가와 고민을 나누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술을 마시고 싶은 욕구를 채우기 위한 그럴 듯한 이유를 붙이는 것에 불과했다.

‘어떤 행동을 내가 선택해서 하는가?’아니면 ‘행동을 하게 하는 주체가 없는가?’하는 물음은 철학의 오랜 주제였다. 그런데 니체는 주체를 부정했다. 주체라는 착각은 주어와 술어라는 언어의 구조로부터 나왔다. 충동이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들었고 자아는 뒤에 그럴 듯한 이유를 붙인다는 것이다, 술 마실 그럴듯한 이유를 찾아 붙였던 나처럼 말이다.

  따라서 ‘나’라는 주어가 ‘생각한다’는 술어의 조건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 된다. 그 무엇이 생각한다, 라고 할 때의 ‘그 무엇’이 저 오래되고 유명한 ‘자아’라는 주장은 완곡하게 표현해서 단지 하나의 가정이거나 주장일 뿐 ‘직접적으로 확실한 사실’이 결코 아니다.

《 프리드리히 니체 / 선악의 저편 / 아카넷 / 5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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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술을 마시고 싶은 욕구를 채우기 위한 그럴 듯한 이유를 붙이는 것에 불과했다.

니체는 자아가 행동한다는 생각은 착각일 뿐이라고 말한다. 충동이 자신의 행동을 이끌어 간다. 어떤 의미에서 신체는 충동을 실현하는 기계에 불과하다. 다양한 충동 중에 하나가 우위를 차지하게 되면 충동은 행동으로 표출된다. 또 니체는 신체가 큰 ‘나’라는 말도 한다. 자아는 큰 나의 작은 하나에 불과하다. 신체는 이성에 인도되지 않는다. 갑자기 바람이 불고 천둥 번개 치는 자연에 가깝다. 갑자기 다가왔다 사라지는 폭풍우처럼 자연은 자기 자신을 그대로 드러낼 뿐이다. 신체는 충동이 출몰하는 자연과 같다.

이런 의문이 든다. 사람이 충동에 따라 움직이기만 한 것이라면 그저 그 충동의 추종자가 되면 그뿐이라는 것일까? 그저 내키는 대로 막 살아도 좋다는 말일까?

충동에도 레벨이 있다.

충동이 신체로부터 출몰한다면, 어떤 신체에서 나온 충동이냐가 그 충동의 내용을 결정할 터이다. 약자의 신체로부터 나온 충동과 강자의 신체로부터 나온 충동은 다를 수밖에 없다. 가령 현대인들에게 가장 큰 욕구는 편안함과 안전함이다. 그것이 주어진다면 노예적인 일도 반복적으로 한다. 그것도 감사하면서. 그런 의미에서 현대인의 신체는 약자의 신체임이 틀림없다. 반면, 누군가 독특함을 드러내는 일을 할 때는 위험한 순간이면서 강자의 신체성이 필요한 순간이다. 지금까지와 다른 나를 만들고 싶은 욕구를 가진 사람들은 강자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어떤 충동으로 사는 지에 따라 그 사람이 강자인지 약자인지가 결정된다. 충동에도 레벨이 있다. 비천한 충동과 고귀한 충동은 분명하게 분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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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현대인들에게 가장 큰 욕구는 편안함과 안전함이다. 그것이 주어진다면 노예적인 일도 반복적으로 한다.

  주인도덕과 노예도덕 사이의 마지막 근본적인 차이는 다음과 같다. 자유를 향한 갈망, 행복에 대한 본능적 추구, 자유에 대한 민감함은 필연적으로 노예도덕과 노예의 덕성에 속한다. 반면에 섬세하고 열정적으로 경외하고 헌신하는 것이 귀족적인 사고방식과 평가방식의 한결같은 증후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열정으로서의 사랑 – 이것은 우리 유럽의 특징이다 – 이 왜 항상 귀족적인 기원을 가질 수밖에 없는지가 곧바로 분명해진다.

《 프리드리히 니체 / 선악의 저편 / 아카넷 / 368쪽 》

누군가 자기 능동성을 발현하여 독특성이 있는 한 생명으로 살아갈 수 있을 때 그는 고귀한 존재가 된다. 그저 시류에 떠밀려 살아지는 자라면 비천한 존재이다. 주인으로 살고자 하는 자와 노예로 살아지는 자는 근본적으로 다른 덕목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니체는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것들을 싫어하고 편안한 행복만을 추구하는 자는 노예도덕을 가진 자라고 했다. 반면 열정적으로 그 무엇에 헌신하는 것은 주인으로 사는 자의 충동이라고 했다. 독특한 자기로 살고자 하는 자는 다른 자기를 창출하는 고통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하고 또 다르게 살기 위한 열정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니체는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을 위해서 다른 충동을 제어할 수 있는 자야말로 주인으로 사는 자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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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을 위해서 다른 충동을 제어할 수 있는 자야말로 주인으로 사는 자라고도 했다.

어쩌면 하나의 주된 충동에 열정적으로 몰입하여 다른 충동들이 드러날 틈이 없는 것이 강자일 것이다. 자신을 극복하여 독특한 생명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충동이 다른 충동들을 제어 했으리라. 나에게도 간절한 바람을 이루기 위해 다른 욕구들이 떠오르지도 않는 순간이 있었다. 그 순간만은 강자로 살았던 것은 아닐까?

강자는 강자만을 알아본다.

  칭찬을 할 때 항상 단지 자신의 맘에 들지 않는 것만을 칭찬하는 사람이라면, 세련되면서도 고귀한 자기 통제의 능력을 지닌 사람이다.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것만을 칭찬하는 경우에는 결국 자기 자신을 칭찬하는 것이며 이는 좋은 취미에 거슬리는 것이 된다. 물론 이러한 종류의 자기 통제는 끊임없이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은근한 원인이 된다.

《 프리드리히 니체 / 선악의 저편 / 아카넷 / 400쪽 》

니체는 칭찬에 대한 묘한 말을 한다. 자기 자신에게 마음에 들지 않은 점을 칭찬을 할 수 있는 것은 고귀한 능력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훌륭한 행동을 보았더라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것을 칭찬하기는 쉽지 않다는 걸 안다. 생각해 보면 회사에서도 친근감이 드는 친구들만을 칭찬을 하게 된다. 니체는 만일 마음에 드는 것만을 칭찬한다면 그건 자신을 칭찬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렇지만 자기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을 칭찬하는 건 지금의 자기를 극복하지 않으면 하기 힘든 행동이다. 나에게 익숙하진 않지만 그 사람을 드러내는 특출한 것이라면 칭찬을 해보자. 그때 그의 장점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강자는 강자를 알아본다. 그렇기에 내가 가지지 않은 상대의 장점을 발견하고 쉽게 배울 수 있다. 약자는 다른 사람의 고귀한 점은 보지 않고 천박한 점을 쉽게 포착한다. 내 안에 강자가 나로 살아가려면 상대의 강자와 만나야 한다. 때로는 강자와 만나 대결하고 그 대결로부터 배울 수 있어야 한다. 강자와 만나 대결하면서 그 대결로부터 배우면서 우정을 나눈다. 만일 그가 약자라면 같이 할 시간이 없다. 그저 스쳐지나가기만 하면 된다. 왜 우리는 약자를 만나면 멈춰 서서 ‘동정’이나 하고 있는 것일까? 하필이면 우리는 약자를 더 만나고 싶어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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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강자가 나로 살아가려면 상대의 강자와 만나야 한다. 때로는 강자와 만나 대결하고 그 대결로부터 배울 수 있어야 한다.

강자를 만나고 싶어 하는 충동, 강자로부터 배우고 우정을 나누려는 충동이 강자의 충동이다. 자기에게 만만하거나 편안하게 느껴지는 사람들 보다는 자신이 배울 수 있고 부딪쳐 볼 수 있는 사람들과 지내고 싶은 충동이 그를 지배한다. 자기를 바꾸지 않고도 편하게 지내고 싶은 충동, 상대의 약자성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자기보존의 이유를 찾고자 하는 충동은 약자의 충동이다.

이런 생각이 든다. 강자는 고귀해지기 위한 충동, 그 하나의 주된 충동으로 사는 사람이다. 어쩌면 그 충동을 위해 다른 충동들을 제어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그를 위해 주변의 모든 것을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야말로 이기주의자라고 할 만하다. 자신의 가장 주된 욕구를 위해서 다른 모든 것을 활용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진정 자기를 위해 사는 삶은 고귀하게 살고자하는 충동을 주된 욕망으로 삼을 때 얻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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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彬
Guest
moon彬

강자의 칭찬과 약자의 칭찬이 재미있는 부분인 거 같아요! 그 부분을 읽으면서 저는 제가 이해할 수 없는 성격을 소유한 친구, 그리고 저와 생체 리듬이 달라서 매일 삑사리나는 친구가 생각났어요 ㅋㅋ 그 친구가 뭘 잘하고 있어도 뭔가 칭찬하기 싫고 찝찝하고 의심했던 제 마음이 떠오르네요! 하지만 그런 것을 극복해서 상대방을 칭찬하고 상대방에게 배울 수 있어야 강자이군요!

김재겸
Guest
김재겸

네 칭찬의 방식에도 신체성이 있다는 니체의 통찰은 놀라운 면이 있습니다. 저도 쉽게 마음에 들어하는 부분들만 칭찬하게 되거든요. 내 맘에는 안들더라도 상대의 강자적인 면을 칭찬할 수 있도록 연습하는 중입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