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혜숙(감이당, 금요대중지성)

사랑하는 자 때문에 슬픔이 생겨나고 사랑하는 자 때문에 두려움이 생겨난다. 사랑을 여읜 님에게는 슬픔이 없으니 두려움이 또한 어찌 있으랴.(법구경, 게송212)

애착 때문에 슬픔이 생겨나고 애착 때문에 두려움이 생겨난다. 애착을 여읜 님에게는 슬픔이없으니 두려움이 또한 어찌 있으랴.(게송213)

지난 번, 아들과 손녀를 잃고 괴로워하는 재가신도 아버지와 비싸카에게 부처님이 설하신 게송입니다. 요지는 ‘사랑과 애착 때문에 슬픔과 두려움이 생겨나니 사랑과 애착을 버리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듣고 뭔가 깨우친 것 같은 그들. 부처님 말대로 그들은 사랑과 애착에서 떠날 수 있었을까요? 여의었다는 건 버리고 떠난다는 말입니다. 그들을 상실의 고통으로 밀어 넣었던 사랑과 애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말입니다. 과연 어떻게? 사랑과 애착이 그렇게 쉽게 떠날 수 있는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허나, 부처님이 해법으로 제시한 길이니 따라가다 보면 우리도 일말의 깨우침을 얻지 않을까요. 부디…^^;

탐욕의 다른 이름, 사랑과 애착

‘사랑과 애착’하면 자연스레 부모와 자식 간의 마음이 떠오릅니다. 빠따짜라도, 끼싸고따미도, 재가신도도, 비싸카도 모두 자식을 잃고 애통해 하는 부모들이죠. 그러니 그들의 마음, 자식에 대한 부모의 마음으로 ‘사랑과 애착’이란 것에 대해 생각해볼까요.

흔히 자식들에 대한 애정을 말할 때, 열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 있냐고 합니다. 아픈 건 부인할 수 없지만 아픔의 강도는 다 다르지 않을까요. 순수한 모성이란 없듯이 자식에 대한 마음도 ‘순수한 그 무엇’은 없습니다. 해 주는 것 없어도 예쁜 자식이 있고, 이유 없이 미운 자식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감정이 한결 같은 것도 아닙니다. 예뻤던 자식이 자라면서 웬수가 따로 없구나 싶기도 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다반사죠. 모두 다 그때그때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욕망과 마음이 있을 뿐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자식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있냐고요? 표현방식만 다를 뿐이라고요? 주변을 조금만 둘러봐도 그 말은 진실이 아님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자식을 버리고 죽이고 폭행하는 흉흉한 소식은 차치하고라도, 사랑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일방적인 ‘자식 사랑’이 보통 우리네 모습입니다. 그것 또한 말이 사랑이지 폭력에 다름 아닐 터입니다. 보통 자식이 부모의 욕망과 바램을 만족시켜줄 때 자식을 사랑하고 애착합니다. ‘사랑과 애착’이 탐심인 이유입니다. 아니 마음에 들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다고요? 네, 그럴 수 있지요. 그런데 왜 부처님은 사랑과 애착을 여의라 했을까요?

무지가 탐욕과 분노를 일으키는 원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탐진치를 안고 태어난 존재들입니다.

불교 공부를 하고 놀랐던 것의 하나가 탐진치貪瞋痴에 대한 정의였습니다. 탐욕은 어떤 거창한 것을 탐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계속되길 바라는 마음, 그것이 탐욕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계속 내 곁에 있어주길 바라는 마음, 지금의 좋은 상태가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 이런 게 탐욕貪입니다. 반대로 싫어하는 걸 밀어내고 거부하는 마음이 성내는 마음, 분노瞋입니다.

언뜻 좋아하는 게 이루어지길 바라고 싫어하는 걸 밀어내는 건 당연한 거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건 당연한 게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실상과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매 찰나 인연조건에 따라 변하는 게 세상존재의 실상이라 했습니다. 이 존재의 실상을 모르는 게 무지, 어리석음痴입니다. 애초에 좋고 싫고를 분별하는 마음도 무지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니 무지가 탐욕과 분노를 일으키는 원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탐진치를 안고 태어난 존재들입니다.

원하는 걸 붙들고 고정시키려는 마음인 탐욕은 이제 그 대상에 달라붙어 고착됩니다. 애착하는 거지요. 우리가 달라붙어 애착하고 있는 게 어디 사람에게 뿐인가요. 집에, 일에, 먹는 것에, 돈에, 명예에, 인정욕망에, 심지어 공부에도… 그러고 보니 우리는 이렇게 뭔가에 달라붙어 바라고 원하는 것의 힘으로 살아가는군요. 사랑과 애착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은 이유입니다.

사랑과 애착은 슬픔과 두려움을 낳고

사랑하고 애착하는 것은 내 삶에 의미를 줍니다. 기쁨, 성취감, 만족감, 행복감… 따위를 주기도 하죠. 우리는 대개 이 한 면만을 보고 붙들고 살아갑니다. 한 때 ‘소확행’이란 말이 유행했었죠.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일상에서 자기만의 확실한 행복거리를 갖고 있다는 건 언뜻 정말 ‘확실한’ 행복을 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그것에 애착하는 마음이 있는 한 과연 ‘확실한’ 행복이라 할 수 있을까요. 자식을 잃고 비탄에 잠긴 법구경 인연담 속 부모들 역시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자식들이 살아있어 주기만을 바랐을 수 있습니다. 그들의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었을 겁니다.

부처님은 말합니다. 크건 작건 자신의 욕망에서 비롯된 사랑과 애착은 슬픔과 두려움의 원인이 된다고. 모든 것은 변하고 영원한 건 없습니다. 지금 내게 기쁨과 행복을 주는 것이 언젠가는 슬픔과 불행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게 부처님이 말하는 무상함의 진리입니다. 기쁨 속에 슬픔이, 행복 속에 불행이, 삶 속에 죽음이 함께하는 건 변치 않는 진리입니다. 의식을 하든 못하든 무상성이 내재된 몸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미래를 생각하고 불안해하는 동물입니다. 그러니 애착과 집착이 강할수록 그것을 잃을까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마음도 커지는 건 당연지사 아닐까요.

원치 않는 것을 밀어내는 마음이 분노라 했습니다. 슬픔이나 우울은 분노가 자신을 향해 표출되는 수동적인 방식이지요. 재가신도와 비싸카의 경우처럼요. 이와 달리 분노의 감정이 외부로 향하면 폭력으로 나타납니다. 사랑과 애착 때문에 행해지는 수많은 폭력들을 우리는 매일 접하고 있습니다. 자식에게, 가족에게, 연인에게… 이렇게 애착의 강도가 깊을수록 그 반대급부로서의 고통 또한 깊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들과 손녀를 잃은 재가신도 아버지와 비싸카의 슬픔 속에는 이렇게 사랑과 애착이라는 이름의 탐심貪心과 진심瞋心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들뿐인가요. 가족을 몽땅 잃은 빠따짜라, 자식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끼싸고따미의 눈물과 비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렇듯 무지와 탐욕과 분노의 다른 이름이 사랑과 애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런 사랑과 애착을 여의고 떠나라 합니다. 그래야 슬픔도 두려움도 없다고. 이제 어떻게 그로부터 떠나 해방되는가, 그 길을 갈 차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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