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연

현재 나는 임신31주차로 곧 출산을 앞두고 있다. 그동안 내게 임신과 출산은 ‘고통’으로 정의되는 것이었다. 나는 대부분의 여성들로부터 임신으로 인한 온갖 불편, 변해버리는 몸, 특히 출산에 대한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들어왔다. 단 한명도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서 어떤 면이 좋았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출산이라는 미지의 세계는 내게 공포이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고통 없이 출산할 수 있는 무통 분만을 마음먹었다. 그런데 출산을 2달 앞둔 시점에서 ‘자연주의 출산’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촉진제나 무통제 투여, 회음부 절개 등의 의료적 개입을 최소화하고 여성의 본래적 감각으로 출산하는 것이다. 나는 친구들에게 자연주의 출산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들은 아무도 나의 의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왜 사서 고생을 하냐며 무조건 ‘무통 분만’을 하라며 나를 말렸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제3논문, ‘금욕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서 ‘고통’을 다룬다. 우리는 왜 금욕적 이상에 매달리는가? 니체는 이 지점을 밝히려 했다. ‘금욕적 이상’이란 삶을 고통으로 보고 괴로워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고통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다 출산을 바라보는 관점이 금욕적 이상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의 여성은 자신이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출산의 지혜를 부정한다. 임신과 출산을 ‘병’이자 ‘고통’으로 해석한다. 여성은 스스로의 본능에 무지하고 자기의 몸을 포기한 채 의사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 나 또한 한 번도 이 생각의 연쇄를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쩌다 우리는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을 고통으로만 사유하게 되었을까? 왜 고통은 제거해야 할 것이 되었나? 고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삶에 대한 자신의 주도권을 포기하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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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고통은 제거해야 할 것이 되었나? 고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삶에 대한 자신의 주도권을 포기하고 있는 건 아닐까?

진통제를 권하는 사회

  강하고 성공한 자는 딱딱한 음식물을 삼켜야 할 때조차 자신의 식사 때 먹는 음식을 소화시키듯이 자신의 체험(행위와 비행을 포함하여)을 소화시킨다. 그가 어떤 체험을 ‘처리’하지 못한다면 이런 종류의 소화불량은 저 음식물의 소화불량과 마찬가지로 생리적이며-그리고 정말이지 저 음식물의 소화불량으로 인한 결과들 중의 하나이다.

<도덕의 계보, 182P, 연암서가>

니체는 고통을 해석하는 관점을 ‘소화불량’ 상태에 비유한다. 튼튼한 위를 가진 사람은 어떤 음식도 소화시킬 수 있지만 약한 위를 소유했다면 그렇지 못하다. 비위가 약한 사람은 여행에서 현지식을 먹는 것을 꺼려하고 배탈이 날 가능성이 높다. 한마디로 새로운 것, 낯선 것을 소화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강자와 약자가 갈린다. 마찬가지로 어떤 체험, 사건을 소화할 수 없는 신체는 이러한 경험들에서 불쾌감을 느낀다. 낯선 체험이 위장을 뒤집어 놓는 것이다. 기존의 해석 체계에서 어떤 사건이 해석 불가능할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우리는 당혹감과 불쾌감을 느낀다. 이때 우리는 불쾌함을 빠르게 정리하고 안정감을 찾으려 한다. 위장이 괴롭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빠른 방법은 약을 복용해 위장을 진정시키는 것이다. 느린 방법은 지금부터라도 위장을 튼튼하게 만드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다. 하지만 빠른 방법을 사용하면 할수록 체험에 대한 면역력은 약해질 것이다. 경험으로 쌓이게 될 다양한 대처능력, 자신감 또한 생기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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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고통을 해석하는 관점을 ‘소화불량’ 상태에 비유한다.

나는 문득 우리의 일상 곳곳에 진통제가 권유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 선생님, 친구 등 주변의 사람들은 우리가 삶에서 겪을 불편함을 최소화하기를 원한다. 인서울 대학, 정규직, 공무원을 꿈꾸는 것은, 삶에서 덜 방황하고 안정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친구, 학교, 직장에서 번잡스러운 일을 겪지 않도록 부모가 모든 것을 셋팅한다. 아이가 겪을지 모를 불쾌감을 사전에 제거한다. 혹여 아이가 불편함을 느낀다면 약을 먹여 빠르게 고통을 최소화시킨다. 이 과정에서 아이들은 삶을 겪어내는 능력, 문제를 처리하는 능력, 자존감을 키워갈 기회를 상실한다. 출산에 대한 반응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아이만 낳으면 되지 힘든 고통은 겪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당연히 촉진제, 마취제를 맞아야 한다는 반응, 전문가인 의사에게 맡기라는 반응, 혼자 유난 떨지 말라는 반응은 스스로가 사건을 겪어 낼 능력을 차단시키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의 일상에 스며든 금욕주의적 모습들이다. 낯선 것은 우리를 긴장하게 만든다. 하지만 무엇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부정되거나 제거해야 할 것이 되는 것은 이상하다. 나는 누구보다 겁도 많고 엄살도 심하다. 정해진 길을 걸으며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랐고 현재의 위치를 벗어나는 것을 지극히 두려워했다. 그래서 삶은 안정됐지만 이상하게도 활기가 부족했고 일상은 지루했다. 그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다. 나에게는 겪어내는 능력이 부재했다. 무엇을 겪음으로서 생성되는 다양한 감정, 고민, 고통 등이 그 자체로 삶의 활기가 된다는 것을 몰랐다. 이것들은 자신에 대한 자긍심을 만들고 일상을 풍요롭게 만든다. 하지만 나는 경험하지 않기에 느낄 수 없었다. 겪음에 대한 공포, 겪음에 대한 무능력은 더욱 진통제에 의존하게 만들었다.

강자가 체험을 소화하는 능력을 키워갈 때, 약자는 소화 능력을 돌보지 않는다. 약자의 관심은 불편함을 최소화하는 것에 집중돼 있다. 작은 일도 소화하지 못하니 점점 더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커진다. 그래서 체험 자체를 부정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삶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 감정, 고통을 부정적인 것으로 만들어 자신이 겪을 수 없게 만드는 것, 이것이 금욕주의자들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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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일도 소화하지 못하니 점점 더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커진다. 그래서 체험 자체를 부정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자신의 고통을 욕망하는 사람들

  왜냐하면 금욕적 삶이란 하나의 자기모순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비길 데 없는 원한이, 즉 살아있는 어떤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삶 자체, 그 삶의 더없이 심원하고 강력하며 가장 밑바닥에 있는 조건들을 지배하고 싶어 하는 탐욕스런 본능과 힘에 대한 의지의 원한이 지배하고 있다. 여기서는 힘의 원천을 폐쇄하기 위해 힘을 사용하려는 시도가 행해진다. 여기서는 생리적인 발육 자체가, 특히 그 발육의 표현이나 아름다움이나 즐거움은 따가운 눈총을 받게 된다. 반면에 잘 되지 못한 것, 발육부전, 고통, 재난, 추한 것, 자발적인 희생, 자아 상실, 자기 탄핵, 자기희생에 대해서는 만족감을 느끼거나 추구한다. 이 모든 것은 지극히 역설적이다.

<도덕의 계보, 165P, 연암서가>

니체는 금욕주의자들은 ‘힘에 대한 의지의 원한’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여성의 출산을 생각해보자. 여성이 가진 힘의 의지, 창조의 대표적 예는 출산이다. 나와 낯선 것이 섞임으로서 탄생하는 생명체, 우리 모두는 창조의 능력을 가진 여성이다. 우리는 내가 아닌 것과의 섞임을 통해서만 현재의 나를 뛰어넘는다. 그런데 오늘날의 우리는 자신의 여성성, 힘의 의지를 부정한다. 자신에게 그러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자신은 부족하므로 의사에게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출산 과정에서 자신의 힘과 주도권을 포기한다.

비단 출산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을 부족하고 결핍된 존재로 상정한다. 이것은 악순환의 반복이다. 사건을 겪지 않으니 작은 일에도 큰 데미지를 받는다. 그러니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거나 부모님을 원망하고 전문가를 찾거나 진통제에 의존하게 된다. 니체는 이러한 모습이 힘의 의지의 원천을 부정하고 폐쇄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자신의 힘의 의지를 펼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아닌 스스로가 스스로의 힘의 의지가 발현될 수 없도록 부정하며 폐쇄하고 있는 것이다.

니체는 이러한 금욕주의적 모습을 ‘자기모순’이라고도 표현했다. 금욕주의자들은 삶을 두렵고 고통스러운 것으로 바라본다. 자신은 결핍된 존재이기 때문에 삶을 겪어낼 능력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어떤 사건이 오면 현재의 내 능력치만큼 겪으며 아파하고 성장하면 된다. 근데 사실은 조금도 혼란스럽거나 아프고 싶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실제의 고통보다는 상상의 고통 때문에 괴로워한다. 이러한 모습을 니체는 스스로의 고통, 무지, 자기포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괴롭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벗어나지 않으며, 두렵다고 말하면서 그 상황에 계속 있으려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진정 모순이다. 금욕주의자들은 자신의 지속적인 무능력, 고통 상태를 욕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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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롭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벗어나지 않으며, 두렵다고 말하면서 그 상황에 계속 있으려하기 때문이다.

강자들의 세계에서 고통은 덕이었다. 낯선 것과의 섞임을 통한 고통은 창조의 필수 과정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넘치는 힘의 의지와 펄떡이는 생명력으로 항상 현재의 자신을 뛰어넘고자 했다. 이것이 우리의 본능이다. 반면 금욕주의자는 힘의 의지가 퇴화해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삶을 겪지 않기 위해서 오히려 자신의 고통을 욕망한다. 결국 ‘너무 아파, 힘들어, 고통스러워’라는 말 뒤에는 ‘아무것도 경험하고 싶지 않아’, ‘변하고 싶지 않아’, ‘낯선 것과 섞이기 싫어’라는 단호한 의지가 숨어있다. 금욕주의자는 병들어버린 삶의 본능을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병든 채로 살아가기를 절실히 원하는 것이다.

고통의 의미

니체는 ‘금욕주의적 이상’을 통해서 왜 우리가 스스로의 고통을 원하고 있는지 밝혔다. 우리는 너무 연약해서 낯선 것에 대한 소화력이 부족하다. 주변에는 우리가 겪지 않도록, 낯선 길을 가지 않도록, 힘의 의지를 포기하도록 도와줄 온갖 제도와 유혹이 넘친다. 삶을 진통제가 필요한 것으로 만드는 사회, 자신을 부족하고 결핍된 존재로 만들어 힘의 의지를 폐쇄하려는 사람들, 우리는 금욕적인 사회에서 철저한 금욕주의자로 살고 있다. 우리는 삶은 고통이라고 핑계를 대면서 사실은 스스로의 고통 상태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출산에 대한 나의 공포로 돌아가 보자. 나는 출산을 고통으로만 바라봤기에 마취제를 원했다. 하지만 이러한 나의 모습은 여성의 본능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됐으며, 내가 가진 힘의 의지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글을 쓰면서 출산을 고통 이외의 관점에서도 바라보게 되었다. 출산은 고통이 따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출산의 고통은 현재의 나를 ‘아이’라는 세계와 접속하게 만든다. 그 접속을 내 생명력으로 온전히 겪어내는 것, 고통을 통해 현재의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출산은 낯선 체험을 포용하면서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을 키우는 인생 최대의 사건인 것이다. 나는 여전히 출산이 두렵고 무섭다. 하지만 출산을 통해 마주하게 될 나의 힘과 잠재력, 달라질 세계의 모습이 궁금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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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을 통해 마주하게 될 나의 힘과 잠재력, 달라질 세계의 모습이 궁금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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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彬
Guest
moon彬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것을 겪지 않기 위해 피하려고만 했던 제 모습이 떠오르네요~
강자는 오히려 고통에 대한 소화력을 키워나간다니~! 그리고 그 고통이 변화와 창조와 연결되다니! 놀랍네요~!
고통을 어떻게 피해갈 수 있을까가 아니라 고통을 어떻게 소화해낼까를 더 고민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보연
Guest
보연

프로댓글러 문빈!! ㅎㅎ난 언제나 피해가는 길을 선택해왔는데 어떻게 소화할지를 보려니 쉽지가 않구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