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란(감이당 금요 대중지성)

오늘은 먼저 <무소의 뿔>경에 얽힌 짧은 이야기 하나를 소개할까 한다.

인도의 옛 도시 베나레스에 한 왕이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일찍 산책을 하던 왕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그의 눈길은 한 어부의 그물로 향해 있었다. 어부는 그날의 낚시를 마치고 뒷정리를 하던 참이었다. 그는 늘 하던 대로 잡은 물고기는 작은 가지에 꿰어 걸고, 그물은 큰 나뭇가지에 펼쳐 말렸다. 왕은 무심히 바람에 펄럭이는 그물을 보았다. 그리고 그 옆에 꿰어진 물고기로 시선을 옮긴 순간 왕에게 이런 생각이 일어났다. ‘저 물고기를 빠져나가지 못하게 가두고 옭아맨 것은 저 그물이 아닌가? 그런데 보라, 바람은 그물에 아랑곳하지 않는구나!’ 왕은 ‘나도 언젠가는 저 바람처럼 어떤 그물에도 걸리지 않고 가리라.’고 생각하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 이야기는 다들 어디선가 한번쯤 들어보셨을 “바람에 걸리지 않는 그물”이라는 멋진 구절의 배경이 되는 인연담이다.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 강원도 황태덕장을 뻘로 지나친 자신이 새삼 한심해진다. 그런데 이 왕, 어딘가 친근하다! 지금 당장 깨닫겠다고 출가를 결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이라니~~ 이거슨 ‘내일부터 열공’의 자매품?^^ 하지만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를 더 읽으면 알게 된다. 이 분도 곧 깨달으셨다는 사실을….. 그 사실을 알고 나자 바로 또 ‘역시 불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금새금새 깨닫는 대단한 분들’이라며 거리감이 든다. 아니 요즘 유행하는 박탈감이라고 해야 하나? 우리는 왜 이렇게 끊임없이 자신과 비교하면서, 좋아했다 싫어했다 하는 걸까?

좋은 느낌은 없다

우리는 어떤 이야기도, 어떤 대상도 그냥 있는 그대로 보는 법이 없다. 방금 이 짧은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도 ‘이 사람, 나랑 비슷하네? 아니야, 그게 아니었어. 나와는 다른 차원의 사람이었어.’라며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했듯, 우리의 마음은 부지불식간에 오만 느낌을 뭉게뭉게 지어낸다. 꽃구름 애기구름 코끼리구름 토끼구름, 구름 모양이 오만 가지이듯 우리 느낌도 오만 가지이다. 물론 비교나 기대, 판단이 꼭 필요한 경우도 있다. 하지만 가만 보면 정말 상관없는 일에도 우리는 계속 마음을 쓴다.

불교에서는 이 오만 가지 느낌을 확 싸잡아서, 셋으로 딱 정리해준다. 쾌와 불쾌, 그리고 쾌도 불쾌도 아닌 느낌 요렇게 말이다. 이 세 가지 느낌이야말로 우리가 늘 붙들리는 그물이다. 쾌 – 좋은 느낌을 주는 대상을 욕망하고, 불쾌 – 싫은 느낌을 주는 대상을 혐오하고, 쾌감도 불쾌감도 일으키지 않는 대상에 대해서는 뭐가 있었는지 흐릿하게 인식하거나 아예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란, 이 각각의 느낌이 우리에게 일으키는 즉각적 반응양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탐욕, 분노, 어리석음은 불교에서 3독(毒)이라 불리운다. 느낌은 다 독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느낌 중 좋은 결과를 가져 오는 것은 하나도 없는 셈이다! 헐.

‘아니, 휠링feeling 없는 세상을 어찌 살라고! 느낌은 그물이요 삼독이라니, 불교는 왜 맨날 이렇게 재미없고 부정적인 얘기만 하는 거냐!’ 뜨악해 하는 목소리가 마구 들린다마는 워워~ 이런 반발심에는 느낌 없는 삶은 무미건조하다, 즉 느낌, 감정에 따라 사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전제가 두툼하게 깔려 있지 않은가 확인해봐야 한다. 게다가 불교가 느낌을 소거하라고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매사에 즉각적으로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할 뿐. 물론 이 느낌이 보이지 않는 그물이 되어 우리를 조이고 있다고 보는 것 또한 사실이지만, 이 사실을 받아들일지 여부는 우리가 선택할 문제다.

언제나 느끼는 자동평가자

야릇한 제목이지만^^;; 불교에서 보는 우리는 이런 존재다. 그리고 현대의 뇌과학이나 심리학 또한 이 점에 주목하고 있다. 우리는 언제나 어디서나 느낀다. 이 느낌은 자기에게 좋은지 나쁜지, 혹은 주의를 기울일 필요조차 없는지에 대한 가치평가이다. 배우자를 택할 때, 살 곳을 정할 때 우리는 그런 자신의 느낌에 대해 매우 자각적이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너무 반복해서 말하는 것 같지만 우리는 언제나 매번 느낌에 사로잡혀있다. 예를 들어 지금 나는 의자에 앉아 노트북 자판을 치고 있다. 옆에는 연두색 형광펜과 이면지 몇 장이 널려 있다. 이 소소하고(노트북은 제외) 별 의미 없는 사물들에 대해 좋거나 싫거나 좋지도 싫지도 않은 느낌을 갖고 있다니? 정말 그런가? 음, 형광펜은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때그때 달라지긴 해도 늘 제일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색깔의 펜을 고른다. 아니 꽤 공들여서 매번 그런다. 그러니 이 연두색은 ‘책 내용과 딱 맞는 색깔의’ 형광펜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면지는 아니지 않나? 가만 생각해보니 이것도 아까 여러 이면지들 가운데 좀 더 빳빳하고 스테이플심이 박히지 않은 것을 선택했으니 이 종이들은 ‘더 깨끗하고 글쓰기 좋은’ 이면지이다. 

이렇게만 쓰면 누구나 특정 분야에 대해서는 좋고 싫은 느낌이 발달하기 마련 아니냐는 반론의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이쯤에서 권위자의 얘기를 빌려오고자 한다. “일상의 지각과 인지 중에 뜨겁거나 미지근한 감정적 요소를 갖지 않은 것은 거의 없을 것이다.” 1980년 심리학자 로버트 자이언스의 말이다. 자이언스는 모든 인간은 ‘자동적 평가자’라고 말한다. “우리는 일몰, 낙뢰, 꽃, 보조개, 손거스러미, 바퀴벌레, 키니네의 맛, 소뮈르 포도주, 움브리아 지방의 흙 색깔, 42번가의 교통 소음, 1000헤르츠 진동수의 소리, 영어 대문자 Q를 대할 때도 느낌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반응한다.”(<불교는 왜 진실인가>, 로버트 라이트, 마음친구)

자이언스가 열거한 리스트들을 읽노라면 시적인 정취가 느껴진다. 이 순간, 나는 이 문장을 ‘좋다’고 느꼈고 이 좋은 느낌에 대해 탐심을 일으켰을 것이다. 아, 나라는 존재는 그동안 정말 바빴겠구나! 매순간 좋은 것을 끌어당기고 싫은 것을 밀쳐내며 필요 없는 것은 무시하는 일, 이것은 엄청난 작업이 아닌가. 어쩐지, 아무 것도 안 해도 때만 되면 배가 고프더라니!

그렇다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이 된다는 것은 이런 인간의 조건을 뛰어넘어 느낌을 소거한 인간이 되는 것일까? 나는 그게 가능한 일일 것 같지도 않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매사에 ‘자동평가자’로서 반응하며 살고 있었다는 사실과 이게 어마무시하게 피곤한 일이라는 것에 대해 약간 감이 온다. 그리고나니 이제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생긴다. 이 상태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살 수 없을까? 물고기가 아닌 바람, 그 경지를 알고 싶다는 바램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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