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겸

우리는 무엇에는 이끌리고 다른 무엇에는 끌리지 않는다. 어떤 충동에 이끌리다 보면 불쾌감마저 느낀다. 사람들마다 그 쾌‧불쾌의 감각은 다르게 작동한다. 힙합 음악에 끌리는 이가 있는 반면 그것을 시끄러운 소음으로 감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한 사람이 가지는 취향은 그 사람의 독특성을 나타내 준다고 생각한다. 나는 냉면을 좋아하고 비빔밥을 싫어하는 음식 취향을 가지고 있다. 나의 음식에 대한 취향은 몸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치부해 버린다. 그건 마치 태어나면서부터 몸과 하나인 속성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취향’이라 부르는 것들도 변해 왔다. 어렸을 때는 선짓국이 그렇게 싫었다. 어머니는 가난한 살림살이에도 단백질을 보충할 지혜를 구했다. 값싼 선지는 일주일에 한 번쯤 먹을 수 있는 고기의 대안이었다. 난 선짓국의 피 비린내가 싫었다. 꾸역꾸역 먹는 국 한 그릇이 곤혹스럽기만 했다. 그런데 중년이 되면서 선짓국은 좋아하는 음식이 되었다. 신선한 재료를 사용한 선짓국은 최애 음식 중 하나다. 글에 대한 호불호도 변하고 음악에 대한 감각도 변한다.

생각해 보자. 취향은 어떤 충동에 대한 그 사람의 가치평가다. 그렇기에 취향은 삶의 결정적 변수가 된다. 끌리는 음악을 들으며 살고 좋아하는 음식은 자주 먹게 된다.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순간에도 무엇에 끌리는지 무엇은 피하고 싶은지는 큰 변수가 된다. 취향은 삶의 결정적 순간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그 취향이 변화한다. 어떤 영향에 의해 변하는 것이다. 취향이 달라졌다는 건 가치평가의 기반도 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취향 이상이 아닐지 모른다. 취향이 생활에서 행동을 이끌고 결정의 중요한 변수가 되기에 그것은 우리 운명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취향을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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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이 생활에서 행동을 이끌고 결정의 중요한 변수가 되기에 우리 운명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충동은 어떻게 취향이 되는가?

  이 충동 자체에는, 모든 충동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성질뿐 아니라 어떠한 도덕적 성질도 없으며 더욱이 그것에 수반되는 쾌‧불쾌라는 특정한 감정도 없다. 이 모든 것이 비로소 제2의 본성으로서 이 충동에 더해지게 되는 것은, 이 모든 것이 이미 선과 악으로 명명된 충동들과 관계될 때나, 민중에 의해 이미 도덕적으로 확정되고 평가되는 존재들의 성질로 인정될 때다.

《 프리드리히 니체 / 아침놀 38 / 책세상 / 52쪽 》

우리는 충동 덩어리다. 강렬하게 먹고 싶다가 어느 순간 잠이 쏟아지고 누군가를 만나고 싶기도 하다. 그러다 매사가 귀찮아지고 어떤 사건 앞에서 두려워지기도 하다. 식욕이나 성욕, 수면욕, 인정 욕구까지 충동이 일어나지 않는 나를 상상이나 할 수나 있겠는가? 니체의 말처럼 충동 자체에는 도덕적 판단, 쾌‧불쾌의 감정이 묻어있지 않다. 선악이나 좋고 싫음의 가치판단도 없다. 충동에 대한 해석과 평가가 가치 판단을 만든다. 가령 기독교는 성욕에 죄라는 가치 판단을 더한다. 동정은 선이라고 판단한다. 그런데 궁금해진다. 우리는 무구한 충동에 어떻게 가치 판단을 하게 되는 것일까? 어떻게 어떤 충동은 선이고 어떤 충동은 악이라는 판단을 내리게 되고, 어떤 충동에서는 쾌감을 느끼지만 어떤 충동에서는 불쾌감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가치 판단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관습이다. 부모는 호불호의 표정으로 자식들의 행동의 취향을 결정한다. 심리적 방식으로 가치판단이 유전되는 셈이다. 사회에서 취향을 만드는 것은 그 공동체의 가치판단인 도덕이다. 도덕이 서 있는 기반은 관습이다. 결국 그 사회의 관습이 만들어낸 가치 판단이 나의 취향을 결정한다.

몇 일전 아들의 신병교육대의 수료식에 다녀왔다. 5주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들의 몸은 달라져 있었다. 내 눈에 들어온 건 꼿꼿해진 자세였다. 훈련소에서 보낸 첫 편지에서는 쉴 때도 정자세를 유지해야 함을 힘겨워 했었다. 그런데 5주 만에 본 아들은 편 허리가 불편해 보이지 않았다. 아들을 변화시킨 건 군대의 압박만은 아닐 것이다. 군부대가 전수해온 관습이 된 규율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편안함이라는 충동을 박탈한다는 생각이 어느 사이에 지켜야할 관습이 되 버린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관습의 힘은 대단하다. 절도가 좋은 가치인 공동체에서 널브러진 정신은 가지면 안 되는 나쁜 가치가 된다. 그 가치판단이 관습을 생산한다. 이전까지 흐트러진 자세가 자유로움의 상징이었을지 모르지만 그 공동체의 힘이 강하게 미치는 장소에서는 절도 없는 존재일 뿐이다. 관습은 그렇게 충동의 가치평가를 바꾸어 버린다. 관습은 취향을 바꾸어 버리고 그 취향은 내 삶의 결정적 변수가 된다. 이제 우리는 삶을 풀 수 있는 하나의 실마리를 얻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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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습은 그렇게 충동의 가치평가를 바꾸어 버린다. 관습은 취향을 바꾸어 버리고 그 취향은 내 삶의 결정적 변수가 된다.

취향, 목숨을 건 문제

  벗들이여, 취향과 미각에 대해서는 이러쿵저러쿵하는 게 아니라고 하려는가? 일체의 생명이 취향과 미각을 둘러싼 투쟁이거늘! 취향, 그것은 저울추인 동시에 저울판이요 저울질하는 자다. 저울추와 저울판, 그리고 저울질하는 자와의 실랑이 없이 삶을 영유하고자 하는 일체의 생명체에게 화가 있을 지어다!

《 프리드리히 니체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책세상 / 197쪽 》

이쯤에서 니체는 우리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지점을 보게 한다. 취향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것이 아니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취향과 미적 감각을 둘러싼 투쟁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나는 하고 싶은 것들을 해왔다. 처음에는 끌리는 충동을 피해도 보고 저항도 해보았지만 우여곡절 끝에라도 하고 싶은 것들은 하게 되었다. 그렇기에 어떤 충동에 끌리는가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니체의 말대로 그 사람의 운명을 가르는 문제가 된다.

취향이나 미적 감각은 가치판단을 반영하고 있다. 취향이란 몸에 배어 있는 가치판단이다. 취향을 자극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쯤으로 여기는 일은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하자. 그런데 그 취향은 내가 관계하는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한다. 그 힘들 중에 하나가 관습이다. 관습이란 사람들의 관계에서 파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치판단이 관습이라는 매개를 통하여 몸을 바꾼 것이 취향이다. 그렇기에 취향은 고정불변하기는커녕 얼마든지 변화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소비자 취향을 바꾸지 못하면 상품을 팔지 못한다. 사람들의 취향을 바꾸기 위해서 광고를 반복하고 반복한다. 군대에서 취향을 지배하지 못하면 쓸 만한 군인을 얻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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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인간은 살아가는 방식을 건 투쟁을 취향의 장에서 하고 있는 셈이다. 생명이란 취향 투쟁을 하는 존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취향에 대한 니체의 관점을 배우고 나면 태연히 취향을 마주할 수 없게 된다. 내 취향도 누군가가 침탈한 산물이며 나 자신도 타인을 침입하여 취향을 바꾸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가치판단 기준을 무조건 받아들이라고 강요당했다고 생각해보자. 아마도 그대로 수용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취향에 대해서는 너무도 관대하다. 투쟁의 산물로 생긴 취향을 자신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가볍게 넘어간다. 만일 타인이 침투하여 심어 놓은 것이 내 취향이라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타인의 가치평가에 의해 살아가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니체의 말처럼 밀어내고 당기는 과정도 없이 취향을 내 것으로 하는 것은 멈춰야 한다. 그 대신 우리는 원하는 충동을 서서히 자라게 할 수는 있다. 원하는 충동을 자주 만날 수 있는 조건을 조성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그것들을 생산적이고 유용한 것으로 키울 수 있을 것이다. 충동을 가꾸는 정원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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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신 우리는 원하는 충동을 서서히 자라게 할 수는 있다. 원하는 충동을 자주 만날 수 있는 조건을 조성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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