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스쿨정리

 

질문자1: 정기신은 무엇이고 어떻게 잘 보존할 수 있나요?

저는 동의보감이랑 공부 시작한지 얼마 안 돼 개념이 정립이 안 되는 것이 있어서 질문 드리는데요. 동의보감에 정기신에서 보면 “정(精) 사용을 잘 해야지 양생에 좋아 오래 살 수 있다.”라고 되어 있고, 남자 같은 경우는 성욕을 자제해야 한다고 명시가 되어 있는데 그러면 여성의 경우는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정의 손실이 없는데 여성도 마찬가지인지? 아니면 또 다른 면에서 글쓰기, 운동을 하는데도 정기신을 굉장히 소모하는데, 글쓰기 같은 경우 굉장히 집중해서하는 일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때 정이 소모될 텐데 글쓰기를 적게 하라는 말은 안 하거든요. 그래서 이 정의 소모에 있어서 이게 좀 혼돈이 되더라고요.

 

정화스님: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정(精)은 몸이에요. 몸을 내가 얼마만큼 잘 보호하고 있는가가 자기 정을 잘 기른다고 할 수 있는데, 몸을 기르는 즉 정을 기르는데 첫 번째는 “내가 무엇을 먹느냐”예요. 그래서 음식을 잘 드셔야 돼요. 골고루 잘 드시면 돼요. 골고루는 잘 먹는 첫 번째 이유는 자기 몸의 세포가 활동을 잘 하기 위해서인데 거기에 한 가지 플러스가 있어요.

우리 몸과 공존하고 있는 우리 세포 수보다 10배나 많은 미생물이예요. 우리 몸의 세포를 40조 ~60조, 혹은 100조라고 하는데 미생물은 그것보다 10배가 많아요. 그러니까 우리 몸의 세포가 40조라는 사람은 미생물이 400조가 있고, 우리 몸의 세포 수가 100조라는 사람은 우리 몸속에 미생물 수가 1000조가 있어요. 이 1000조개 미생물의 먹이는 채소예요. 고기가 아니라는 거예요. 고기는 우리 몸이 굉장히 좋아하는 것이지만 몸속에 있는 대부분의 미생물은 채소를 좋아해요. 그런데 이 채소가 이 미생물이 내 몸의 건강과 내 생각의 편안함을 상당히 많은 부분 담당해요. 음식을 나만 좋아라고 먹어서는 잘못이에요. 미생물도 좋아하는 음식을 드세요. 그래서 음식을 잘 먹으면 정을 잘 기르는 거예요.

그 다음에 기(氣)는 그것들이 상호작용을 계속 해요. 우리 세포들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이웃 세포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아요. 이야기의 흐름 또는 몸의 에너지 흐름 등등. 에너지는 각 세포가 일을 할 때 일하는 운동에 힘을 주는 것들이에요. 이것들이 계속 통로로 막 흘러요. 그래서 우리가 보이는 통로, 보이지 않는 통로로 그런 에너지가 막 흘러가는 것이 전부 다 기예요.

정기신 할 때 신(神)은 그렇게 상호작용했는데 동물에 와서는 그것을 생각이라는 사고방법으로 바꾸기 시작했어요. 몸의 상호작용이 인간에 와서는 굉장히 강력하게 생각이라는 사건을 만들어놓고 더 나아가서 자신을 반조하는 일이 생기는 거예요. 생각의 좋은 점이 또 무엇이 있나요? 내가 밥을 얼마나 잘 먹나? 정기신을 잘 보호하려면 첫 번째로 밥을 잘 먹어야 돼요. 우선 몸을 건강하게 만드는 첫 번째이에요.

두 번째로는 여러 성현들이 여러 통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야기한 것이 있는데 맞는 것도 있고 틀린 것도 있어요. 잘 감별할 수 있을 정도로 지적 수준을, 요즘은 정보가 많이 형성됐다라고 하는 것은 내가 직접 경험하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사건들이 많다는 것인데 그것을 배운다는 것은 닥칠 때 그것이 무엇이라고 아는 것이 아니고 미리 알 수 있는 조건, 학습을 하는 것은 외부의 정보 통로가 작동할 수 있는 즉 미래의 정보를 배운다는 것은 지금도 즐거운 것이지만 신체 내부에서 하는 말은 내가 많은 것을 알면 우연히 다가오는 미래를 대응할 수 있는 조건이 많아진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기억을 하게 된다. 그래서 거기에서 주로 옛 선현들의 인문학적 소양을 기르는 거예요.

그러면 첫 번째는 무조건 잘 드셔야 돼요. 두 번째는 잘 드시고 기분이 좋아야 되는데 기분 좋은 것의 가장 간결한 예는 적당히 마음 맞는 사람하고 무겁지 않은 이야기를 그냥 재미있게 하는 거예요. 무겁지 않은 이야기예요. 어떤 사람은 나는 무거운 이야기인데 이 사람은 이것이 안 무거울 수 있고 어떤 사람은 가벼운 이야기인데 무거울 수 있기 때문에 개인차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누구하고 이야기 하면서 다른 사람이 보면 쓸데없는 이야기인데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있어요. 그렇게 하면 안에서 “인생이 재미있어”라고 말하는 것이 나와요. 그것만 가지고 있으면 나중에 허해져요. 그래서 그런 요소들은 잘 버무려서 내부적으로 지식 정보를 특화시키고 그것을 수용해서 자기 몸과 마음에 번뇌를 발생시키지 않을 수 있는 역량을 길러 놓으면 정기신을 잘 기르는 것이에요. 출발을 잘 드시는데서 시작하시면 됩니다.

질문자1: 책에는 “태어날 때 일정양의 정을 가지고 태어나서 이것을 아껴서 써야한다”고 되어 있어 저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는데요?

 

정화스님: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요. 어떤 것은 정해진 것이 있지만 어떤 것은 계속 형성되어지는 것이 있어요. 심장 박동수 같은 것은 일생 동안에 거의 정해져 있어요. 심장근육이 되면서 몇 번 뛰어 하면 그것이 차 엔진처럼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가 오는 거예요. 그것을 죽음이라고 하는데 잘 드시면 그것이 연장돼요. 그러나 기본적으로 한계가 있는 거예요.

한계가 있는 것도 있고 소양을 잘 쌓는 것은 빈 공간을 만들어서 계속 확장해 가는 것이라서 한계가 있다고 할 수가 없어요. 정도 마찬가지예요. 신체를 잘 갈무리해서 정비를 잘 하면 그것이 늘어나는 것이에요. 그래서 지금 인간이 90까지 100세까지 산다는 것은 전에는 그렇게 살지 못했지요. 왜 그랬냐하면 먹을 것이 없어서 그랬어요. 먹을 것이 없으니까 사람들이 더 고되게 일을 많이 했어야 돼요. 정비는 안하고 기름을 제대로 안 쳐주면서 차를 계속 부리니까 일찍 죽었어요. 지금은 먹을 것이 그렇게 부족하지는 않아요. 잘 먹고 좋은 기름을 넣는 것과는 차이가 있는 거예요.

그 다음에 일양(노동량)을 점점 예전처럼 할 수가 없어요. 전 세계의 공장에서 로봇을 통해서 생산물을 만드는데 로봇 대 공장 비율이 전 세계에서 1등이 한국이에요. 로봇이 전 세계로 퍼져도 가장 충격이 적은 나라가 한국이에요. 이미 쓸 수 있을 만큼 거의 다 썼어요. 일 로봇이 오면 일자리 없어진다고 말하는데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아요. 공장에 한번 가보세요. 다 로봇이에요. 전 세계에서 1등이에요.

요즘에 52시간 일하는 거 말하잖아요. 예전에는 52시간 일을 하려고 해도 사회적 여건이 전혀 안되니까 그걸 말하는 대통령이 있으면 정신이 좀 이상한 거였지요. 요즈음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상황 여건이 되는 거예요. 그런 시간이 적어질수록 사람들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생각하는 운동을 해요. 생각하는 운동은 호모 사피엔스라는 이름에 가장 걸맞은 정보활동을 하는 거예요. 옛날에는 40~50, 60살까지 살기 힘들었는데 정비를 잘 하면 지금은 100살까지 살 수 있으니까 가장 큰 조건은 음식물과 깨끗한 물이예요. 그 다음에 노동 시간이 줄어드는 거예요. 그것이 수명을 늘리는 것이에요.

일은 줄어들었는데 머리는, 생각의 기본은 몸이 운동하는 거예요. 운동 하는 거예요. 운동을 안 할 수가 없어요. 운동하는 것이 사물, 사건, 물질, 생물 할 것 없이 모든 것의 기본이에요. 다만 밥을 잘 먹고 난 다음에 공부한다고 잠을 안자는 사람도 있어요. 이것은 현재 우리의 생물학적 생리에 어긋나는 것이에요. 기본적으로는 사람들마다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8시간은 자야 해요. 8시간 잘 수 있잖아요.

그런데 아침에 반드시 일어나고 저녁에 일찍 자거나 하는 것은 또 차이가 있어요. 왜냐하면 아침형 인간은 인간 전체의 40퍼센트 밖에 안돼요. 나머지 60퍼센트 중에서 30퍼센트는 저녁형 인간이에요. 저녁형 인간은 아침 9시 출근하면 30퍼센트는 자기가 조율만 하면 가능한 거예요. 아침형 인간에게 저녁까지 일하라고 하면 굉장히 괴로워요. 저녁형 인간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굉장히 괴로워요, 실제로도 피로도가 높아요. 나머지 30퍼센트는 약간만 조절하면 저녁형 인간이나 아침형 인간이 되는 거예요. 그 어떤 부류에 속하더라도 8시간 자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요즘은 일하는 시간대를 선택할 수 있잖아요. 내가 아침형 인간인지 저녁형 인간인지 잘 살펴서 아침형 인간이면 일찍 일어나서 일을 하시고 저녁형 인간이면 늦게 일어나서 정상적인 사람들은 늦게 일어난다고 생각하겠지만 저녁형 인간에게는 정상적인 잠이니까 한 10시나 12시까지 자고 오후에 일하면 돼요. 그런 탄력적인 일을 실제로 산업현장에서 할 수 있는 상황이 생긴 거예요. 그래서 잠 잘 자고 밥 잘 먹고 하는 것이 인문학의 가장 큰 기초입니다.

질문자2: 왜 원에 따라서 번뇌가 생기나요?

질문을 드리는 것이 갑작스럽긴 하지만 제가 저는 간단히 소개를 드리자면 화이트헤드, 바우만을 공부하고 있어요. 질문은 2가지가 있는데 아까 목적에 관해서 생각을 하고 그에 따라서 생각을 한다면 번뇌가 생길 거라는, 원에 따라서 번뇌가 생길 것이라는…

 

정화스님: 목적을 설정하는 것은 괜찮아요. 내가 어디로 갈 것인가를 결정해요. 그런데 그 목적이 이루어지든 안 이루어지든 상관없이 일하는 습관을 길러야 해요. 목적이 설정되면 ‘하고 싶은 거’예요. 하고 싶은 일들이 있어서 내가 목적지에 갔는데, 있을까 해서 갔는데 가보니까 아무것도 없어. 그래도 즐거워할 수 있는 신체를 만들자는 거예요. 목적지에 갔는데 내가 생각했던 일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잖아요. 인간은 목적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돼 버렸어요. 과거, 현재, 미래라고 하는 시간 축이 모든 사회에 기본으로 깔려 있어요. 내가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해. 그것은 관계없어요. 그것이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든 안 일어나든 온갖 위험적 요소가 있으니까 그냥 하라고요.

불교에서는 이것으로 가장 성공한 스님이 바로 대행스님이예요. 대행스님은 뭐라고 했냐면 그냥 주인공한테 맡기라고 했어요. 되고 안 되는 것은 그냥 주인공한테 맡기고 그냥 하기만 하세요. 일이 일어나고 안 일어나고는 내게 책임이 없잖아요. 하기만 할 뿐 주인공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거예요. 신이 있다고 말하는데 다윈 이후로는 우연이 끼어들어서 그 사건을 엄청나게 만드는데 우리가 예측 가능한 일들이 얼마 없어요. 그 예측 가능한 일이 얼마 없는데 그걸 토대로 모든 우연을 제어해서 내가 원하는 대로 바라면 실패할 확률이 많아. 자신의 능력이 굉장함에도 불구하고 “이 일도 하지 못한다.”라고 자기를 비난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거예요. 대행스님 하신 말씀이에요. 다 주인공이 하는 일이니까 당신은 편안하게 생각하고 일만 하세요. 주인공들이 다 알아서 하실 거예요. 그래서 걱정하지 말아요. 교회에서 “신이 다 알아서 하실 거예요.”라고 말하는 것이 똑같아요. 그런데 다윈은 세상은 필연+우연이 퍼센테이지로 1대 99일 수도 있고, 99대 1로 될 수도 있고, 99로 되면 필연적 인과가 될 확률이 높고, 1대 99에서는 거의 안 일어날 확률이 높습니다. 그래서 “아, 나는 원래 저 산을 가야 되겠다.” 하는 원을 갖는데 그렇게 가도 괜찮고, “원래 산에 가서 이러이러한 것을 생각했는데 없네.”라는 것도 괜찮다는 마음의 길을 만드는 거예요.

질문자2: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목적이 정말로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를 합리적으로 따져 볼 수…

 

정화스님: 처음에는 따지는데 기본적으로는 우리한테 사회가 심어준 도덕률이라는 것이 있어요. 따지기 전에 그런 것들은 어느 정도는 다 합당해요. 그런 것을 자세히 살펴서 철학적 훈련을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모든 것을 따질 수 없잖아요. 이미 안에서 이렇게 하시라는 명령들이 있어요. 그 명령들을 본 다음에 자기가 훈련하는 대로 하면 돼요.

그걸 따지는 것은 철학적 훈련이고 지금 우리가 행동할 때는 학습하는 과정에서 사회 공동체에서 해야 할 일들을 저절로 알아내는 게 막 섞여있어요. 그것도 유전자가 정해놨어요 유전자는 굉장히 이기적인데 이기적인 유전자를 살리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이타적인 일을 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요소가 유전 정보 속에서 있는 거랑 똑같아요. 어느 것은 그냥 내가 조절했는데 이타적으로 되는 것이죠. 그것을 얼마나 강력하게 훈련을 받아 왔냐면 돌고래를 예로 들어보면 돌고래는 암컷과 수컷이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짝짓기를 할 수가 없어요. 동료들이 도와줘야 해요. 그런데 자기가 도움을 받고난 다음에 다른 동료들의 짝짓기에 참여를 안 하면 그러면 그 순간부터 그 수컷은 평생 동안 짝짓기를 할 수가 없어요. 아무도 안 도와줘요. 이처럼 이기적으로 살면 좋은데, 유전자가 이기적으로 살아야 되면 이타적 행위를 해야 될 부분이 반드시 있게 돼요. 그래서 도덕률을 배우기 훨씬 이전에 우리한테 이 두 개가 적절히 작용하고 있어요. 내가 배운 것도 아닌데 그 일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어떤 경우는 이것이 학습되면서 작용의 양상이 안 해야 되는데도 하게 되는 게 있어요. 그것은 학습되면서 잘못된 유전자를 발현하게 하는 요소들이 너무 강력하게 개입되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하기도 해요. 그래서 그런 것조차도, 도덕적으로 철학적으로 해결해야하는 문제조차도 요즘은 생물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배워가야 할 시대가 이미 와 버린 것이죠.

 

질문자2: 목적을 설정하고 그것을 실행하는 과정에 관해서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런 각각의 사건들이 정말 윤리적인 목적에 합당한 것인가가 제 자신에게 설득이 안 되는 때가 가끔씩 있어요.

 

정화스님: 그럴 때는 내가 세워놓은 이 사건을 해석하는 전제가 정말로 의심할 수 없이 합당한가라고 묻는 것이 먼저예요. 이것이 좀 오래가면 데카르트의 합리적 의심. 일부러 의심하는 것처럼 밖으로 보면 그런데, “정말 일이 내가 판단의 근거로 삼고 있는 것이 완벽하게 합당한가?”하고 자기한테 묻는 연습을 해야 해요. 일어난 것만 가지고 따지는 것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런 것도 있는 거예요.

그렇게 보면 불교 같은 곳에서는 찾다 찾다보니까 아예 그런 전제를 설정할 수 있는 것 자체가 근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경험하게 되는 것이죠. 요즘 같으면 그런 상태는 불교에서는 빈 마음 상태라고 하는데, 빈 마음 상태란 설정된 모든 존재의 상황이 작용하지 않는 상황. 그런 것도 인생의 하나예요. 또 그런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고 조금 있으면 다시 운동을 시작해요. 이 때 다른 설정이 되면 어제까지 설정에 대한 문제가 전혀 다른 것이 될 수 있어요.

불교에서는 빈 마음 상태를 경험하는 것을 굉장하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빈 마음의 상태를 경험하게 되면 경험의 길을 스스로 만들어 갈 때 훨씬 수월하기 때문이에요. 전제가 있고 인식의 토대가 있고 인식의 토대라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사라진 그 자체가 한 개인이 가지고 있는 상황의 전부예요. 어떤 것만이 나가 아니고 아무 것도 없는 상태도 나고, 쌓여진 것도 나고, 발현하는 것도 나예요. 여기서 한 사람한테 절대적인 일이 관계 속에서는 절대적인 일이 아닐 경우도 많으니까 어떤 경우에는 자기 판단이 옳지만, 어떤 경우에는 옳지 않는 것을 전제로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 생길 수도 있어요. 그것을 잘 살피는 것이 중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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