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란(감이당 금요 대중지성)

폭력에 대한 만용

영화 <살인의 추억>의 소재였던 화성연쇄살인사건, 한강 토막살인 사건…… 연일 끔찍한 사건 보도가 이어지는 요즘이다. 그런데 끔찍하다고 느껴지는 지점이 이전과는 좀 다르다. 누군가 어떤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 자체는 더 이상 놀랍지도 끔찍하지도 않다. 놀라운 것은 살인의 방법, 시체를 훼손하는 정도, 그리고 범인의 평정심(?)이다. 그리고 뉴스의 빈도에 비례해 급속히 무감해지는 나의 반응양상, 가만 생각할진대 이 또한 오싹한 일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근대 이후 인간은 자신의 폭력성을 꽤 극복했다고 믿어온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전쟁 같은 집단 참사가 일단 많이 줄었고, 일상적으로 식량을 구하지 못하는 사태 역시 드물게 되었으니. 요즘 화제가 되는 사건들은 생존과 무관한 살인사건이다. 그래서일 것이다. 요즘 사건들은 굉장히 비인간적이고 비정상적으로 느껴진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극단적인 물질주의 사회의 폐해, 현대인의 과도한 자의식과 실종된 공동체의식 등 현 문명에 혐의를 두는 진단에 눈이 가다가 ‘아냐,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내가 너무 무지한 것 같아’라며 고개를 흔들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엔 이런 내 생각 자체를 다시 생각해보고 싶어졌다. 인간의 폭력성, 아니 모든 존재의 폭력성에 대해 불교야말로 아주 오랫동안 주목해오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이러한 마음의 작용에 대해 직접 보려고 하기는커녕 상식적인 수준에서 이해가 가네, 안가네 하고 있었다! 상식적인 수준의 폭력과 살인이란 어떤 것인가? 내가 그 폭력이 발발한 동기를 이해할 수 있으면 납득, 이해 수준을 넘어서면 비정상. 생각해보니 인간적이라는 기준, 정상의 범주는 순 내 기준이다. 그 정도면 나라도 분노가 치밀었을 것이라는 동의. 그러면 상식적인 수준의 폭력을 당하면 그때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고 납득하게 되는 것일까? 물론 그럴 리가 없다. 그런데도 요 정도는 별 문제가 아닌 것처럼 여기는 것은 무슨 만용인지. 게다가 이런 구분이란 당췌 무익하기 짝이 없다. 상식에 드는 것에 대해서는 안심하고, 상식 너머의 일에 대해서는 이해불가의 영역으로 치부하기 때문이다. 이러나 저러나 생각하지 않기는 매한가지다.

잦아드는 물 속의 물고기

그럼 불교에서는 폭력성에 대해 어떻게 접근하고 있을까? 숫타니파타에는 이와 관련, 주목할 만한 스토리가 담긴 경이 실려 있다. 붓다의 고향 싸끼야국에는 로히니라는 이름의 강이 평화롭게 흐르고 있었다. 이 강 건너편에는 친척이나 다름없는 꼴리야 족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가뭄이 길어지자 부족 간에 강물을 독차지하기 위한 다툼이 잦아졌다. 처음에는 그저 몇 사람 간의 작은 말다툼이었다. 하지만 말다툼이 가문 간의 몸싸움으로, 몸싸움이 선조들에 대한 모독으로 걷잡을 수 없는 불처럼 번져나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붓다는 이 분쟁을 조정해달라는 초청을 받고 서로 으르렁거리는 두 부족에게 설법을 베풀었다. 이름하여 <폭력을 휘두르는 자에 대한 경>이다.

“폭력을 휘두르는 자로부터 공포가 생깁니다. 싸움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내가 어떻게 두려워했는지, 그 두려움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잦아드는 물에 있는 물고기처럼 전율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서로 반목하는 사람들을 보고, 나에게 두려움이 생겨났습니다.”

이 경을 통해 우리는 붓다가 지금 이 폭력의 현장에서 어떤 방식을 취하는지를 단계별로 하나하나 볼 수 있다. 붓다는 싸움의 원인을 묻지 않았다. 그는 먼저 싸우는 사람이 자신을 보도록 했다. 그들의 폭력성이 두려움과 공포와 전율을 일으키고 있음을 말이다. 여기엔 예외가 없다. 제 3자인 붓다와 폭력을 당하는 자, 그리고 폭력을 휘두르는 자 모두가 두려움이라는 감정의 자장 안에 놓여 있다. 단, 폭력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붓다는 두려움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생겨나는 지를 면밀히 보고 있는 것이다. ‘잦아드는 물에서 퍼덕이는 물고기’의 비유는 불충분한 자원을 놓고 다투는 두 부족의 상황을 가리키는 동시에 이 세상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불만족의 고통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불만족스러운 상황은 쉽게 서로에 대한 증오로, 폭력으로 전변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두려움이 생겨난다.

화살을 보기 어려운 이유

“그들이 끝까지 반목하는 것을 보고 나에게 혐오가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나는 보기 어려운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심장에 박힌 화살을 보았습니다.

어떠한 화살이든 맞은 자는 모든 방향으로 내닫지만,

그 화살을 뽑아 버리면, 내닫지도 않고 주저앉지도 않습니다.”

붓다 역시 폭력이 난무하는 현장을 보고 혐오감을 느낀다. 우리가 인간의 폭력성에 맞닥뜨릴 때 어떻게든 상식선에서 이해하려는 노력, 혹은 비인간적인 무엇으로 치부하려는 태도는 모두 이 혐오감 때문일 것이다. 이 ‘싫은 느낌’,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외면하고 싶게 만든다. 그러나 붓다는 이 ‘보기 어려운 것’을 보았다. 그 폭력을 휘두르는 자들의 가슴에는 여러 대의 화살이 박혀 있었고, 그 상처에서는 붉은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 ‘심장에 박힌 화살’의 고통 때문에 그들은 그렇게 날뛰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고통에 눈멀어 ‘모든 방향’으로 내닫는 행동은 또 다른 폭력이 되고, 이 폭력은 다시 두려움을 낳는 악순환을 증폭시킨다. 고통과 폭력이 서로를 낳는 꼴을 본 붓다는 말한다. 그 화살을 뽑으라고.

그러니 분노가 치밀면 밖을 향해 씩씩대기 전에 우선 자신의 가슴부터 더듬어라.

그렇다. 붓다가 말했듯, 이에 대한 해결책은 “화살을 뽑는 것”이 우선이다. 하지만 우리는 화살을 보지 못한다. 그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괴로워 할 뿐이다. 상식적으로 이리저리 내닫기 전에 먼저 자신의 아픈 가슴부터 더듬어 볼 것 같지만, 실제로 내 경우만 돌아봐도 마음이 불편한 날 행동이 거칠어지곤 했다는 걸 부인할 수 없다. 그러다 괜히 의자다리에 부딪히거나 누구라도 한 사람 걸려들면 그때부터는 진짜 성질부릴 명목이 생긴다. 밖으로 밖으로만 화를 뻗치느라 제 가슴에 꽂힌 화살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말이다. 스스로도 이러할 때, 자신을 때리려 드는 자의 가슴에 꽂힌 화살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드물 것인가. 고통에서 벗어나려 할 때 고통은 우리의 화를 돋우고, 또 다른 폭력을 낳고, 이 소동 속에서 애초의 원인을 잊게 만든다. 그러나 고통의 순간에 머물러 상처를 더듬는다면 그 자리에 박힌 화살이 만져질 것이다. 살에 박힌 화살을 잘못 건드려 비명을 지를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화살의 존재를 알게는 될 것이다. 그러니 분노가 치밀면 밖을 향해 씩씩대기 전에 우선 자신의 가슴부터 더듬어라. 이것이 붓다의 처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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