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하(남산강학원 청년스페셜)

벼랑 끝에서

용장으로 좌천된 양명은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남쪽 변방에 도착했다. 용장, 지금의 귀주는 양명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중원과는 다른 땅이었다. 습한 기후에 풍토병이 많았으며, 그 덕에 양명과 함께 용장으로 간 일행들은 툭하면 병이 났다. 문명의 손길도 닿지 않는 변방, 말도 통하지 않는 원주민들. 용장에서 중원의 관리로 살아가려면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양명의 삶은 한번 틀어져야 했다. 이곳에서 이 사람들과 살아가는 길을 새로 내야 했다.

먼저 양명은 그동안 사대부였기에 하지 않았던 일들을 하게 된다. 농사짓기, 물 긷기, 밥 짓기, 땔감 하기 등 생계형 집안일부터 같이 온 시종들 병간호, 노래로 향수병 달래주기까지. 사는 곳도 용강산에 있는 한 동굴(‘양명동’)로 옮겼고, 묘족의 언어도 배웠다. 그들과 함께 서원을 짓고, 그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해오던 공부도 멈추지 않았다. 양명동과 연결해서 굴 하나(‘완역와’)를 파고, 그 안에서 혼자 수행을 했다. 정좌를 하고 그동안 읽어왔던 경전들을 머릿속에서 한 구절, 한 구절 다시 곱씹었다. 언제 유근이 자신을 죽일 자객을 다시 보낼지 몰라 불안했지만, 그저 천명(天命)을 기다리면서 여기의 삶에 집중하겠다고 다짐했다.

대나무에서 이치를 찾던 소년이

매일 죽음에 대한 불안과 싸우고, 수행하고, 일 하고, 묘족에게 적응하는 것의 연속, 사는 것만으로도 강도 높은 생활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완역와’에서 수행하다가 잠 들었을 때, 양명에게 큰 깨달음이 찾아온다. 용장에 오면서 완전히 틀어진 그의 삶처럼, 이때 그의 학문도 크게 변화해야 했다.

어렸을 때부터 양명은 성인이 되기 위해서 학문을 한다고 말할 정도로 뜻이 높은 소년이었다. 양명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주자의 말대로 ‘대나무 격물’을 하다가 병을 얻은 에피소드는 그가 얼마나 학문하기에 진지했는지를 보여준다. 주자는 『대학』에서 말하는 학문하는 방법 중 두 가지, ‘격물’과 ‘치지’에 대해서 ‘사물에 나아가서 이치를 깨닫는 것’이라고 풀이했는데, 이는 열심히 궁구하면 모든 사물에서 불변하는 이치를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열아홉살 양명은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대나무를 앞에 놓고 밤낮을 대나무의 이치에 대해서 생각하고, 생각했다. 7일 후에 그는 대나무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 병이 났다. 이치 궁구에 실패한 양명은 자신이 성현이 될 역량이 없나보다, 하고 탄식했다.

그로부터 18년 후, 변방의 땅, 좁은 굴 속, 좁은 석곽 안에서 그는 기쁨에 찬 소리를 내지른다. 『대학』의 ‘격물치지’와 맹자가 말한 ‘양지’(良知)가 연결되면서 ‘학문한다’는 것 자체, 즉 주자식 학문의 기반을 뒤흔드는 깨달음이 온 것이다. ‘물’은 바깥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구나, 이치 또한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양지에서 얻어지는 것이구나, “성인의 도리는 나의 본성만으로 충분하”구나! (최재목, 『내 마음이 등불이다』, 이학사, p.116에서 재인용)

“‘격물格物’(의 격格)은 『맹자』에서 “대인이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다[格]”고 말할 때의 ‘격’과 같은 것으로, 마음의 바르지 못함을 제거하여 그 본체의 바름을 온전히 하는 것이다.” (왕양명, 『전습록』1, 청계, p103)

“앎은 마음의 본체이며, 마음은 자연히 알 수 있다. 부모 뵈면 자연히 효도할 줄 알고 (중략)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면 자연히 측은할 줄 안다. 이것이 바로 양지良知이니 밖에서 구할 필요가 없다. (중략) 앎을 실현하고[致知] 의념을 바로잡는[格物] 공부를 해서 사사로움을 이기고 천리를 회복해야 한다. 마음의 양지가 다시는 막히지 않고 가득차서 흐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그 앎을 실현하는[致知] 것이다.”(같은 책, p104)

‘격물’은 ‘의념(意念)을 바로 잡는[正]것’, ‘치지’는 ‘양지의 앎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양명은 ‘격물치지’를 새롭게 읽게 되었다. 학문한다는 것은 나의 의념을 바로잡는 일에 힘쓰는 것이다. 어떤 의념을 바로잡아야 하는가? 그 답은 자신에게 있다. 누구에게나 있는 마음의 본체, 배우지 않아도 천리天理를 알고 있는 양지를 발휘하면 알 수 있다.

난생 처음 겪어보는 용장이라는 땅, 이곳에서 양명은 삶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가고 있었다. 누가 알려주지도 않았고, 배운 적도 없지만 양명은 직접 생활을 꾸리고, 묘족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아가고 있었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길, 치열하게 살고 있는 여기가 아니면 어디에 이치가 있단 말인가? 사서삼경을 들어본 적도 없을 묘족 사람들도 여기에서 자신들의 삶을 꾸려가고 있지 않은가? 양명은 주자학과 영영 다른 길을 가버릴 깨달음, ‘심즉리心卽理’, 마음이 곧 이치임을 깨달은 것이다.

성인의 삶을 살다

(주자의 말처럼) 불변의 이치를 궁구해서, 활연관통하게 알고 나서야 성인으로 살 수 있다고 한다면, 지금 당장은 어떻게 살란 말인가? 내 마음의 본체[良知]가 성인의 것과 같다는(=이치라는) ‘심즉리’는 아주 현재적인 문제로 우리를 데려온다. 지금 당장, 우리는 양지를 다해서 성인의 행위를 할 수 있고, 그러므로 양지를 발휘하는 데에 힘을 써야한다.

이러한 ‘심즉리’를 깨닫고 1년 뒤 용장에서, 양명은 앎과 행위가 동시적이라는 ‘지행합일知行合一설’을 주창했다. 이것은 무엇이 선한지 악한지를 알고 나서[知] 그에 따라 행위[行]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주자의 ‘선지후행先知後行설’과도, ‘아는데 못하겠다’고 말하는 우리와도 다르다. 우리는 아는 만큼 행한다. 또, 우리의 행위를 보면 우리가 무엇을 아는지를 알 수 있다.

“지금 사람들의 학문은 단지 지행을 나누어서 두 가지로 하기 때문에 일념一念이 발동할 적에 비록 그것이 불선이라고 하더라도 아직 행해지지 않았다면, 제거하여 금지하지 아니하는 경우가 있다. 내가 지금 이 지행합일을 설하는 것은 바로 사람들에게 일념의 발동이 곧 행하는 것이 됨을 깨닫고 발동에 불선이 있으면 곧 이것을 극복해서 철저하게 그것이 가슴속에 잠복해 있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내 말의 근본 뜻이다.” (『내 마음이 등불이다』, p.134에서 재인용)

스쳐지나가는 생각, 불쑥 올라오는 마음, 양명은 이런 것들도 우리가 행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좋지 않은 생각이나 마음이 올라올 때, 우리는 그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국 우리는 그 생각과 마음을 가지는 것이 나에게 좋은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지행을 분리해서 생각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오해한다. 양명의 ‘지행합일’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더 깊이,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게 만든다.

‘심즉리’와 ‘지행합일’ 위에서 양명은 묘족에게 앎=행위로 드러나는 스승이 되고자 했고, 매번의 사건과 매순간 움직이는 의념 앞에서 양지를 다하기 위해 힘썼을 것이다. 성인의 삶을 살아버림으로써, 성인이 되어버리기!(물론 이것이 쉽다는 말은 아니다..^^;;) 성인의 길을 뚫어보고자 병이 날 정도로 대나무의 이치를 궁구하던 양명은 용장에서 새로운 길을 열어젖혔다. 지금 여기에서, 모든 사람이 성인이 될 수 있는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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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민
Guest
소민

양명의 글을 읽다보니 더더욱 전습록 공부를 하고 싶어진다는! 이제껏 양명동에서의 깨달음만 알고 있었는데 완역와라는 곳에서 수행했다니~ 그런데 완역와가 무슨 뜻일까요?^^ 그나저나 “지행합일”은 무사 양명의 삶과 찰떡궁합인듯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