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스님 8월 선물강좌 중

'당신은 이런 사람이 되세요.'

괴로운 상태를 없애고 즐거운 상태를 만들어내는 것. 본인을 포함해서 함께 사는 사람들, 함께 사는 이웃들과 나누는 것을 자비라고 합니다. 자 그런데 그런 것들을 할 때 우리 신체에서 ‘나는 이 일을 했더니 굉장히 즐거워’라고 하는 보상시스템을 강력하게 느끼도록 되어 있느냐 라고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밥 한 그릇을 맛있게 먹을 때 나한테 상을 주는 이 느낌보다, 내가 나 자신한테 그런 걸 안 하고 했을 때 보상시스템의 강도가 더 약해서 별로 그렇게 가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왜 그렇게 가지 않느냐면, 내가 무엇이고 우리 삶이 무엇인가를 되돌아보게 된 것이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어떤 문화의 시기로 보면 한 6000년 전, 더 오래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인류의 상당히 공통적인 부분으로서 저런 행위가 자기를 돌아보고, 그리고 함께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돌아보려고 하는 그 역사가 굉장히 짧은 거예요. 그 역사 속에서 읽어진 행위를 가지고 그 행위를 했었을 때 ‘아 나는 상을 받을 만 해’라고 하는 보상시스템이 잘 움직이지 않는 거예요.

보상시스템도 마찬가지로 몇 만 년 전에 생겼는데, 어떤 행위를 했을 때 뇌관과 시상 속에서 몸과 마음속에 흐르는 모든 정보들은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어요. 그래서 내가 지금 어느 곳에 주의를 기할까에 따라서, ‘머리 쪽에 주의를 기울이세요’ 하면 귀를 통해서 들어오는 감각정보가 시상에 모여 있는 많은 정보 가운데 머리 쪽을 향하도록 하는 운전시스템을 작동하는 거거든요.

근데 한 몇 천 년 동안 이루어진 인류의 행동이나 인식 중에서는 자비적인 행위 자체가 다른 사람이 했을 때는 ‘야 굉장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누구나 쉽게 그 행동이 신체화 되고 보상 시스템을 움직이는 쪽으로 아직 잘 안 되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참선을 했습니다. 참선을 하면 전전두엽의 이쪽 부위의 활동량이 좀 줄어듭니다. 그러면서 이제 어느 활동량이 커지냐면, 이쪽 두정엽 쪽하고 후두엽 쪽하고 전두엽 쪽하고 이 부분, 보통 측두엽이라고 하는 이 부분. 이 부분이 활성화 되어서 커져요. 그럴 때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뭘 느끼냐면 전적 상태를 경험합니다.

그래서 힌두에서는 그 맛을 ‘범아’라고 불렀죠. 물론 이걸 해석할 때는 문제가 있어서 불교하고는.. 불교는 이걸 해석할 때 ‘범’은 ‘신’이고, ‘아’는 ‘자아’입니다. 구체적 신, 실제 선을 가진 신이예요. ‘아’도 실제 선이고. 이 두 개가 만난다고 하는 것은 영어로는 religion이겠죠. 종교. religion이라는 말이 신과 내가 만난다는 말이에요.

근데 대부분의 실측정을 통해서 이 부분의 활성도가 커지면 통합적, 전우주적으로 전일한 내가 되는 경험을 많이 합니다. 부처님께서도 그런 것을 경험하셨을 겁니다. 그런데 이 해석이, 이 실제적인 신과 실제적인 자아의 만남이라고 보지 않고, 본래 자아는 해체되고 이 공간과 이 시간에 제한적으로 존재하는 자아가 해체되면서 전일한 자아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제 사유를 하기 시작해요. 인간은 정말로 그런 식으로 존재를 한다, 라고 봤더니 맞다. 나를 존재케 하는 것은 바로 다른 것과 손을 잡는 이웃들이다, 라고 하는 것을 사유합니다. 이런 것을 느꼈다기보다는, 이런 느낌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것에서 부처님이 이러이러한 것을 사유할 수 있다 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나를 성립시키는 것은 심지어 공기도 나를 성립시킨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럼 공기가 무슨 나를 성립시키는가 라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여러분 ‘분위기’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지요? 거기엔 아무것도 없어요. 분위기밖에 없어요. 그런데 분위기가 나를 어떤 생각을 갖게 하는 실체로 존재하게 만드는 거예요. 내가 그 분위기를 뭐라고 해석하기 전에 이미 분위기가 나로 하여금 ‘당신은 이런 사람이 되세요’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아요.

그러니까 내가 그런 행동을 주체적으로 했습니다 라고 본인은 말하고 싶지만, 실제로는 어떤 경우에는 옆에서 말하는 한 가지 공기 떨림 말로만 말고 자기를 어떤 사람이 되게 하는 거예요. 아니 내가 그런 것과 전혀 관련 없는 독자적인 실체를 갖는 존재성을 근본적으로 갖추고 있다 하면 그런 말들이 참 이상할 거 아니에요. 옆에서 이렇게 말하면 이런 나가 되고. 그런데 문제는 내가 이런 생각을 한 게 아니고, 부처님이 생각을 이렇게 하신 거예요. 그렇게 됐을 때는 그것만이 나이다 라는 거예요. 그것만이. 누가 나를 치우치게 해서 내가 기분이 좋아지면 내가 기분 좋아진 것이 아니고 ‘기분 좋아진 이것만이 나다’라고 보는 거예요. 이 때 기분 좋아진 나를 구성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엄마가 나한테 이렇게 하는 순간 내가 그렇게 되는 거예요. 내가 기분 좋아진 게 아니고 어머님의 말씀이 나를 기분 좋게, 기분 좋은 나를 만드는 거예요.

그러고 한참 기분 좋아하고 있는데 갑자기 아버님께서 들어오셔 가지고 ‘너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거니’라고 말하는 순간 갑자기 나는 바뀌는 거예요. 얼마만큼 밖이 나에게 깊숙이 개입되어 있어요. 이럴 때 자기 항상을 이루는데 내가 굉장히 주체적으로 살고 열심히 살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물론 그 부분도 엄청나게 큰 부분을 차지하지만, 방금처럼 한 마디 말로 그 사람을 어떻게 되게 만드는 거예요. 그렇게 기분 좋은 나와 기분 나쁜 나가 성립되는 배경이 바로 옆에서 나하고 어떤 손을 잡느냐가 정해주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정해진 것들이 그냥 스쳐지나가는 게 아니고 여기 이렇게 기억의 자모음으로 강조되는 거예요. 그래서 기억의 자모음이 강조되면 내가 다음에 어떤 사람으로 나를 드러낼 것인가 하는 게 많이 결정되는 거예요. 나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웃이 나한테 어떤 말을 하는가가 나를 정하느냐, 많은 부분을. 바꿔 말하면 내가 이웃한테 어떤 말을 할 것인가가 이웃을 정하는데 굉장히 참여를 해요.

얼마만큼 진실하게 연대되어 있는가

자 그럼 두 번째. 내가 불쾌한 말을 했을 때 나는 어떤 사람이 되는가. 불쾌한 사람이 되는 거예요. 이건 이웃과 관계없이 내가 뭘 딱 보고 해석을 해서 그냥 기분이 안 좋으면 안 좋은 말을 쑥 하는 거예요. 기분 안 좋은 말을 쑥 하는 순간 나는 어떤 사람인가 라고 보니까 기분 안 좋은 사람인 거예요. 반면에 내가 다른 사람이 봤을 때 나한테 굉장히 아름답고 마치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자손녀를 보는 것과 똑같으면, 기분이 굉장히 좋아지는 거예요. 그러면서 ‘우리 손자 예뻐, 손녀 예뻐’라는 말을 하면서 실제 나는 어떱니까? 자기 자신이 예쁜 사람과 예쁜 감정으로 변해가는 자기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삶을 이루는 근원적인 조건에서 괴로움을 덜어내고 즐거움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우리가 어떻게 자기를 보아야 할 것인가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자비’하니까 뭐 굉장히 마음이 너그러워서 모든 것을 다 용서하는 것이라고 마냥 생각합니다. 세상에 그런 자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할 수 있는 영역만큼만 자비의 넓이예요. 그 넓이는 본인한테도 사실상 대부분 인색해요. 하루 24시간 다 지내놓고 자기를 돌아다봤을 때 ‘나는 너무 잘했어’라고 말하는 것이 몇 가지가 된다고 하면, ‘나는 왜 이렇게 못했어’ 하는 게 스무 가지 서른 가지 됩니다. 자기한테 굉장히 인색해서요.

자신한테 인색한데 다른 사람한테 그렇게 너그러울 수가 있겠습니까? 자기한테 완전히 깨어있지 못한 상태에서 자기한테 인색한 사람이 다른 사람한테 너그러운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다 그 사람들과 밖으로는 표현하지 않지만 내면적으로는 바보나 거의 등치로 봅니다. 그 사람을 부리는 정도로 생각합니다. 특히 갑을 관계가 형성되어지는 것들은 그러한 인지체계가 형성된 데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식민지 지배하는 사람들이 가장 첫 번째로 하는 일은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겁니다. 갑이 을한테 요구하는 게 뭡니까? 너 1:1로 이야기 해. 그러나 실제로 자기는 1:1이 아니고 100이나 1000이 되는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있으면서 여기에 정면이라고 맞서붙는 거예요. 이 사람이 나하고 동등하게 맞서려면 100사람이 맞서야 하는 거예요. 100사람이 모이면 갑질을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흐트러뜨리는 거예요.

우리한테 한 사람이 잘하면 될 것처럼 보이는 것은 실제적으로는 삶의 원리에 잘 맞지 않는 일이예요. 아까 말했잖아요. 무슨 말을 하느냐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이 환경의 연대가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를 정해주는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이 말씀하실 때 삶이 함께 이루어지는 이 삶을 비로소 부처님도 통찰했다고 해요. 200만 년 전에 호모 엘렉투스로 우리한테 뇌관을 갖고 있고 등등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하고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같고 어떤 면에서는 유사한 인식 활동을 하지만, 이와 같은 통찰을 하려면 신피질의 영역이 특수하게 변화가 와야 해요. 즉 그 변화가 안 오면 삶의 연대적 의미를 깨우칠 수가 없어요.

자비는 내가 내 삶이 행해지고 있는 것들과 내가 얼마만큼 진실하게 연대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예요. 내가 이런 행위를 하고 있으면서도 ‘나는 이런 행위를 하는 것이 미워’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물론 미운 행위도 있겠죠. 자기가 자기 행동하고 구체적인 자기하고, 구체적인 자기라는 것은 행위를 표현하는 자기,하고 막연한 자기하고 사이의 갭이 벌어지는 거예요. 근데 자기가 자기 자신한테 자비로울 수 없는 것을 만들어내요. 마치 식민 지배자들이 지배 당하는 사람들한테 스스로 자비롭지 못하게 만드는 것과 같은 그런 인지구조가 우리 안에 있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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