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혜숙(감이당 금요대중지성)

 

나는 나를 모르고, 애초 무지한 존재로 태어난다는 것이 지난 번 이야기였다. 오늘은 이와 연관하여 법구경의 두 이야기를 만나보려 한다.

 

진리의 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는 이유

다섯 재가신자가 붓다의 설법을 들으러 왔다. 붓다는 ‘하늘의 강을 쏟아내듯’ 가르침을 설하고 있었다. 헌데 이 다섯 명은 기껏 설법을 들으러 와서는 딴 짓을 하고 앉아있었다. 한 사람은 아예 잠이 들었고, 한 사람은 손가락으로 땅을 긁고, 또 한 사람은 옆에 있는 나무를 흔들고, 또 다른 한 사람은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오직 한 사람만이 귀를 기울여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있었다. 옆에서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아난다가 안타까운 마음에 붓다에게 고했다. “세존께서 천둥이 포효하듯 설법을 하고 있는데 저들은 저렇게 딴 짓을 하고 있습니다.”

붓다가 대답한다. “잠을 자고 있는 자는 오백 생 동안 뱀으로 태어난 자라서 똬리를 틀고 머리를 쳐박고 잠자던 습성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땅을 긁고 있는 자는 전생에 지렁이였고, 나뭇가지를 흔드는 자는 원숭이였고, 하늘을 쳐다보는 자는 전생에 점성가로 태어난 자였다. 그들은 오랜 습관의 힘에 익숙해져 여전히 그런 상태에 있다. 그들의 귀에는 내 가르침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설법을 듣고 있는 한 사람만이 베다를 읽는 바라문으로 태어난 자였다. 이 뭇삶들은 헤아릴 수 없는 수천 겁을 윤회하면서 마시고 놀고 춤추고 노래하는 것에 익숙해 내 가르침을 듣는 것이 불가능하다. 듣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의 탐욕, 성냄, 어리석음 때문이다.”(법구경, 588쪽)

웬 허무맹랑한 이야기인가 싶겠지만, 2500전 당시 인도인들의 대화법은 이랬다. 전생의 이야기로서 현재의 자신을 이해했다. 현생에 내가 이런 몸으로 태어난 것은 과거 행위의 결과라는 거다. 중요한 건 이런 전생담이 사실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 지금여기의 자신에 대해, 삶에 대해 알고자 했다는 것. 그래서 이들도 붓다의 설법을 들으러 온 것 아닌가. 그런데 그들의 귀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타고난 습성!이다.

사실 내가 왜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지, 이런 욕망의 경향을 갖고 있는지 나도 모른다. 그냥 그렇게 타고났고, 그렇게 자라왔기 때문이려니 한다. 주어진 환경에서 그렇게 제 생긴 성향대로 살며 흘러가는 삶의 관성. 그 관성의 힘이 얼마나 센지 폭류에 끌려간다고 붓다는 표현했다. 그러다 어느 날 암초를 만나 멈추게 된다. 외부로부터의 시련이든 자기 내부로부터의 요구이든. 절대 제 생각대로 순탄하게 살아지지 않는 게 삶이지 않은가. 살다보니 너무 힘들거나 괴롭거나 이러다 죽겠거나 싶을 때 우리는 멈추어 돌파구를 찾게 된다.

이 다섯 명은 나름 멈춤의 시간을 갖고 붓다의 설법을 들으러 왔다. 붓다의 가르침은 여태껏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진리의 소리다. 그들의 귀에 전혀 익숙한 말이 아니다. 낯설고 새로운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온 마음을 모아 집중해도 알아들을까 말까다. 하지만 이들은 진리에 접속하고자 하는 마음보다 기존의 습관의 힘이 더 컸다. 그만큼 오랜 습관의 자장을 벗어나기가 힘들다는 이야기다.

타고난 기질과 욕망이기도 한 습관! 거기에 자동적으로 달라붙어 있는 것이 탐진치다. 욕망은 살아가는 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욕망이 하는 일은 욕망하는 것! 절대 만족이란 없다. 하여 탐욕과 동전의 양면인 성냄도 우리의 숙명이다. 탐욕과 같은 불은 없고 성냄에 견줄 포획자가 없다. 어리석음과 같은 그물이 없고 갈애에 견줄 강이 없다.”(게송251) 붓다는 일찍이 우리 몸에 내장된 탐진치, 그로 인한 갈애가 불만족과 괴로움의 원흉(!)임을 깨달았다. 또한 탐진치가 진리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무지의 원인이자 결과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탐진치의 삶, 모르니까 괴롭다

싸밧티 시의 어느 큰 포살일(재일)에 승원으로 기도하러 온 여인들이 있었다. ‘보시제일’로 불리는 여자 재가신도 비싸카가 그 여인들에게 포살에 참가하러 온 이유를 물었다. 나이 많은 여인들은 죽어 천상에 태어나고 싶어서, 중년의 여인들은 남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젊은 여인들은 가능한 아이를 빨리 얻고 싶어서, 처녀들은 혼기를 놓치기 전 결혼하고 싶어서라고 대답했다. 비싸카는 그녀들을 데리고 붓다에게 가서 그대로 전했다. 붓다가 말했다. “죽음은 소치는 목동들의 막대기와 같다. 태어남은 늙음으로 내몰고, 늙음은 병듦으로 내몰고, 병듦은 죽음으로 내몬다. 그러다 마침내 도끼로 자르듯 목숨을 끝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어남에서(윤회에서) 벗어남을 구하는 자는 없다. 그들이 구하는 것은 모두 다시 태어남이다.”(법구경, 449쪽)

이들의 바램은 보통 우리네 모습 그대로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식에 대해, 남편에 대해, 자신에 대해, 삶에 대해… 끊임없이 원(願)을 세우고, 그 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산다. 하나가 이루어지면 잠시의 기쁨 뒤에 또 하나의 바램이 생기고,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만족 속에 번뇌의 삶을 산다. 그렇게 끊임없이 즐거움과 불만족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괴로움 속에 살다 죽는다. 다시 태어나고 또 다시 태어나는 삶, 윤회의 삶이다.

나 역시 그랬다. 태어나 남들처럼 학교가고 졸업하고 직장 다니고 결혼하고 애낳고 말 그대로 쫓기듯이 살다보니 어느 덧 나이 50을 넘기고 있었다. 그리고 헛헛함과 허무함, 불안과 두려움이 찾아왔다. 이렇게 살다 죽는 것인가? 어느 덧 내 앞에 남아있는 건 늙음과 병듦과 죽음뿐 아닌가. 제 딴엔 잘 살아본다고 용을 쓰며 산 삶이었는데 왜 남은 건 족쇄에 묶인 듯한 답답함과 부자유함, 그리고 여전한 번뇌인가. 나이가 든다고 죽음 앞에서 저절로 평온해질까? 끊임없이 좋고 싫고를 분별하며 탐진치의 삶을 살아왔는데, 하루아침에 저절로 평안한 마음이 될까? 멀리 갈 것도 없이 내 부모 남의 부모를 보면 알 수 있다. 자아의 틀은 더 견고해지고 고집과 아집만 남아 있는 노인. 외로운 꼰대 아니면 치매. 아니면 병듦과 죽음 앞에서 전전긍긍하는 노년이 있을 뿐.

붓다는 생노병사, 삶과 죽음의 문제와 대결했다. 그 문제 앞에서 왕도, 천상의 신도,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너무 거창한 문제라고? 지금 당장 티끌만한 내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데 삶과 죽음의 문제라니? 이게 바로 타고난 업장인 무지였다. 지금 그 티끌같은 문제 속에 삶과 죽음의 문제 또한 들어있다는 걸 알았다. ‘먼지 하나 속에 온 우주가 들어있다’는 말처럼, 지금여기 이 순간 속에 내 삶의 전부가 들어있다. 지금 당장 내가 자유로울 수 없는 근저에 몸의 습성을 떠날 수 없는 ‘나’, 탐진치로 이루어진 ‘나’가 있다. 이런 ‘나’에 대해 모르는 채 생긴 대로 사는 삶은 탐진치의 굴레에 묶인 삶이다. 그 안에서 아무리 용을 써봤자 욕망의 쳇바퀴를 돌리는 윤회의 삶일 뿐이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왜 이렇게 사는지, 어떤 길을 가야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타고난 무명의 어둠 속에 내쳐져 길을 잃고 헤매는 삶, 모르기 때문에 괴롭고 두려운 삶에 대해 탐구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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