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겸

요즘, 일에 대하여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볼 기회가 생긴다. 몇 년이나 더 일을 하게 될지 헤아려 보기도 한다. 나 같은 중년 직장인에게 일이 차지하는 인생의 비중은 절대적이다. 우선, 사용하는 시간을 계산하면 그 비중이 단연코 탑이다. 근무 시간은 물론이고 회식이며 업무 미팅을 겸한 식사자리, 동료들의 경조사까지 업무의 연장으로 치면 시간은 고무줄처럼 확장된다. 직장은 밥벌이 수단이다. 매달 받는 급여로 생계를 챙길 수 있었고 아이를 키울 수 있었다. 직장은 결코 가볍게 평가할 수 없다. 앞으로도 몇 년 동안은 급여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밥벌이의 감각만으로 노동을 평가하기에는 아쉬움이 있다. 학교를 졸업하고 일을 구하던 시절, 나에게는 생활에 대한 감각이 희박했다. 생계를 해결하고 가족들의 생활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관념은 후순위였다. 무언가 의미 있는 활동을 할 수 있는 장으로 일자리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 기분으로 직업을 선택했기에 직장을 가진 다른 친구들의 ‘노동’의 감각을 한동안 갖지 못했다. 그런데 활동으로 선택한 직장이 망하지 않았고 안정되게 성장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업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서는 업무의 체계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역할 분장을 했고 위계도 생겼다. 그 시작의 감각과는 무관하게도 통념적인 노동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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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작의 감각과는 무관하게도 통념적인 노동이 되어버렸다.

처음 일을 시작한 이유와 지금 내가 일하는 이유에는 상당한 격차가 존재한다. 노동을 다르게 평가하고 싶다는 아쉬움과는 별개로 결국 노동이란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 조직이 필요한 일을 맡아하고 그 대가를 받는 것이 노동이다. 노동의 시각에서 사람을 판단하는 잣대는 ‘유용함’이다. 맡긴 일을 제대로 해낼 사람인지를 판단하여 사람을 선발하고 그 직책을 맡긴다. 나 역시 일을 할 때는 그 필요에 쓸모 있기를 바란다. 자신을 위해 쓸모가 있는 것과 그 유용함은 거리가 있다. 퇴임을 하고 나면 노동으로 배운 기술이 어디에 소용이 있겠는가?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노동을 간절히 욕망한다. 매월 따박따박 통장에 꽂히는 급여가 주는 안정감, 가끔 주어지는 휴가의 기쁨을 원한다. 어쩌면 업무로 인한 분주함에 자신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것까지 바라는 것일지 모른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노동이 가져다주는 혜택이나 조건에는 예민하다. 그가 가장 앞선 조건이 되어 삶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노동이 우리에게 무엇인지’ 대해서는 얼마나 질문을 하고 있을까? 그 질문을 하지 않는다면 노동을 주인으로 하는 삶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어떤 결산으로 귀결될 것이다. 노동이 가져 올 삶의 대차대조표가 무엇일까?

노동, 자발적 예속의 길

  매일 사용되어 닳는 사람들. ― 이 젊은이들에게는 인격도 재능도 근면함도 부족하지 않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에게 자기 자신에게 방향을 부여할 수 있는 시간을 허용하지 않았고, 오히려 어떤 방향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도록 어린 시절부터 그들을 길들였다. 그들이 ‘사막에 보내도 좋을 정도로’ 충분히 성숙하게 되면 그들은 약간 다르게 다루어졌다. 즉 그들은 이용당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박탈당했고, 매일 사용되어 닳아지는 것이 되도록 교육받았으며 그것을 의무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제 그들은 이렇게 매일 사용되어 닳지 않고는 지낼 수 없게 되었고 그 이외에 다른 것을 바라지도 않는다.

《 프리드리히 니체 / 아침놀 / 책세상 / 178, 195쪽 》

니체는 산업혁명이 발생하고 근대적 의미의 노동이 본격화되는 시대에 살고 있었다. 그 전시기의 장인이나 농민의 노동과는 성격이 다른 노동이 등장했다. 공장을 소유하는 자본가가 등장하고 그 공장에 노동력을 팔면서 생활하는 근대적 ‘노동’이 등장 했다. 그 시기 니체는 노동을 하고자 하는 욕망, 돈을 벌고 싶어 하는 자본가의 욕망을 포착한다. 니체의 관점에서는 자본가와 노동자는 욕망을 공유하는 공동 정범인 셈이다. 근대적 인간은 맡겨진 일을 하도록 길들여진다. 교육을 통해 그들에게 습득하게 만드는 것은 보편적인 규율이고 노동에 쓸모 있을 기술이다. 노동이 요구하는 것은 규율을 체질화하고 그에 맞는 기술을 갖춘 평준화된 인간이다.

노동하는 인간은 자신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는다. ‘왜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그것을 하려고 할까?’와 같은 질문은 노동하는데 불필요할 뿐이다. 노동하고 소비하기에 바쁜 우리들은 자기에 대한 질문을 고려할 시간조차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근대적 노동은 길들여진 자발성에 기초한다. 노동을 하며 내면적 가치는 포기하고 그 공간을 외면적 목표로 채운다. 많은 것을 생산하고 가능한 한 부유해지려는 욕망이 자유로운 호흡을 포기하고 ‘노동’하게 만든다.

노동하고 소비하기에 바쁜 우리들은 자기에 대한 질문을 고려할 시간조차 없다.

노동은 자유로운 정신과 배치된다. 자유로운 정신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실험하고 자신을 바꾸어 나가는 것이다. 반면에 노동은 자기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라도 주어진 일이라면 해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에 자신이 묶여있는 셈이다. 노동에서 중요한 것은 유용함이다. 그 과업을 하는데 얼마나 쓸모가 있을지가 기준이다. 노동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사유를 할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함으로써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고 싶은 욕망을 억제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의 욕망은 예속적이다. 더구나 그 욕망은 타자들의 그것을 흉내 낸 것이다. 결국 나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꼴이 된다. 어떤 것을 자신을 위해 활용하지 못하고 그것에 속박되어 버릴 때 그것을 예속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현대인은 수많은 예속으로 살아간다. 얼마 전 핸드폰을 분실했을 때 내가 얼마나 핸드폰에 예속된 삶을 살고 있는지 명료하게 알았다. 핸드폰을 활용한다고 착각했었다. 핸드폰 없는 생활은 거의 불가능한 수준에 가까웠다. 무엇을 못 챙길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스케줄과 연락처는 복구가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어찌 핸드폰만일까. 현대의 생활은 어쩌면 예속의 연결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노동 역시 제한된 범위에서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하나일 것인데 우리는 노동을 중심으로 우리 삶을 구성해 버린다. 그렇다면 ‘노동’을 중심에 두지 않는 삶은 어떻게 가능할까?

독립적인 삶, 노예적 삶 두 가지 모두 가능하다.

  가난하면서도 즐겁고 독립적이라는 것! 그것들은 동시에 가능하다. 가난하면서도 즐겁고 노예라는 것! 이것도 가능하다. 그리고 나는 공장 노예 제도의 노동자들이 이보다 더 좋은 상태에 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 만약 그들이 지금 상태처럼 기계의 나사로, 또 말하자면 인간의 발명품에 대한 보완물로 소모되는 것을 치욕이라고 느끼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면 말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 아침놀 / 책세상 / 206, 227쪽 》

노예적인 삶은 가능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전제가 필요하다. 노동은 조직이 설정한 과업을 수행하는 것이다. 전체의 부품처럼 작동해야 노동이 가능하다. 자신이 사라지는 것을 치욕으로 느끼지 않아야 노예적 삶은 가능하다. 그러나 예속에도 불구하고 그 삶을 즐겁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노동자의 삶은 가난한 삶이다. 독립적인 삶도 가능하다. 독립적인 삶은 시대성을 따르지 않는 것이기에 독립적인 사람은 가난해 질 것이다. 그러나 독립적인 삶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마치 공자가 말하는 ‘안빈낙도’의 삶과도 같다. 그러나 불가능한 삶도 있다. 노동과 부를 자기 삶의 중심으로 가져오면서 독립적인 삶을 바란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노동은 예속적인 삶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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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의 부품처럼 작동해야 노동이 가능하다. 자신이 사라지는 것을 치욕으로 느끼지 않아야 노예적 삶은 가능하다.

독립적인 삶은 결코 녹록하지 않다. 독립적인 삶에서는 대중의 욕망에 끌려가지 않고 거리를 둘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통념적이지 않은 것으로 자신을 채워가야 하기 때문에 고립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독립적 삶은 자기 자신에게 집중할 때 가능하다.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 충동을 적용해보고 그 충동이 만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두어야 한다. 가령 하루 중 일정 시간에 자기 자신에 대해 질문하고 탐사하는 공부의 시간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니체는 사회제도가 변화해야 내 삶도 변화할 수 있다는 주장을 비판한다. 니체가 보기에 외부가 변화하기를 기다리면서 지금의 삶을 바꾸지 않는 것은 변명에 불과하다. 그때 나는 반응으로 존재하게 된다. 니체는 묻는다. 당장 그렇게 살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그는 ‘지금의 삶과 다른 차이를 발생시켜라. 그럴 수 있도록 자신이 서있는 장을 바꿔 버리라’고 말한다.

그래서, 니체는 말한다. 동일한 장 안에서의 싸움으로는 판을 뒤집을 수 없다고. 새로운 장의 싸움으로 바꾸라고. 어떤 때 풀리지 않는 문제가 전제 조건을 뒤집었을 때 풀리게 되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여전히 노동과 부에 가치의 중심을 두면서 그 룰을 바꾸는 데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관점을 자신에게 이동하여 새롭게 노동과 부를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그것은 마치 이민을 가서 새로운 장을 구성하는 것과 같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은 같은 장에서 싸우며 승리하는 법이 아니다. 장을 바꾸고 새롭게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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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필요한 능력은 같은 장에서 싸우며 승리하는 법이 아니다. 장을 바꾸고 새롭게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제 처음 제기했던 문제로 돌아가 보자. 노동을 통념적 가치고 받아들이고 나면 노동이 제공하는 것들로 살아가는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니체의 노동 비판은 그것이 나를 위해 질문을 던질 시간조차 앗아 가버리기 때문이다. 노동은 쉽게 익숙하게 하고 반복하게 하여 자신을 잊게 만든다. 자신이 떠난 자리를 부와 노동의 욕망이 대체해 버리게 된다. 니체는 노동에 예속된 욕망을 예리하게 비판한다. 우리가 그 욕망으로 자기 자신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니체는 노동과 부가 제공하는 대가를 대차대조표의 차변에 위치시킨 후 자유로운 호흡을 대변에 놓아 계산한다. 그리곤 비교 불가함 것임을 명료하게 보여주었다. 우리에게도 노동의 대차대조표를 계산 할 시간이 필요하다. 만일 그 시간을 몇 시간이라도 갖는다면 자신의 삶에서 노동의 자리가 또렷이 보일 것이다. 니체는 우리에게 자신을 위해 다른 것들을 활용하는 주인으로 살라고 말한다. 우리에게는 자신을 위해서 생활을 재구성할 능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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