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주 란 (감이당 금요대중지성)

숫타니파타는 모두 5개의 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피안가는 길의 품>은 그중 가장 뒤에 있지만 실은 가장 오래된 경이다. 그래서 이 경을 읽으면 이제 이름이 막 알려지기 시작한 젊고 참신한 사상가로서의 붓다를 만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점은 숫타니파타에 실린 경들의 일반적인 특성이기도 하지만, 이 <피안가는 길의 품>은 품 전체가 하나의 이야기 시처럼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가르침의 말씀 위주로 편집된 경에 비해서 등장인물도 다양하고 배경적인 요소도 좀더 풍부해서 당시의 시대적이고 사상적인 배경을 생각해 보기 좋다.

간단히 전체의 줄거리를 짚어보자면, 한 명망 있는 바라문이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데 붓다라면 해답을 알려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16인의 제자를 파견한다. <서시의 경>에는 바라문의 곤경과 문제 해결까지의 과정이 담겨 있고, 그 뒤에는 16인의 제자들이 저마다 붓다께 답을 구하는 경들이 이어지며, 마지막으로 짧은 에필로그 격의 경으로 끝을 맺는다. 이 글에서는 우선 <피안가는 길의 품>의 첫 번째 경인 <서시의 경>을 중심으로 보려고 한다. <서시의 경>은 제목에서도 짐작되듯, 뒤에 나오는 나머지 경들의 인트로 역할을 하는 경이면서 동시에 독자적으로 완결적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뇌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상당히 자세히 나와 있다. 나이는 백 스무 살이고, 성은 바바린이고, 몸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으며, 세 가지 성전에 통달해 있습니다. 위대한 사람의 특징과 고전설과 어휘론과 의궤론에 통달했을 뿐만 아니라, 오백 명의 제자를 가르치며, 자기가 가르치는 진리의 극치에 도달해 있습니다.” (stn. 1019,1020) 세상에! 바라문 바바린은 “자기가 가르치는 진리의 극치”에 이른 무려 120 세의 노학자이자 성직자였다. 거기에 “그는 혀를 얼굴로 덮고, 그의 양미간에는 곱슬털이 있고, 음부는 말처럼 감추어져 있습니다.”(stn. 1022)라고 하니 위대한 사람의 특징까지 지닌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명성이나 권세를 추구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기에 번화한 대제국 꼬쌀라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고자 남쪽 변방의 고다바리 강변으로 내려와 “이삭 줍고 열매 거두는” 삶을 살고 있었다. 이런 현인조차 해결하지 못한 어려움이 있었다니 그게 대체 무엇이었단 말인가?

어느 날 바바린의 소박한 처소에 “발은 붓고 목은 타며, 치아는 불결하고, 머리는 먼지로 뒤집어 쓴” 수상한 사내가 방문했다. 그 사내 또한 바라문의 신분이었다. 그는 바바린에게 다짜고짜 500금을 보시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바바린에게는 그럴 여력이 없었으므로 정중하게 자신의 처지를 설명했다. 그러나 그 수상한 바라문은 무서운 목소리로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우며 저주의 말을 남겼다.

지금부터 이레 후에
당신의 머리가 일곱 조각으로 터질 것이오.”

일주일 뒤에 머리가 일곱 조각으로 터진다니!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마음의 안정을 잃은 바바린은 식사는커녕 선정에도 들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은가? 인품과 경륜과 학식등 모든 조건을 두루 갖춘 노(老) 바라문이 저런 야비한 뜨내기 바라문의 협박에 이렇게 맥없이 흔들린다니.

우선 첫 번째 의문. 왜 바바린은 뜨내기 바라문에게 두려움을 느꼈나? 우리는 바바린이 매우 훌륭한 바라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뜨내기 따위는 무시해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팩트는 바바린이 저주에 걸려들었다는 것이다. 거기엔 경에 나온바 뜨내기의 불길하고 거친 외양도 한 몫 했을 것이다. 베다는 전통적으로 소리를 중시하는 종교다. <축의 시대>의 저자 카렌 암스트롱은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듣는 행위를 통하여 신에게 다가간다고 생각했다. … 맹세도 일단 입 밖으로 나오면 영원한 구속력이 생겼다.”(축의 시대, 26p) 베다의 신성한 지식은 단지 말의 의미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소리에서도 왔는데, 이 소리 자체가 데바였다.”(같은 책, 44p) 바라문 계층은 이 신성한 지식을 독점하는 계층이며, 그 지식을 통해 힘을 소유하고 행사했다. 아마도 뜨내기 바라문은 바바린으로서는 알지 못할 주문을 외웠을 것이다. 자신을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더 큰 힘을 지닌 존재다. 물론 그가 사기꾼이라면 별개의 이야기지만, 그는 어쨌든 바라문이었고 그걸 인정하는 한 바바린으로서는 그 힘에 지배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의문은 왜 하필 머리가 터질 것이라는 저주를 내렸는가이다. 이 저주는 바라문들 사이에서 지식을 겨루던 제의 방식과 관련이 있을 법하다. 그들은 제의를 할 때 브라만의 신비를 표현하는 언어적 형식을 찾아내는 “브라모디아 시합”을 벌이곤 했는데, 패배자는 실제로 목을 잘리기도 했다고 한다. 진리를 설명하지 못하는 사람의 머리는 땅에 떨어진다는 것이다. 바라문교의 이런 전통은 희생제의 안에 깃든 폭력성과 아마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아무튼 머리를 쪼갠다거나 머리가 떨어진다는 건 나름 전통있는 저주방식인 것이다. 베다의 경전인 우파니샤드에도 이런 대목이 있다. “가르기여, 그대는 그대의 머리가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너무 많이 질문하지 말아라.”

그럼 이렇게 제대로 걸려든 바바린을 붓다는 어떻게 구원했을까? 붓다의 답은 명쾌했다. “무명(無明)이 머리인 줄 알아야 합니다. 믿음과 새김과 삼매와 더불어, 의욕과 정진을 갖춘 지혜가 머리를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붓다는 그 저주가 틀렸다고 말하지 않았다. 해석을 달리 했을 뿐이다. 분명히 머리는 일곱 조각으로 산산이 부서질 것이다. 하지만 부서질 머리는 목 위에 달린 머리통이 아니라 무명(無明), 즉 어리석음이다. 무엇이 무명인가? 모든 존재는 단독적이고 영속적인 실체가 아니라, 조건에 의해서 순간순간 생겨나고 스러진다는 진실을 밝게 보지 못하는 것이 무명이다. 그 무명 때문에 우리는 자기 자신이라는 환상을 만들고, 그 환상을 아끼고 집착하고 잃을까 두려워한다. 붓다를 만나 지혜를 얻었으니, 그 무명도 이제 깨질 때가 된 것이다. 뜨내기 바라문의 주문은 붓다에 의해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성취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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