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소녀, 사랑받는 ‘여자’가 되기로 결심하다 - 1)

김석영(남산강학원 청년스페셜)

소녀를 끌어당긴 ‘패션 잡지’

패션 잡지를 처음 펼쳤던 때가 언제였을까.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내가 아주 작은 아이였을 때였다. 초등학교 2~4학년 때쯤 이었을까. 제사나 명절 때 마다 갔던 큰집, 사촌언니의 방 한 구석에는 각종 패션 잡지들이 널려 있었다.

그 책들은 어린 나에게 인형 옷 입히기만큼 흥미진진했다. 책 속에는 온갖 ‘예쁜 것’들이 넘쳐났다. 어린 나의 혼을 단번에 쏙 빼앗아갈 만큼! 추석이든 설이든, 언니의 집을 방문할 때, 수줍음 많던 나의 관심은 단연 어색하고 어려운 친척들보다는 잡지책 쪽으로 향했다.

설레는 맘으로 언니 방 침대에 누워 잡지책을 집어 들면, 휘황찬란한 세계가 펼쳐졌다. 알록달록, 동화 속 그림마냥 예쁜 옷을 입은 화보 속 모델들. 그리고 놀랍게도 일상 속에서도 그에 뒤지지 않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스트릿 패션 포토’ 속의 매력적인 언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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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단번에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나도 이렇게 예뻐지고 싶다! 이렇게 멋있어지고 싶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아니, 보고만 있어도 나는 벌써 아리따운 모델이나 헐리웃 스타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걸 본 나는 마음속으로는 나 역시 그들처럼 어여쁜, 도도한 표정을 몇 번이고 지어봤을 것이다. ‘그래. 나도 이렇게 멋있어질 거야!’

‘여자’라는 정답을 발견하다.

잡지책엔 예쁜 옷들만큼, 예쁜 사람들이 잔뜩 나왔다. 어린 나는 놀랐다. 와, 세상에. 이렇게 멋진 사람들도 있다고!? 그리고 얼마나 예쁘면, 얼마나 멋쟁이이면 이렇게 잡지책에까지 실리는 걸까? 이렇게 잡지에 실린 걸 보면, 그들은 ‘자타공인’ 멋쟁이인 것이 틀림없다. 그러니까 이 언니들은 나를 모르지만 나는 이 언니들의 사진을 보고 있는 것이지!

‘나도 이렇게 될 수 있을까?’ 나 또한 ‘멋쟁이’로 인정받고, 잡지책에 실릴만한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황홀할까…! 작은 섬나라(제주)에 사는 소심한 소녀였던 나의 현실은, 단연 그들과 거리가 멀어 보였다. 하지만 언젠간 나도 존재적으로 ‘정답’이 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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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로 산다는 건, 멋지고 근사한 것 같았다. 남자들은 누릴 수 없는 것을 여자들은 누린다. 잡지책 속 여자들의 우아한, 행복한 표정을 보라. 그리고 그녀들을 둘러싸고 있는 온갖 예쁜 것들을 보라. 그건 여자들의 여유와 특권을, 여자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를 말해주는 듯 했다. 나도 이렇게 될 수 있을까? 아니 잠깐만, 애초에 나는 ‘여자’잖아?

아. 나는 그들을 보고 배우면 되는 것이다! 운 좋게도 잡지책은 무척 친절했다. 예쁜 화보와 멋진 언니들 사진에 눈길을 빼앗긴 채 페이지를 넘기면 다음 페이지에서는 어떻게 하면 나 또한 이런 ‘여자’가 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구구절절하게 알려주는 것이다.

우선 이런 코너(?)가 있었다. . ‘어떻게 멋지게 다리를 꼬고 앉을까’, ‘어떻게 쿨 해 보이게 가방을 멜까’등등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엉덩이를 등받이에 붙여 앉지 마세요. 대신 엉덩이를 의자 끝에 반만 걸쳐 앉고, 등은 살짝만 기댄 채로, 다리는 90도 각도를 유지하며 꼬아 앉으세요. 누구보다 쿨해 보일 거예요!” 그래. 언니들 포스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또 ‘어떤 옷을 입어야 할까?’, ‘화장은 어떻게 해야 예쁠까?’는 기본이요, ‘어떤 속옷을 입어야 할까?’까지, 잡지책은 안내를 해준다. 그것도 몹시 구체적으로. “키스를 하게 될지 모르는 날엔 하늘하늘한, 부드러운 소재의 블라우스를 입고 가세요. 당신의 허리로 그의 손이 들어올지 모르니까요!”, “남자들에게 물어본 결과, 남자들은 이 속옷을 가장 섹시하다고 선택했답니다!”

어떻게 앉을까 부터 옷이나 속옷은 무얼 입으며, 화장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런 것들은 주로 어떻게 하면 남자들에게 더 매력적으로 보일까 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내가 반했던 그 언니들은, ‘남자들의 이상형’ 비스무리 한 것이었나 보다. 그러니까, 남자들 눈에 드는 게, 그들을 홀리는 게 ‘여자 되기’의 핵심이다!

당시에 의식적으로 이렇게 정리가 되진 않았지만, 아마 나는 그 때에도 무의식적으로 이걸 간파한 듯하다. 그러니 이런 정보도 아주 강렬하게 기억하고 있는 걸 테다. “그와 밤을 보낼 땐 이렇게 해보세요……(이하 생략)”

나의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그것들은 여자가 되고자 하는 나의 앞길에 행동지침이 되어 줄 소중한 정보들이니 말이다. 나는 물을 빨아들이는 스펀지마냥, 예쁜 언니들의 모습과, 잡지책이 던져주는 정보들을 쏙쏙 빨아들였다. 나는, ‘여자’라는 정답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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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여자다운 것’

무언가를 아주 열심히 반복해서 보거나 쓰거나 외우면 그것들은 우리 몸에 ‘새겨진’다. 왜, 중요한 걸 기억할 때, ‘마음에 새긴다’거나 ‘뼈에 새긴다’고 하지 않는가. 뭔가를 열심히 되뇌면 우리의 몸에 정말로 새로운 ‘길’이 난다. 생각 길, 행동 길. 새겨지고 나면 다음부턴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그렇게 흐르게 되는, ‘무의식’의 길이.

두 눈에 불을 켜고 잡지책을 탐독하던 나의 무의식에도, ‘길’이 났다. ‘여자가 되는 건 중요해!’라는 삶의 방향성의 길이, ‘여자가 되고 싶어!’라는 염원의 길이, ‘나는 여자야!’라는 자의식의 길이. 이제 나의 욕망은 수월하게 이 길을 따라 흘렀다. 굳이 의식하지 않을 때에도, ‘나는 여자’라는 기준에 맞추어 행동하고, 스스로 얼마나 ‘여자’라는 상에 가까운 지를 가늠하고, 더더욱 ‘여자다워’지기 위해 노력하게 된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단연 그것은 ‘남자들 눈에 성적으로 매력적인 존재가 되는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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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례로 나는 중학교 때(!!) 가슴 수술이 하고 싶었다. 아직 정신적 사춘기도, 몸의 이차성징도 오지 않은 때에. 뭐랄까, 번데기도 안 된 매미-애벌레가 자신의 울음소리가 우렁차지 않다고 슬퍼하는 꼴이랄까. 하지만 나는 정말 진지했다. 중요한 건 저기 잡지책에 나온 언니들처럼 ‘여자’가 되는 것인데. ‘섹시해지는’ 것인데. 내 가슴은 충분히 ‘여자’의 것 같지가 않았으니까!

그 어린 시절부터 대학교에 가기 전까지, 수술을 하겠다며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200만 원정도의 돈도 모았다. 용돈을 모았는지 목돈이 생겼을 때 저금을 했는지 기억은 안 난다. 확실한 건, 그 정도로 절실했다는 것이다. (다행히 돈은 계획대로 쓰이지 않았다.)

조금 더 커서, 고등학교 땐 난데없이 ‘케겔 운동’을 열심히 했다. 2007~2009년 즈음, 새벽 홈쇼핑과 인터넷 등을 통해서 그 중요성이 조용히 대두되며, 소리 없이 케겔 운동 열풍이 불었던 때를 누군가는 기억할 것이다. 나도 남몰래 그 기류에 합류했었다. 다만 홈쇼핑과 인터넷 기사의 주요 타겟 층인 주부들과 달리, 나는 남편도 없었지만 남자친구도 없었고, 성관계 경험도 없었고, 심지어는 좋아하는 남자조차 없었고…….

지금 와서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질의 탄력을 높여준다는 그 운동은 내 실질적인 생활에는 하등 이로울 것 없는, 나와는 상관없는 짓이었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그걸 ‘해야 한다’고 느꼈다. 나는 여자니까. 여자는 남자를 만족시킬 줄 알아야 한다. 그러니 질의 탄력이 높은 게 얼마나 중요하겠는가! 조금 허무맹랑해보일지라도. 다른 게 아니라 탄력 있는 질을 가지는 게, 조금이라도, ‘여자다운’것이었다. 그것은 내게 무척 중요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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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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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팽
Guest
이달팽

우아 ! 다른 성욕의 탄생 ! 시작되었군요 !!
첫 글부터 흥미진진, 생생 합니다!
앞으로의 새로운 ‘길’을 응원해요 !

다영
Guest
다영

언니 어린 시절부터 많은 시도들을 했군영ㅋㅋ 이젠 어떤 시도들을 할지 기대됩니당!!

moon彬
Guest
moon彬

다른 성욕의 탄생!! 기대됩니다~~!!
패션 잡지가 이렇게 큰 영향을 주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