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혜 숙(감이당 금요대중지성)

낙엽은 슬퍼하지 않는다

바람이 부쩍 서늘해진 며칠 전 남산 산책길을 걸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들이 눈앞에서 우수수 너울거리며 떨어져 내렸다. 각양각색 낙엽들이 떨어지는 장면은 장관이었다. 오~ 아름다워라!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함께 걷던 동료의 말처럼 어디를 보아도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그 장면 속 우리는 영화의 주인공이고.^^ 그러다 문득 느꼈다. 아 벌써 올해도 저물어가는구나. 어느새 늦가을이니 바로 겨울이 닥치겠구나. 봄에서 여름으로 여름에서 가을로 가을에서 겨울로, 계절은 이렇게 ‘변함없이 변화’한다. 자연의 일부인 인간 역시 그 흐름과 함께한다. 무상한 세계 속에 무상한 존재로서 쉼 없이 변하고 있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없다! 이렇듯 무상無常은 모든 존재의 실상이다.

낙엽이 낙엽일 수 있는 것은 변하기 때문이다. 무상성이 이미 낙엽이라는 존재 안에 내포되어 있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도 변화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이다. 아니면 인간의 모습을 한 로봇이겠지. 그런데 낙엽과 달리 인간은 이런 무상함에 불만족과 괴로움을 느낀다. 불교는 인간의 근원적 고통이 거기에 있다고 말한다. 무상함에 대한 철저한 통찰이 지혜를 터득하는 알파요 오메가인 이유이다.

낙엽은 제 명을 다했다고 슬퍼하지 않는다. 무상함 앞에서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건 인간뿐이다. 아기에서 어른으로 노인으로 마침내 죽음으로 가는 생로병사의 무상함은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애초 무상한 존재로 태어났으면서 이 무상함 앞에서 왜 인간만이 고(苦)를 느끼는가.

무상함이 괴로움이 될 때

인간이 괴로운 이유는 ‘고정된 나’, ‘지속되어야 할 나’가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매 찰나찰나 변하고 있다. 어느 것도 예외는 없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 변화의 속도만큼 의식하지 못할 뿐. 그런데 인간은 결정적으로 자아의식을 형성했다. 생존하기 위해 만든 세포막이 견고한 자아의 방이 되었다. 자타를 구별하며 자기보존을 해야 하는 인간의 몸, 인간의 뇌가 만들어낸 의식이다. 그 중심에 ‘나, 나의 것, 나의 자아’라는 관념이 있다. 이 관념은 ‘정해진 나’ ‘그러해야 하는 나’ ‘본질적인 나’ 등등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렇게 고정되고 변하지 않는 ‘나’가 있다는 관념은 실상이 아니라 허상이고 망상이라는 게 붓다의 깨달음이다. 매 찰나 변하는 세계의 실상과 부합하지 않는.

태어나면서부터 반드시 되어야 할 ‘그런 나’란 없다. 우리는 애초부터 엄마로 아빠로 학생으로… 되어야 하는 건 아니다. 모든 나뭇잎들이 다 아름다운 가을 낙엽이 되는 게 아니다. 같은 나무라도 처한 조건에 따라 얼마나 운명이 달라지는가. 땅과 햇빛과 바람과 벌레와 날아드는 새들과… 그 우연적 조건의 차이는 헤아릴 수 없다. 매 순간 달라지는 이런 인연조건들 속에서 존재 또한 변해간다. 나무도 사람도 모든 사물들도. 그렇게 조건에 따라 어떤 존재로도 될 수 있는 게 인간이다. 그런데 또한 인간의 타고난 속성은 고정된 자아를 형성하고 그것을 유지하려한다. 이 간극에 인간의 근원적인 괴로움이 존재한다. 게다가 6~7만 년 전 인간의 뇌에 미래에 대한 시간관념까지 생겨났다.(정화스님) 고정된 ‘나’가 지속되는 걸 전제로 하는 미래는 알지 못하는 영역이다. 그러니 인간에게 불안과 괴로움은 필연적이라 하겠다.

‘무아’의 존재로 사는 길

어떤 우연적 사건이 끼어들지 모르는 게 삶이다. 죽음은 그런 불확실성으로 인한 괴로움의 최종심급이리라. 애초 하루아침에 가족과 자식을 잃은 빠따짜라와 끼싸고따미의 이야기로 이 연재 글을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겪은 고통스런 사건을 계기로 생사의 경계에서 자유로워졌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들은 무엇을 깨달았다는 것일까.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못보고 백년을 사는 것보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  (게송113)

불사의 진리를 보지 못하고 백년을 사는 것보다 불사의 진리를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  (게송114)

그들에게 들려준 붓다의 게송이다. 여기서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 ‘불사의 진리’를 보는 것은 곧 매 찰나찰나 변하는 무상함의 실체를 터득하는 일이다. 말 그대로 ‘찰나 생 찰나 멸’하는 존재의 실상을 보는 것! 하여 ‘무아無我’의 존재로서 변화하는 것! ‘무아’는 고정된 나는 없고 이렇게 매 찰나 ‘변해가는 나만 있다’는 말이다. 무상과 무아에 대한 통찰은 자신이 붙들고 있었던 자아의 집을 부수고, 그에 들러붙어있는 집착과 어리석음을 부순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붓다는 또 다른 게송으로 명료히 알려준다.

이 몸은 물거품과 같다고 알고 아지랑이와 같다고 깨닫는 님은 악마의 꽃을 잘라버리고 죽음의 왕의 시야를 넘어서리라.  (게송46, 꽃의 품)

물거품을 보는 것처럼 아지랑이를 보는 것처럼 이 세상을 보는 사람을 죽음의 사자는 보지 못한다.(게송170, 세상의 품)

물거품과 아지랑이는 그 순간 형성된 조건에 따라 바로 생겨났다 사라진다. 우리 몸이 만들어내는 생각이나 의식도 똑같다. 그때그때 매 순간 조건에 따라 변한다. 이렇게 인연조건들과 만나 변해가는 나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의 요지다. 멈춤(사마타)과 통찰(위빠사나)은 그 가르침을 신체적으로 터득하는 명상수행법이다. 자기 몸과 마음을 스스로 조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위함이다. 초기불교에서 붓다가 강조하고 있는 이 수행법은 매 순간 일어나는 몸과 마음의 변화를 미세하게 알아차려 그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에 초점이 있다.

빠따짜라와 끼싸고따미에게 자식과 가족은 ‘나, 나의 것, 나의 자아’에 속하는 인연의 장이었다. 붓다를 만나 이들은 삶의 방향이 바뀌었다. 내 자식, 내 가족의 죽음이라는 무상한 사건을, 우주 존재의 법칙인 무상함의 원리로서 체득해 승화시켰다. 고정된 ‘나’로 살아왔던 기존의 일상과 욕망이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 깨달았다는 건 지금 이 순간의 인연조건을 온전히 사는 존재로 거듭났다는 말이다. 매 순간 변화해가는 ‘무상’과 ‘무아’의 존재로서. 이들이 인간의 근원적 고통인 생사의 문제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던 이유이다.

낙엽은 그 자체로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다. ‘저절로 그러한’ 무상한 자연으로 거기 그 자리에 있을 뿐. 그저, 끊임없이 ‘나’를 주장하며 ‘무상하게 무아로서’ 살아가지 못하는 자의 눈에 아름다워 보였을 뿐이다. 무상성 그 자체로 존재하는 모든 존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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