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스님 8월 선물강좌 중

자비의 배경을 말하는 법화경과 화엄경

자기가 자신한테 자비로울 수 없는 것, 대승불교에서는 바로 이런 생각을 깨뜨리는 데 가장 큰 일조를 했어요. 그 중에 가장 큰 경전이 법화경이나 화엄경이라고 할 수 있는데, 법화경의 마지막 부분에 보면 무슨 경이라고 나오냐면 ‘상불경 보살품’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요. 항상 언제나 다른 생명체를 가벼이 여기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하겠다 라고 원력을 세우는 거예요. 항상. 왜냐하면 법화경은 모든 생명체는 궁극적으로 부처가 된다고 하는 것을 이야기한다는 거예요.

그 다음에 화엄경이라고 하는 것은, 한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시간과 공간에 있는 사건, 그 한 사건이 개입돼서 그 사건을 만들어냈어요. 한 개인이 태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심지어 내가 태어나는 진화적 역사로 보면, 40억년 세월이라고 하는 진화의 과정이 내게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비록 100년 전에 태어났어도 100살이 아닌 거예요. 진화론 생물연대로 보면 40억 살이 되는 거고요. 내 몸을 이루는 수소로 보면 138억 살입니다. 근데 138억 년 전에 우주에서 빅뱅이라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수소가 만들어집니다. 그 수소가 지금 내 몸 속에, 물속에 들어있는 수소와 똑같아요. 수소는 그 때 만들어진 수소가 지금까지 계속 돌려쓰기를 하는 거예요. 근데 그 138억 년 전에 생긴 사건이 나한테 지금 들어와 있는 거예요. 그것이 앞으로 이것은 내가 죽는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고 앞으로 계속 가는 거예요.

그 다음에 우리 몸에 들어있는 유전정보만 하더라도 바이러스한테 거의 60프로를 받았습니다. 사람한테 받은 건 거의 없어요. 사람은 나온 지도 얼마 안 됐고 지구상에서. 유전자로 보면 다른 유전자라고 해서 스티븐 제이 굴드라고 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개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유전자로 보면 아무런 개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개체마다 그 개체가 살아온 시공의 전 역사를 담아서 그 개체가 됐다 라고 보는 것이 화엄경입니다.

그 다음에 궁극적으로는 깨닫게 되는 거예요. 자비의 배경은 이처럼 한 생명체가 존재하기 위해서 마치 어떤 물시처럼 국화꽃이 피기 위해서 소쩍새가 운다고 하는데, 진짜 우리 한 인생을 통해서 전 우주의 역사가 그렇게 흐른다는 거예요. 내가 다른 것과 함께 연대적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에 대한 이유예요.

‘나의 확장’에서 ‘자비의 확장’으로

자비롭게 사는 것이 어떤 게 자비라 할지 막막하지만. 자비롭게 살아야만 된다 라고 하는 것을 몇 천 년 전에 우리 선조들이 깨달아버렸어요. 새로 만들어진 인류의 삶의 배경이 아니고, 삶의 근원적 배경 자체가 자비롭게 살아야 된다 라고 깨달은 거예요.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그 일이 안 일어나요. 시상만 가지고는. 신피질이 커져야 해요. 그래서 현세 인류에 와서 단순한 문화 활동만 하는 게 아니고 삶의 배경을 잘 이해하게 됐는데 그 배경이 뭡니까? ‘나의 확장’입니다. ‘나의 확장’이 사실상 오늘 이 더위를 보면 바로 나를 어디까지 확장해야 할 것인가를 바로 압니다. 이 더위의 배경 중에 가장 큰 배경 중에 하나가 인간의 무분별한 화석 연료 소모죠. 더워 죽겠어요.(웃음)

근데 그것의 원인 제공자가 인류가 이유가 상당히 큰 거예요. 내가 공기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가 공기가 나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거예요. 내가 사람한테 어떻게 대하냐 할 때 오는 말이 좋아야 가는 말이 좋은 것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그냥 직관적으로 이해했다 하고 경험적으로 이해했다 할지라도, 오늘날에 와서는 내가 공기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가 공기가 나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정해줍니다.

자비의 확장입니다. 이 연기라고 하는 말은 어디까지가 정해진 게 아니에요. 그렇다고 해서 외부적으로 자기가 자기를 자애롭게 보는 심성을 확장하지 않으면 공기를 자애롭게 보기가 쉽지 않은 거예요. 정말 보기 어렵죠. 자기 자신도 온전히 확장해서 보기가 어려운데 공기까지 보려면 쉽지 않겠죠. 자기 삶이 보기 어려운 것은 그래도 남이니까, 자신이라 해도 사실상 유전자로 보면 외국에 있는 자신이나 여기 있는 자신이나 90프로 유전자가 똑같으니까 그냥 내 자신이라고 말해도 별로 틀린 말은 아니에요. 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유전자하고 외국에 있는 누군가의 아들하고 유전자는 99.9퍼센트가 똑같아요. 0.1프로가 차이가 나요. 0.1프로의 차이를 크게 보면 그 이는 전혀 다른 외부자가 되는 거고, 99.9프로를 크게 보면 내부자인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그리고 0.1프로 중에서도 부모와 자식 간에는 또 뭐가 있겠죠. 학습, 기운 등등에서 문화적인 것과 일치하는 배경이 있고 해도 궁극적으로는 타인입니다. 자식과 부모도. 자식이 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나는? 나조차도 온전히 확장되어 있지 않은 거예요. 자기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확장한 거예요. 그 확장이 커졌을 때 거기에 자식과 이웃과 심지어 환경이 들어올 수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에서 이제 자칫 잘못하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배경지식이 틀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배경 지식을 가지고 막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 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배경지식을 잘 선택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자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제 이러한 자기의 자비 인식을 실제로 하기 위해서는 이게 ‘상’입니다. 시상 내부에서 이미 만들어진 정보들이 계속 들어와서 이제 이미지가 만들어져요. 이미지가 딱 만들어져야 깨어있는 의식이 돼요. 깨어있다는 말은 잠을 자지 않는 상태라는 말이에요. 부처처럼 깨달았다는 말이 아니고. 이 이미지는 과거의 영향력이 굉장히 큽니다. 이 생명체들은 살아오면서 과거를 보존하기 위해서 기억이라는 시스템을 만든 게 아니에요. 뭡니까? 내일을 어떻게 맞이할까를 준비하면서. 그래서 자신의 과거는 실제로는 미래의 준비예요. 더 강하게 말하면, ‘준비된 미래’예요.

그래서 나를 볼 때 내가 맘에 안 드는 것이 많으면 어떻겠습니까? 많으면 내일의 나는 더 마음에 안 들도록 되어가는 거예요. ‘나는 이런 것이 마음에 안 들어’ 설사 내가 여러 가지 조건들로 만들어졌다 할지라도 그것을 고려하더라도 ‘마음에 안 들어!’ 니체 책을 보면 여러분들, 상당히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은 거의 다 ‘운’이라고 했어요. ‘운’이라고 하는 말은 무슨 말이냐면, 내가 준비한 미래가 나의 미래가 될 확률이 거의 없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도 준비하고 있지만 많은 다른 준비들이 우연히 만나서 내 미래를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거예요.

이렇게 만들어진 걸 보고 나는 이제 ‘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미래가 나에게 현실화 되는가’라고 볼 것인가, ‘이것도 나지. 좋아! 이것도 한 삶이야’라고 볼 것인가가 자기 삶이 살만한 삶인가, 아니면 ‘아이 괜히 살았어.’ 하는 삶이 될지를 결정합니다. 나의 확장이란 이런 저런 선택을 쌓고 쌓고 그래서 되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냥 우리가 이렇게 살았어요. 그러니까 그냥 내가 서울에 안 태어나고 시골에 태어난 것이 운인 거예요. 내가 서울에 태어났으면 서울에서 했을 일들을 시골에 태어났을 땐 전혀 못하는 거예요. 반대도 마찬가지죠.

이렇게 만나는 것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라고 하는 것에서 자기 삶이 괴롭기도 하고 즐겁기도 한 거예요. 그래서 기억이란 게 다 자기 삶이 확장되는 거예요. 기억이 확장되는 만큼 괴로운 삶도 확장되는 거고, 즐거운 삶도 확장이 되는데, 괴로운 삶은 좀 적게 하고 즐거운 삶을 만들어 내자는 거예요.

댓글

avat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