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니체] 청년과 에로스 - 1)

신근영(남산강학원)

결국 니체는 깊어진 병으로 1871년 2월 남은 학기를 휴강하고 요양 차 여행을 떠났다. 쫓기듯 허겁지겁 지내야 했던 대학의 일과에서 벗어나 깊게 사유하고 탐구하며 지내는 시간들. 니체에게는 그것이 휴식이자 치료였다. 니체는 여행지에서 그간의 사유들을 하나로 모아 《비극의 탄생》을 썼다. 그리고 그해 말, 니체는 활기를 되찾고 대학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그 활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1872년 《비극의 탄생》이 출간되자 니체는 논란의 한 복판에 서게 되었다. 《비극의 탄생》에서 니체는 소크라테스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비극에 관해서는 문외한이며, 비극으로서의 삶을 감당하지 못하는 겁쟁이라고.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의 글이 전혀 문헌학적이지 않다는 점이었다. 니체는 고문서들을 모으고 분석하기보다는 탐구하고 싶었고, 증명하기보다는 사유하고 싶었다. 요컨대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철학을 하고 있었다. 허나 고전 문헌학이 하나의 “학문”인 한, 그것은 허용되지 않는 일이었으며, “학자”로서 지적인 방종이자 허세일 뿐이었다. 그를 아꼈던 대학 시절 은사도, 학계도, 학생들도 그를 외면했다.

니체의 문헌학에 대한 회의는 학문 전반에 대한 회의로 바뀌어 갔다. 학문은 삶을 위한 진리가 아니라 학문을 위한 진리를 원했고, 학자가 헌신해야 할 것은 삶이 아니라 학문 그 자체였다. 그러니 학문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쯤은 가볍게 무시할 수 있어야 했다. 이것이 학문의 장엄한 전당이 요구하는 세계였다. 니체는 그 세계에 속이 꽉 막힌 듯한 갑갑함을 느꼈고, 갈수록 학자라는 것에 진력이 났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해서 강의를 해야 했다. 삶이 아니라 학문을! 니체는 자신이 원치도 않으며, 옳다고 생각지도 않은 일을 해야 했던 것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거짓이었고, 니체에게 거짓은 그 무엇보다 곤욕스러운 일이었다. 그의 하루는 배움의 기쁨 대신 몸을 가눌 수 없는 피로로 끝났다. 생계를 위한 밥벌이 노동으로만 하루를 가득 채우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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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 스물여덟 청년의 몸은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극심한 눈의 통증과 편두통이 수시로 니체를 덮쳤다. 그럴 때면 그는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고, 겨우 먹은 음식들조차 토해내기 일쑤였다. 그렇게 한바탕 앓고 나면 쇠약해진 몸에 다른 병들이 찾아들었다.

그럼에도 니체는 어떻게든 강의를 진행하고 글을 쓰려 했다. 통증으로 눈을 뜰 수 없을 때면 친구의 도움을 받아 구술로라도 집필을 강행했다. 이런 행동들이 병을 더 나쁘게 할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그렇게 사유하고 쓰는 것 말고는 자신의 고통을 이겨낼 방도를 니체는 알지 못하는 듯 했다.

니체의 삶은 하루가 다르게 시들어가고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대학교수로서, 학자로서 열심히 살려고 하면 할수록 그는 자신의 삶을 놓치고 있었다. 교수가 되든지, 아니면 자기 자신으로 살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할 것 같았다. 이것은 무얼까. 나름 안정된 직업, 그것도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직업 아닌가. 더욱이 여기는 대학이다. 신의 예속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킨, 바로 그 학문이라는 것이 펼쳐지는 곳 말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한없이 갑갑하기만 한 것일까? 왜 점점 삶은 소진되어가기만 하는 것일까? 뭐가 삶의 안정이고 성공이며, 학문이 신에게서 얻어낸 승리란 대체 무엇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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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대, 희망의 시대?

니체는 1873년에서 1876에 걸쳐 《반시대적 고찰》을 쓴다. 서로 독립된 네 편의 글로 구성된 이 책은 한마디로 말해 “호전적”이다. 이십 대에서 삼십 대로 넘어가고 있는, 《반시대적 고찰》의 청년은 분노하고 있다. 그리고 질문을 던진다. 분노만큼 예리한 사유의 칼날을 휘두르며 시대와 그 시대의 한복판에 서 있는 자신에게 거침없이 달려든다. “네 편으로 된 《반시대적 고찰》은……내가 몽상가가 아니라는 점, 내가 검을 빼는 일을 즐거워한다는 점을 입증하며―아마도 내 손목이 위험하리만큼 자유롭게 움직인다는 점도 역시 입증하고 있다.”(《이 사람을 보라》, 책세상, 397쪽)

니체의 싸움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과거 유럽은 오랜 기간을 어둠 속에서 헤매야 했다. 신의 이름으로 예속이 정당화되던 세계, 삶은 신분이라는 멍에에 묶여 있었고, 왕과 영주의 한마디는 힘없는 이들의 생사를 갈랐다. 보통의 사람들이 가진 권리라고는 몸을 바쳐 충성한다는 의무가 전부였고, 불평등은 그 자체로 정의였다.

문자는 특권층의 전유물이었으며, 까막눈인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들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믿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또한 종교에 갇힌 욕망은 생산력과 기술력의 발전에 무관심했다. 가난으로 배를 곯는 일이 삶의 숙명처럼 여겨졌고, 전염병이 돌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여성에게 출산은 죽음의 공포였고, 갓난아이들은 이름조차 얻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계몽의 시대가 왔다. 엔라이튼먼트 Enlightenment, 빛이 어둠을 몰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신의 말씀이 아닌 진리가, 신앙이 아닌 학문이 신의 권좌를 대신하며 새로운 삶을 열었다. 사회를 억압했던 종교는 그 힘을 잃어갔으며, 욕망은 자유롭게 풀려났다. 신분제는 과거의 유물처럼 취급되었고, 왕들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거나 허울 좋은 이름이 되어갔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기술력과 생산력은 생존을 위협하던 많은 것들을 몰아냈으며 삶의 질을 높였다. 계몽의 빛은 잠들어 있던 정치, 경제, 사회를 깨웠고, 그 모든 것들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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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신은 물러갔고, 니체의 시대가, ‘근대’라 불리는 그 시대가 열렸다. 그 속에서 독일은 통일국가로 화려하게 부활했고, 시장은 상품들로 들썩거렸으며, 학문은 융성했다. 물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들 역시 머지않아 해결될 것이었다. 아침은 밝았고, 이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을 터였다. 사람들은 희망으로 뜨거워졌고, 밝은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시대를 가득 채웠다.

그러나 니체는 이제 막 시작된 아침의 그 빛 속에서 어둠을 보았다. 거기에는 정치적, 경제적 성공을 삶에 이로운 무언가를 얻은 것으로 둔갑시키는 “더 없이 악의 어린 오해”가,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삶을 갉아먹는 요소, 삶을 독살하는 요소”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로지 이 시대가 비추는 밝은 빛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 빛이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그 빛이 어떤 어둠인지를 모른 채 말이다.

빛으로 위장한 어둠, 시대를 보다.

우리는 종종 잊는다. 우리 눈을 가리는 것은 어둠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빛 또한 우리 눈을 멀게 한다는 것을! 떠올려보자. 너무도 밝은 빛 앞에서 감기던 눈. 그러면 어둠이다. 근대는 이런 빛으로 왔다. 이 시대는 결코 금지와 억압으로 우리 삶을 묶어두지 않는다. 오히려 네 욕망을 펼치라고, 자유로우라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예속이 사라진 밝은 세상이 왔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욕망은 펼치면 펼칠수록 더욱 큰 결핍감에 시달리고, 삶은 자유로워지려 할수록 갑갑해지기만 한다. 참으로 기괴한 욕망, 기괴한 자유가 아닌가. 근대의 화려한 빛은 어둠과는 또 다른 예속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근대는 빛으로 통치하고, 빛으로 삶을 예속한다. 니체는 어둠보다 이런 빛이 더 미웠다. 그저 단순한 어둠이라면 촛불 하나만으로도 길을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빛으로 인해 꼭 감은 눈에는 수백 수천의 촛불도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사람들은 근대가 비추는 빛에 도취되어 그것이 삶을 환하게 만들어줄 거라 믿고 따른다. 허나 결국 도착하게 되는 곳은 어둠의 한 가운데!

이제 우리 삶은 어떤 외적 강압에 의해 예속되지 않는다. 대신 이 시대는 우리 스스로가 우리 두 발로 예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한다. 예속을 자유라 믿고, 결핍이 욕망의 실현이라 믿고. 그러니 그 어떤 어둠보다 잔혹한 빛이 아니겠는가. 빛을 위장한 어둠, 어둠이 된 빛, 기만의 빛! 니체는 이런 시대를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 그러기엔 그는 너무 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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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가 싸웠던 그 빛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화려한 문명을 자랑하는 우리의 시대. 자본주의는 어마어마한 물질적 풍요를 만들어내고 있으며, 그 옛날 어떤 왕도 꿈꿀 수 없었던 음식들과 오락거리를 제공한다. 온갖 전자 제품들이 생활의 편의를 제공해주고 있고,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인해 글로벌 한 체험들은 일상이 되었으며, 이도 모자라 가상현실이 우리의 삶을 확장시키고 있다. 많은 질병들이 정복되었고, 정복되고 있으며, 심지어 질병의 단서가 되는 유전자를 제거하는 기술까지 등장하고 있다.

우리는 이처럼 놀랍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시대에 100세 인생을 산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말하곤 한다. 자본주의야말로 인간 본성에 가장 들어맞는 사회이자 가장 성공한 체제라고. 자본주의에 문제가 있더라도, 그것은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 어쩔 수 없는 측면이며 앞으로는 좋아질 것이라고. 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산다. 이 시대가 말하는 성공과 행복을 믿으며, 시대에 적응하려 노력하고 시대적 인물이 되려고 최선을 다하면서, 그렇게 열심히 산다.

그런데 뭘까, 이 허망함은?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분노는? 우울은? 불안은? 왜 모두가 입을 모아 너무도 살기 힘들다고 외치고 있는 것일까? 이 시대를 충분히 누릴 수 있는 돈이 부족해서? 그렇다면 재벌들은 왜 그토록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애쓰는 것이며, 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재벌 2세, 3세들은 마약에 빠져드는 것일까? 얼마가 있어야 재벌들도 목말라하는 삶의 충만함을 느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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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성공을 하든 못하든 모두가 불안한 시대. 불안을 넘어 우울과 분노가 삶을 잠식하는 시대. 이쯤 되면 니체와 함께 물어야 하지 않을까. 이 시대가, 자본이 자랑하는 그 빛이 우리 삶을 더욱 화려한 어둠으로 몰아넣는 것은 아닐까, 라고. 대체 우리는 무엇에 승리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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쩡하오
Guest
쩡하오

니체의 싸움은 언제 봐도 눙물나게 멋있네요!
공부를 할수록 점점 더 자연지와 접속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연으로부터 승리했다는 믿음을 자연스럽게 부수어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