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진숙

1. 오! 비겁한 정의 : 끈 떨어진 권력 탄핵

기원전 33년 44살의 원제가 붕어했다. 원제는 요순시대의 정치를 꿈꾸며 아버지 선제의 철권통치를 넘어서고자 했으나, 한낱 꿈에 불과했다. 왕도를 실천하는 의지도, 조정을 장악하는 힘도 부족했던 원제는 병을 핑계로 국정을 환관 석현에게 맡긴 채 음악에 빠져 지내다 생을 마감했다. 원제의 뒤를 이어 장자 유오가 20살에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바야흐로 성제(기원전 32-기원전 7년)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성제가 즉위하면서 환관 석현 일당을 탄핵하는 상소가 올라왔다. 석현은 성제 즉위 직후 좌천된 상태였다. 석현이 국정을 농단하던 때, 승상을 역임했던 위현성과 광형은 석현을 두려워하여 그 뜻을 거스르지 못했고 원제에게 간언도 하지 않았다. 광형은 뛰어난 유생으로 원제의 신임을 받으며 왕도정치의 이상을 충성스럽게 피력했으면서도 정작 현실 정치의 최대 문제인 석현의 전횡에는 눈을 감았다. 실세 앞에서 몸을 사리며 일신의 안위만 추구하던 대신들이 정권이 바뀌자 발 빠르게 움직였다, 광형이 어사대부 견담과 함께 석현의 탄핵을 성제에게 상주한 것이다. 살아있는 권력 앞에서는 꽁꽁 숨겨놨던 정의가 그 권력의 끈이 떨어지자 살아난 것이다. 그야말로 기회주의적이고 비겁한 정의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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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 떨어진 권력의 말로는 뻔했다. 탄핵으로 석현과 그 일당들은 모두 파면된다. 그리고 석현과 처자식은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울분이 쌓여 밥을 먹지 못하다가 길에서 병사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석현을 탄핵한 광형과 견담도 탄핵의 대상이 된다. 권력을 농단한 것은 아니지만 광형과 견담 또한 대신의 자리에서 석현의 악행을 묵인했으니 책임을 면할 수는 없는 법. 사예교위인 왕준이 성제에게 상소를 올린다.

  광형과 견담은 대신의 지위에 있으면서 석현 등이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고 위세를 부리며 천하에 해악을 끼치고 있는데도 제 때에 벌해야 한다고 아뢰지 못하고 아부하고 굴종하며 아랫사람에 붙어 황상을 기만하였으니 대신으로서 보필하는 책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이제야 석현 등을 탄핵하면서 자신이 불충한 죄를 진술하지 않고 선제(先帝)께서 나라를 뒤엎을 무리를 등용했다고 떠드는 것은 부도한 대죄에 해당합니다.

(반고 저, 진기환 역주, 「광형전」, 『한서』7, 명문당, 373-374쪽)

탄핵이 상주되자 광형은 병을 핑계로 면직을 간청하고 승상의 인수를 반납한다. 성제는 석현 일당은 파면했으나 광형의 탄핵까지는 허용하지 않는다. 광형이 승상으로 예의를 지키며 국정을 수행했으니 특별히 잘못했다고 말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버지 원제가 아끼던 신하들을 다 내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성제는 오히려 광형의 건강을 챙기면서 가장 좋은 술과 소고기를 하사하고 승상의 직무를 계속 수행하기를 명령한다. 그럼에도 광형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매번 수해나 한해가 있거나 풍우가 철에 맞지 않을 때마다 면직과 양위를 간청했다.

성제의 옹호에도 불구하고 광형은 결국 스스로의 잘못 때문에 면직되어 서인으로 떨어진다. 원제 때 광형은 낙안후에 봉해지면서 식읍으로 토지를 하사받았다. 식읍 받은 땅의 경계선을 잡으면서 실제보다 4백경 이상 더 많은 땅이 책정되었는데, 이후 조정에서 이것을 바로잡을 때 광형은 오히려 법제를 위반하고 토지를 반환하지 않았다. 더구나 4백경의 토지에서 나오는 세금 1천여 석까지 자신의 수입으로 거둬들였다. 광형은 떳떳하지 못한 행위에 또 눈을 감은 것이다. 욕심에 눈이 어두워 잘못인 줄 알면서도 동조 묵인하는 것이 광형의 습관이었다. 원제 때의 적폐 광형도 이렇게 조정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2. 외척 왕씨 집안의 등장

원제 시대의 구악이라 지칭되는 석현을 비롯하여 비겁했던 대신들까지 파면되면서 성제 중심으로 국정을 드라이브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듯했다. 그러나 지는 해를 막을 수 없는 것처럼 기울어가는 한나라의 운명 또한 잡히지 않았다. 성제가 한나라의 쇠망을 더욱 재촉했다. 외척과 후궁의 득세로 한나라 조정에 긴 어둠이 찾아온 것이다. 먼저 외척들의 등장을 살펴보자.

성제의 어머니는 왕정군이다. 왕정군이 황태후가 될지, 그리고 이 황태후가 84살까지 오래 살아 애제와 평제에 이르는 시기까지 권력의 중심이 될지 그 누가 알 수 있었으랴. 외척 정치의 발단, 왕정군 개인의 운은 매우 좋았다. 그러나 한나라 종실의 입장에서 보면 불행의 시작이었다. 한나라를 기울게 한 왕봉은 왕정군의 오빠였고 한나라를 사라지게 한 왕망은 왕정군의 조카였다. 이들을 기용한 장본인이 왕정군이었다.

왕정군의 아버지 왕금은 법률을 공부하며 큰 뜻을 품었으나 품행이 바르지 않았고 주색을 좋아하며 후처를 많이 거느려 모두 4녀8남을 두었다. 정군의 어머니 이씨는 정처로 아들 두 명을 더 낳았는데, 후처들에 대한 질투로 왕금과 헤어져 구빈에게 다시 시집을 갔다. 이 시대 우리가 아는 것보다 여인들의 결혼과 이혼이 자유로웠다. 왕정군의 젊은 시절은 좀 기구했다. 정군과 처음 혼사를 약정한 사람이 있었으나 결혼 전에 그 상대가 죽은 것이다. 뒤에 동평왕이 정군을 희첩으로 간택하였으나 시집가기 전에 동평왕이 또 죽은 것이다. 시집도 가기 전에 두 명의 정혼자를 잃었으니 평범한 팔자는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 왕금은 18살이 된 정군을 황실에 들여보내 궁녀로 만든다.

멀리 내다보면 인생은 새옹지마. 이후의 운명은 왕정군 편이었다. 원제가 태자 시절, 사랑하는 희첩 사마양제가 병이 들어 죽었다. 사마양제는 죽기 전에 태자의 여러 희첩들이 자신을 저주하여 죽게 된 것이라고 그 억울함을 호소했다. 태자는 사마양제가 죽자 슬픔과 분노를 참지 못했고, 우울증에 걸려 다른 희첩들을 미워하며 가까이하지 않았다.

궁에서는 태자의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5명의 후궁을 뽑아 선을 보였으나 태자는 특별히 끌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지만 황제와 황후의 걱정을 덜어드리기 위해 태자는 거짓으로 끌리는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 태자가 끌리는 여인이 누구인지 모르니, 시종들 또한 당연히 그 여인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도 이들은 태자의 여인을 멋대로 추측하여 대령했다. 태자 옆에 있고 혼자만 진홍색 가장자리를 댄 윗옷을 입어 눈에 띄는 왕정군을 태자의 그녀라 지목했다.

왕정군은 단 한 번의 사랑을 받고 임신하여 성제를 낳았다. 이렇게 왕정군의 운명이 바뀐 것이다. 태자에게는 후궁이 수십 명이었고, 7·8년 사랑을 받은 여인도 있었으나 이때까지 자식이 없었다. 그리하여 성제는 훗날 태자에 오르게 된다. 왕정군은 아들을 낳은 이후 원제를 거의 만나지 못했지만, 태자의 어머니로서 황후로 승격하고, 아버지 왕금은 제후로 봉해진다.

왕황후와 태자 시절의 성제에게 위기도 있었다. 성제는 자라면서 너그럽고 박식하며 공손하고 신중했다. 할아버지 선제가 특별히 총애했고 원제도 태자에 대한 기대가 남달랐다. 그러나 이 기대가 오래가지 못했다. 할아버지 선제가 아들 원제에게 실망한 것처럼 원제도 아들 성제에게 실망한다. 성제가 술을 즐기고 노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태자 시절 이미 노란 싹이 드러났던 것이다. 원제는 태자가 탐탁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아버지들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자신들의 자질은 몰라도 아들의 자질은 정확하게 알아보았다. 원제도 성제도 통치자로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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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원제는 부소의와의 사이에서 낳은 둘째 아들 정도 공왕을 총애했다. 원제는 자기를 닮아 음악적 재능까지 뛰어난 둘째 아들에게 마음이 움직였다. 게다가 숙부의 장례 때 말없이 웃기만 하는 태자를 보고 원제는 절망했다. 아끼는 막내 동생을 잃고 애통해하던 원제에게 태자의 태도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원제는 태자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가까운 이의 죽음도 애도하지 못하는데 백성의 부모가 될 수 없을 터, 급기야 성제를 폐위하려고 했다.

그래도 태자에게는 충성스런 신하가 있었다. 사단이란 신하가 태자를 옹위한 덕에 폐위되지 않고 무사히 황제로 등극했다. 그리고 어머니 왕황후는 태후에 올랐고, 왕태후의 동모형(同母兄)인 왕봉은 제후에 대사마에 대장군으로 영상서사가 되었고 식읍 5천호를 추가로 하사받았다. 그리고 왕태후의 동모제(同母弟)인 왕숭은 안성후로 식읍 1만호를 받았다. 이로부터 왕씨들은 황실의 중심이 되었다.

3. 황제 위에 외삼촌, 왕봉의 국정농단

왕씨들이 부상하면서 여론 또한 술렁거렸다. 친척일지라도 아무런 공적 없이 제후가 되는 건 무리수였다. 마침 이해 여름 누런 안개가 종일 사방을 뒤덮었다. 신하들은 자연의 이변을 빌미로 상소를 올렸다. 외척을 제후로 봉한 행위는 공신이 아니면 제후가 될 수 없다는 고조의 유지를 어긴 것. 신하들은 이변이 이 때문에 일어났으니, 외척에 대한 대우를 재고하라고 간청했다.

신하들의 상소를 전해 듣고 눈치 빠른 왕봉은 사죄하며 사직을 요청했다. 왕봉은 성제가 자신을 내치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다. 성제가 어려서부터 외삼촌 왕봉에게 의지했기 때문에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간파했던 것이다. 과연 성제는 신하들의 상소를 물리치고 왕봉을 유임시켰다. “짐이 미치지 못하는 바를 보필하되 의심하지 말지어다.”라는 격려의 말까지 내려주었다.

이후로 왕씨 집안은 세력을 확장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왕태후가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태후의 동생 왕숭의 죽음을 계기로 왕씨들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왕태후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외숙 5명을 한 날에 제후로 봉해주었다. 이 이상 더 올려줄 수 없는 경지였다.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라 사람들은 이들을 5후라 부르며 쑤군거렸다.

그러나 왕태후의 집안 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아버지와 이혼한 뒤 재혼한 태후의 친모는 아들 구참을 낳고 과부로 지내고 있었다. 태후는 홀로 사는 친모를 불쌍히 여겨 궁으로 불러들였고, 그 아들 구참을 제후로 봉하려고 했다. 이는 전례에 맞지 않는 일이라 구참을 시중으로 기용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지만, 태후의 행동은 이미 정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왕씨의 자제들에게 모두 경이나 대부의 작위를 내려 세력 있는 부서에 배치하니, 조정은 그야말로 왕씨들의 세상이 되어버렸다.

왕씨들이 조정을 장악하면서, 왕봉은 황제의 권력을 넘어서기 시작한다. 신하들은 황제가 아니라 대장군 왕봉의 재가를 우선시했다. 성제가 시부에 능한 유흠을 임명하고 의관을 하사하려 할 때, 좌우 대신들은 ‘대장군에게 보고하지 않았다’며 황제의 임명을 보류시켰다. 성제는 신하들의 월권을 불쾌하게 여기며 왕봉에게 말했지만, 왕봉은 불허했다. 성제는 더 이상 밀고나가지 못했다. 외삼촌이 어렵고 두려웠기 때문이다. 황제 위에 왕봉! 외삼촌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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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제는 즉위 후 수년 동안 후사가 없고 몸도 늘 편치 않아 죽음을 걱정하고 있었다. 하여 동생 정도 공왕이 입조하자 봉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만류하며 오래 머물면서 도와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성제의 건강이 점차 좋아졌는데도 공왕을 돌려보내지 않자, 왕봉은 이에 불안을 느껴 황제를 움직였다. 이때 마침 기상 이변인 일식이 일어났으므로 이를 핑계 삼아 공왕을 봉국으로 귀환시키기를 촉구했다. 성제는 왕봉을 거스를 수 없어 수락한다. 동생 공왕과는 눈물을 흘리며 헤어졌다. 이렇게 성제는 유명무실한 통치자였다. 모든 명령과 재가는 왕봉에게서 나왔다.

물론 왕봉에 대한 성제의 반격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왕봉의 국정농단을 비판하는, 강직한 신하들이 성제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경조윤 왕장은 왕봉의 국정농단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왕봉이 제멋대로 왕상을 파면하고, 공왕을 돌려보내고, 한 번 출가하여 지존의 짝이 될 수 없는 장미인을 왕봉 소첩의 여동생이라는 이유로 후궁에 간택한 것. 이 세 가지 사건만으로도 큰 죄이므로 왕봉을 파면하기를 간청했다. 성제도 권력 위의 권력인 왕봉이 편치 않아 왕장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리고 왕장이 천거한 풍야왕을 대장군에 임명하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조정은 왕씨가 장악한 지 오래. 왕태후의 사촌동생 왕음이 성제와 왕장의 대화를 엿듣고 왕봉에게 고자질했다. 왕봉은 밀고 당기기의 선수인지라 병을 핑계로 칩거하고는 납작 엎드려 사죄했다. 그리고는 병과 죽음을 앞세우며 사직을 요청했다. 왕봉은 자신을 병마와 싸우는 매우 불쌍한 사람으로 만들며 간절히 호소했다. 어머니 태후는 오라버니 왕봉이 애처로워 눈물 흘리며 식음을 전폐했다. 마음 약한 성제의 케이오패. 또 해임하지 못했다. 성제를 도왔던 왕장이 오히려 반역죄에 몰려 옥중에서 죽었다.

성제에게 어머니와 외삼촌은 아킬레스건이었다. 이들의 전횡을 알면서도 성제는 막지도 물리치지도 못했다. 성제가 단호하게 선을 그을 수 있었다면, 외척의 국정 농단은 싹을 피우지 못했을 것이다. 사방 왕씨가 장악한 세상에서 성제는 힘을 쓰지 못했다. 외척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는, 무능한 황제로 한나라를 말아먹고 있었다. 왕봉과 그 일가들에게 한나라와 백성들의 운명은 관심 밖이었다. 이들은 분수를 몰랐고 한계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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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척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는, 무능한 황제로 한나라를 말아먹고 있었다.

  이로부터 공경들은 왕봉을 곁눈질로 보았는데 군국의 태수나 왕상, 자사들이 모두 그 문하에서 나왔다. 또 시중이며 태복인 왕음은 어사대부가 되어 삼공의 반열에 올랐다. 오후인 왕태후의 여러 동생들이 사치 경쟁을 벌리니 뇌물로 보내오는 진기한 보물들이 사방에서 들어왔다. 뒤채의 미희나 소첩이 각각 수십 명이었고, 하인이나 노비는 1천 명이거나 아니면 수백 명이었고, 각종 악기를 차려놓고 미녀가 춤을 추고 광대가 연기를 하였으며 사냥개나 말을 몰았다. 저택을 크게 짓고 인공 산을 만들었으며 호수 안에 누각을 짓고 큰 대문에 높은 누각과 복도가 멀리까지 이어졌다.

이에 백성들이 노래로 불렀다.

“오후가 흥기하니 곡양후 왕근이 제일 독하네. 고도수를 끌어 외두까지 통했네. 산을 만들고 수중 누각을 지으니 서쪽 백호전을 닮았네.”

(반고 저, 진기환 역주, 「원후전」, 『한서』9, 명문당, 34-35쪽)

왕봉은 총 11년간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병으로 생을 마감하면서 왕봉의 정치도 끝이 났다. 그러나 왕봉의 죽음은 또 다른 왕씨 국정농단의 시작이었다. 왕봉은 죽으면서 자신의 후계자를 성제에게 유언으로 남겼다. 부모를 모시듯 자신을 받들었던, 성제와 왕장의 대화를 엿듣고 고자질했던 그, 왕음! 성제는 왕봉의 유지를 받들었다. 왕음을 왕봉의 후임으로 대사마 거기장군에 임명했다. 왕봉은 죽었으나 왕씨들의 권력은 죽지 않았다. 이에 따라 유씨의 한나라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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