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니체] 청년과 에로스 - 2)

근영(남산강학원)

을들의 사회

살기가 힘들다. 초딩이든, 청년이든, 중년이든, 노년이든 살기가 영 팍팍하다. 여성은 여성이어서 힘들고, 남성은 남성이어서 힘들다. 백수도 힘들고, 정규직도 힘들다. 심지어 사장님들도 힘들다. 쪽방촌이든 몇 십억 아파트든 삶이란 삶은 모두 다 힘들다.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삶 전반은 잿빛이고 무겁기만 하다. 해서 남녀노소 성별을 막론하고, 빈부에 상관없이 모두가 힘을 모아 한목소리로 말하고 있다. 힘들다고!! 이쯤 되면 이 시대는 삶에 관한 한 평등한 사회라고 얘기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힘들어서 문제지만!

이 평등은 먹이 사슬처럼 서로 물고 물리며 사슬을 이룬다. 부모는 자식 때문에 힘들고, 자식은 부모 때문에 힘들다. 학생은 선생이 문제고 선생은 학생이 문제다. 장사꾼들은 손님들 비위 맞추느라 못해먹겠고, 손님들은 돈값 못하는 서비스에 울화통이 터진다. 신입사원은 대리 때문에, 대리는 과장 때문에, 과장은 부장 때문에, 부장은 이사들 때문에, 이사들은 회장 때문에 힘들다. 그럼 회장님은? 회장님은 직원들 모두가 골칫덩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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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를 좀 넓혀 사회의 제도적 측면을 살펴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공교육은 사교육 때문에 망했고, 사교육은 갈피를 못 잡는 공교육 때문에 생고생 중이다. 경제는 정치 때문에 제대로 굴러갈 수가 없고, 정치는 경제 때문에 정책 하나 실행하기가 어렵다. 뿐만이랴. 사회는 제 잇속만 챙기는 개인들 때문에 괴롭고, 개인들은 엉망인 정책으로 인해 힘들다. 그리고,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이렇게 물고 물리는 힘듦의 사슬 속에서는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도 헷갈린다.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다. 분명, 지금, 여기, 나는 힘들다는 것! 그러니 ‘나’는 틀림없이 을이다. 그렇다면 갑은? 당연히 ‘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알다시피, ‘나’는 언제나 누군가의 ‘너’가 되어 버리고, 갑을의 사슬은 자리를 바꿔가며 계속된다. 해서 너란 놈은 애매모호 해지고, 어디에 있는지 당최 알 수가 없어진다.

그렇게 우리는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에 빠져든다. 모두가 삶에 무언가 치명상을 입었는데, 그래서 다들 피해자인데, 정작 가해자가 누구인지는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뭐랄까, 옴짝달싹할 수 없이 온몸이 아픈데 어디가 아픈지 잡아낼 수 없는 환자 같달까, 맞아서 멍든 자국은 수두룩한데 때린 사람은 없는 꼴이랄까. 참으로 갑갑한 상황이다. 가해자를 집어낼 수 있다면 그나마 나을 것이다. 그러면 고소든, 분풀이든, 혹은 하소연이든 용서든 뭐든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시대는 그 길조차 막혀 있는 셈이다. 그러니 남는 것은 알 수 없는 원망과 억울함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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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시대를 무어라 부르면 좋을까. 법적으로 보장된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로도,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해주는 자본주의라는 경제구조로도 온전히 설명될 수 없는, 우리가 삶에 대해 느끼는 이 무거움. 모두가 힘들다고, 아프다고, 억울하다고 느끼는 시대. 그냥 심플하게 ‘을들의 사회’라고 부르면 어떨까. 모두가 을이 되어 버릴 수밖에 없는 시대라고.

청년, 시대를 향해 묻다, 가치의 가치를 묻다

청년은 을들의 시대의 주인공이다. 주인공은 주인공인데 가장 ‘을’이어서 주인공인 거라니! 여하튼! 사실 엄밀히 말하면 지금의 청년들을 단순히 을이라 부르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청년들은 삼포, 오포, 칠포를 넘어 삶이 힘들다고 말하는 것조차 포기한 듯 보인다. 그저 무기력할 뿐이고, 무기력한 사람들이 그렇듯 순간의 즐거움에 자신을 내맡긴다. 극에 달한 불안과 좌절, 그리고 알 수 없는 박탈감. 그 속에서 청년들이 아무렇지 않게 툭툭 이런 말을 내뱉는다. ‘뭐, 오늘 죽어도 별반 상관없어.’

청년들의 이 절망에 대한 진단과 처방은 대부분이 정치·경제 문제에 맞춰져 있다. 취업이나 창업의 어려움, 흙수저의 서러움, 청년복지의 부족함 등등이 그렇다. 하지만 정말 청년들이 그런 것들 때문에 절망하는 것일까. 이런 접근이라면 꼰대들의 ‘라떼’ 레퍼토리를 피해갈 도리가 없다. 흔히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되는 꼰대들의 일장연설은 이런 프레임에서만 나올 수 있는 이야기다. 나 때는 말이야, 먹고 사는 것 자체가 힘들어서 죽도록 일해야 했어, 복지는커녕 군부독재로 말 한마디 하기가 조심스러웠단 말이지, 그런데 이렇게 자유롭고 풍족한 시대에 웬 불만이 이렇게 많냐. 어떻게든 편히 일하려고 하니 일자리가 없지, 저축은 왜 생각도 안 하는 거야, 씀씀이는 왜 또 그리 헤프고, 호강에 겨워 그래, 호강에 쯧쯧.

청년들이 들으면 펄쩍 뛰겠지만, 여하튼 여기에도 진실은 있다. 꼰대들의 말처럼 청년들은 정치적 억압이 당연한 시대를 살지도 않고, 먹고 사는 것 자체가 곤란해진 시대를 살지도 않는다. 중소기업이나 기술직은 일할 사람이 없어 끌탕이고, 알바들의 최저 시급은 팔천 원을 넘어섰으며, 복지 차원의 청년 지원들도 한두 개가 아니다. 번듯한 음식점에서 분위기 잡고 밥을 먹거나, 깔쌈한 원룸에서 잠을 청할 수는 없어도 의식주 문제 자체가 생존을 위협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시대라 할 수 있다. 그러니 꼰대들의 눈에 청년들의 절망은 엄살 정도로 밖에는 안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청년들의 좌절과 무력감을 오로지 정치·경제의 측면에서만 이해한다는 점에서 반쪽짜리다. 우리는 거꾸로 생각해봐야 한다. 청년들은 자유가 부족해서, 돈이 부족해서 고통 받고 있지 않다. 그들의 절망은 오히려 물질적 풍요로도 정치적 권리로도 해결되지 않는 삶의 근원적 측면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근대 이후 우리가 믿어 온 가치, 경제적 성공과 정치적 민주화를 이루면 삶의 모든 게 해결될 것이라고 믿어왔던 그 가치에 지금 청년들은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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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의 무기력함은 기성세대들에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게 열심히 노동하고, 열심히 저축하고, 열심히 벌어서, 당신들은 삶이 만족스럽냐고. 그 끝에 남는 것은 고단한 삶과 끝나지 않는 불안이라는 것 말고 무엇이 있느냐고. 그렇게 힘들고 허망한데 왜 다시 우리에게 그 길을 가라고 말하냐고. 결국 삶이 그런 거라면 차라리 아무것도 안 하고 힘든 게 낫지 않겠냐고.

그렇다. 청년들은 우리 사회가 믿고 있는 그 가치들에 대한 가치를 묻고 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는 이 시대가 왜 을들의 사회가 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단서가 들어있다. 우리에게는 물질적 부나 제도로는 도무지 충족되지 않는 욕망이 있는 것이다. 그저 먹고 사는 것이 해결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닌 삶의 근원적 측면이, 니체라면 ‘힘에의 의지’라고 불렀을 그것이 우리 안에는 있다. 그리고 그 힘에의 의지가 병들었을 때, 그래서 한없이 쪼그라든 존재감에 시달릴 때, 삶은 무거워지고 우리는 을이 되어간다.

우리는 모두 잘난 사람이고 싶다.

니체는 우리 삶의 근원적 욕망을 ‘힘에의 의지’라 한다. 우리는 단순한 생존으로는 만족감을 느끼지 못한다. 우리는 힘을 원한다. 그저 근근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보다 힘 있는 사람이, 우월한 존재가 되기를 원한다. 요컨대, 잘난 사람이 되어야 살맛이 난다는 거다.

돈을 갖고 싶은 것도, 권력을 잡고 싶은 것도 다 이 때문이다. 돈 그 자체에, 어떤 지위 그 자체에 우리가 만족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을 통해 우리가 얻는 것은 힘을 가졌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바로 그 느낌을 돈과 권력이 줄 수 있다는 믿음이 우리를 그것들에 목매게 만드는 것이다.

뭐, 난 그리 잘나고 싶은 욕망이 없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신 참 못났다는 이야기에 웃을 수는 없지 않은가. 돈과 권력을 통해서가 아닐지라도, 우리는 다들 자신이 꽤 괜찮은 놈이 되길 바란다. 차이가 있다면 그 괜찮은 놈이라는 것이 어떤 가치를 중심에 두느냐에만 있을 뿐이다.

니체는 이 차이를 ‘강자’와 ‘약자’로 나누어 이야기한다. 우선 강자의 방식부터 살펴보자. 강자의 힘에의 의지는 ‘탁월함’과 관련된다. 탁월함이란 다른 말로 ‘훌륭함’이다. 그러니까 강자는 자신을 훌륭한 존재로 만듦으로써 힘에의 의지를 실현한다는 것이다.

훌륭함이라고 하면 다른 사람들의 인정이나 존경이 떠오른다. 하지만 니체적 훌륭함은 그런 것들과는 좀 거리가 있다. 훌륭하면 물론 사람들의 인정과 존경을 받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탁월함에 따라오는 결과일 뿐, 척도가 될 수는 없다.

니체는 탁월함을 존재적 차원에서 다룬다. 존재적 탁월함은 다른 그 누구와도 혼동되지 않는 자신만의 독특함을 가졌다는 의미다. 하는 말은 물론이고 말투와 행동거지까지 사유와 신체 모두에서 다른 이들과 구별되는 그런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를 비유적으로 그려보면 이렇다. 평평한 땅 위에 무언가 톡 튀어 올라온 모습, 그래서 다른 것들과 확연히 구별되어 우리 눈에 들어오게 되는 것. 존재적 독특함이란 이런 것이고, 해서 탁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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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이런 이유로 독특한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을 존재적 ‘고양(高揚)’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여기서 고귀한 또는 귀족적이라는 noble의 의미가 따라 나온다. 니체에게 귀족이나 평민은 단순히 신분제의 산물이 아니다. 평민이란 존재적 독특함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 그래서 흔한[common] 사람들을 뜻한다. 그러니까 평평한 땅이 한 덩어리로 보이듯, 서로가 비슷해서 구별이 잘 되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켜 평민이라 하는 것이다.

반면에 존재적으로 탁월해서 잘 구별되는 사람들은 모두 귀족이고, 고귀한 사람들이다. 그러니 오해하지 말자. 오늘날 금수저처럼 귀족은 자동적으로 대물림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중세 시대 분명 귀족이란 신분이 있었다. 하지만 그 신분이 의미하는 것은 존재적 탁월함을 삶의 중심 가치로 삼겠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귀족에게는 엄격한 교육의 의무가, 자신만의 존재적 독특함을 연마하는 배움의 의무가 주어졌고, 이것이 ‘교양’ 교육의 실체다.

여기까지 오고 보니 잘난 사람이 되기 위한 강자의 길이 좀 멀게 느껴진다. 탁월함도 모자라 고귀함이라니, 무언가 굉장히 대단한 일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랄까. 사실 강자의 길은 쉽지 않다. 그렇다고 특별한 사람만이 이룰 수 있는 그런 것도 아니다. 왜냐고? 우리는 이미 존재적 독특함의 그 모든 것을 갖추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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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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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彬

무기력에서 벗어나 탁월함을 발휘할 수 있는 길이 어떤 것이 있을지 너무 궁금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