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란 (감이당 금요대중지성)

찾다

초기 불경을 읽다 보면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붓다 시대의 사람들이 부럽다는. 붓다는 훌륭한 풍채와 유려한 화술, 천안통, 타심통을 비롯한 온갖 신통력을 갖추셨으며 지혜와 자비를 겸비하신 데다 세상의 그 어떤 질문에도 막힘없는 답을 주시는 분이시다. 붓다 당대의 사람들은 설법을 들은 즉시 깨달음의 경지에 들었다고 한다. 운성스님도 달라이 라마나 린포체 같은 분들을 친견하면 말 한 마디 하지 않아도 눈물이 흐르면서 감화되는 것을 느낀다고 하셨는데, 진짜 부처님을 만날 수 있다면 어떻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어쩐지 애가 타게 그리운 기분이 드는데, 짝사랑할 때의 느낌과 묘하게 닮은 것도 같다.^^;;

<숫타니파타>에도 나처럼 사무치는 마음으로 붓다를 찾는 사람이 여럿 나온다. 아래의 경의 주인공인 우빠씨바는 연로한 스승(<바라문에게 걸린 무서운 저주를 풀다>의 주인공인 바바린)의 질문을 대신 전하기 위해 동료들과 저 남쪽에서부터 먼 길을 왔다. 스승을 위한 답부터 얻은 후 그들은 자기자신을 위한 답을 차례차례 구했는데, 우빠씨바의 질문은 이것이었다.

“싸끼야시여, 아무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혼자서 저는 커다란 거센 흐름을 건널 수 없습니다. 제가 의지해 이 거센 흐름을 건널 수 있도록 의지처를 가르쳐 주십시오 널리 보는 눈을 지닌 님이여.”

‘어떻게 해야 소용돌이치는 이 험난한 강물에 빠져 죽지 않고 무사히 건널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당시 인도 사람들의 현실 인식이 어떠했는가를 잘 드러내고 있다. 그들에게 세계는 무사히 빠져 나가기 힘든 거센 소용돌이였다. 여기에서 벗어나려면 믿을 만한 안내자가 필요하다. 이 우빠씨바는 붓다야말로 자신들이 찾아온 바로 그 안내자라고 확신하게 된 것 같다. 답을 듣기도 전에 이미 붓다에게 의지하고 있는 이 모습을 보라.

믿다

그런데 그의 이러한 존경과 신뢰는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저주에 걸린 스승 바바린의 문제를 지혜롭게 해석해주었기 때문에? 이것은 첫 번째 답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우빠씨바는 이보다 더 오래 전부터 이미 붓다를 믿을 준비가 되어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바바린과 그의 제자들은 바라문의 전통 하에서 체계적인 지식을 익혀 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거기서 위대한 각자(覺者)의 32가지 특징을 배웠다. 그리고 붓다를 만나 성인이 지녔다는 그 32가지 특징을 직접 검증했는데, 붓다야말로 일 점의 오차도 없이 딱 부합했던 것이다.

우빠씨바는 자신의 일부나 다름없는 스승과 전통적 지혜의 인도에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그 길 끝에서 “덮개를 벗어버리고 가려진 모든 것을 열어 보이는 님”, 붓다를 만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의지처”를 가르쳐 달라는 우빠씨바의 질문은 지금까지 지녀왔던 자신의 믿음체계(브라만교는 신성한 실체가 ‘있다’고 믿는다)를 바탕으로 도출된 것이다. 지금 우빠씨바가 찾는 그러한 것은 진리의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빠씨바에 대한 부처님의 대답은 일견 냉정하기 짝이 없다.

“우빠씨바여, 새김을 확립하여 아무 것도 없는 경지를 지각하면서, 나아가 ‘없다’에 의존하여 거센 흐름을 건너십시오.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버리고 의혹에서 벗어나 갈애의 소멸에 대해서 밤낮으로 살펴보십시오.”

“아무 것도 없다”고 지각하고, 나아가 ‘없다’에 의존하라! 이것이 붓다의 대답이다. 의존할 것을 찾은 사람에게 ‘없다’에 의존하라니? 언어적으로만 보면 이 대답은 절대로 답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우빠씨바는 이 한 마디에 인식의 전환을 이루었다. 그리고 나는 오래도록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대체 어디서, 어떻게 그는 이 말도 안 되는 답을 듣고 깨달을 수 있었던 걸까?

깨닫다

세계에 그러한 의지처는 없다. 붓다는 우빠씨바에게 의지할 무엇을 찾는 일을 그만 두라고, 그런 건 없다고 말씀하고 계시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없다’에 의존한다는 것은 대체 어떻게 하는 것인가? 나는 최근에야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았다. 찾고 보니 어이가 없는 게, 답은 그냥 바로 다음 문장에 적혀 있었다. 그것도 매우 구체적으로.

갈애 – 목마른 사람이 소금물을 마시는 것처럼 근본적으로 충족되지 않고 욕망과 괴로움만 더 증폭되는-는 생겨나기도 하지만 스러지기도 한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버릴 것. 의혹에서 벗어날 것. 갈애의 소멸에 대해 밤낮으로 살필 것. 아,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해서는 오해하기가 쉽다. 이 말은 무감각해지라는 말이 아니다. 쾌락을 계속 누리려는 욕망의 불가능성에 대해 알라는 말이다. 그리고 의혹, 이것은 아마도 탐진치를 무자각적으로 쫓는 일말고 보다 인간답게 살 길이 있다는 진실에 대한 의혹일 것이다. 붓다는 깨달음을 성취한 후 그 길에서 평생을 살았다. 그리고 우리도 알다시피 그의 삶은 평화롭고 사랑스러웠다! 그러니 최소한 그런 다른 삶이 가능할까라는 의혹만큼은 이제 그만 두기로 하자. 마지막은 더 간단하다. 갈애 – 목마른 사람이 소금물을 마시는 것처럼 근본적으로 충족되지 않고 욕망과 괴로움만 더 증폭되는-는 생겨나기도 하지만 스러지기도 한다. 우리가 할 일은 그것의 발생과 소멸을 지켜보는 일이지 모든 욕망을 완벽히 제거하는 등의 불가능할 것 같은 과업이 아니다.

욕망을 버리고, 의혹을 벗고, 갈애를 살펴보라. 이것이 ‘없다’에 의존하여 거센 흐름을 건너는 법이다. 우빠씨바는 이 말이 다른 삶으로 인도하는 아주 구체적인 지침이라는 사실을 즉각 알아차렸던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왜 뻔히 눈을 뜨고도 이 말들을 못 읽어냈을까? 위의 대답은 불경 어디를 읽어도 계속 나오는 구절들이다. 그래서 나의 뇌는 이 문장들을 자꾸 건너뛰려고만 한다. 하지만, 이젠 알겠다. 이 말들이야말로 매번 되새겨져야 할 말들이라는 사실을. 자꾸 나오면 나올 때마다 다시 이렇게 하고 있나 재점검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가 의존할 수 있고 의존해도 되는 것은 이뿐이다. 다른 의지처는 어디에도 없다. (끝)

0 0 vote
Article Rating
guest
0 Comments
Inline Feedbacks
View all comments
0
Would love your thoughts, please comment.x
()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