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양명의 마이너리티 리포트 - 슬기로운 유배생활

2. 상소 사건 시말기 – 옳은 일은 저지르고 본다, 뒷일은 뒤에 생각한다

문리스(남산강학원)

환관 - 왕의 남자? 권력의 빛과 그림자

환관(宦官) 혹은 내시(內侍)는 궁에서 생활하는 사람들 중 여성 궁인들에 대해 남성 궁인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엄격히 말하면 남성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중성(적)이라는 말이 환관을 더 잘 이해한 말인 것은 절대 아닙니다. 환관은 남성의 거세로 규정될 뿐 아니라, 거세 이후에도 그 욕망은 기본적으로 남성적이기 때문입니다. 환관은 절대 권력자인 황제와 황실 가족들은 물론 황제의 수많은 비(妃)와 빈(嬪)들이 지내는 왕궁에서 살림을 책임지는 살림꾼들입니다. 그런데 황궁 내에서는 제왕의 순수 혈통을 보존해야 하므로, 환관의 거세는 어느 순간 선택이 아닌 필수 조건이 되었습니다.

거세한 이들은 보통 고자(鼓子) 혹은 엄인(閹人) 이라고 불립니다. 이들은 의외로 지위를 누리기도 했고, 때론 권력을 부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만(왕실의 측근이다 보니 그렇습니다), 대개 굉장히 천시되고 희화화되었으며 대표적인 마이너(=주변적)한 존재들이었습니다. 지금 이 글이 왕양명과 양명심학의 마이너리티적 성격에 관한 보고서입니다만, 이때 말하는 마이너리티(=소수성)와 환관들의 마이너리티(=주변성)는 완전히 다릅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1도 안닮았습니다.

환관은 불평등을 전제했던 전근대 시기에 그 불평등함이 가장 첨예하고 비극적으로 예각화된 집단입니다. 제왕(및 왕실)과 대비될 때면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대립은 상호 의존적입니다. 제왕이 있으면 거기엔 (보이지 않는 곳에) 환관이 늘 있습니다. 얼핏 보면 빛과 그림자 관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제 빛과 그림자의 관계가 아니란 것은 금세 알 수 있습니다. 그림자가 굳이 빛이 되어야겠다거나 되고 싶다거나 혹은 빛을 부러워한다거나 할 것 같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환관의 욕망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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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사건의 변곡점들, 혹은 주요한 역사적 사건들에서 환관은 의외로 불쑥불쑥 고개를 치켜들며 등장합니다. 이를테면 춘추시대 첫 번째 패주였던 제나라 환공의 임종 장면 같은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제환공은 만년에 병이 들자 자신을 문병 온 명재상 관중과 함께 자신의 후사 문제를 논의합니다. 제환공은 관중에게 자신의 최측근 삼인방에 관해 묻습니다. 수조, 역아, 개방.

제환공이 수조에 관해서 물었을 때 관중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수조는 제 생식기를 잘라 임금에게 영합하였으니 인정에 어긋납니다.” 수조가 환관이었다는 뜻입니다. 수조는 제환공의 전성 시절에 제환공의 측근이 되기 위해 스스로 거세했던 것입니다. 여담입니다만 관중은 이 대화에서 제환공에 제시한 3인방을 모두 부정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그렇게 미지근한 드라마를 남기지 않죠. 제환공은 끝내 이들 셋 모두를 내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납니다. 아니 어쩌면 제환공조차도 최후 만년에는 이미 그럴 힘이 남아있지 않았던 것일 수 있습니다. 최소한 <사기> 등 역사가 전하는 제환공의 최후는 그래서 더욱 처참합니다. 춘추시대 첫 번째 맹주(전체 대장이었단 뜻입니다)였던 제환공의 시신은 사후 67일이 지날 때까지 장례를 치르지 못한 채 방치됩니다. 왜냐하면 후계 문제가 미결이었기 때문입니다. <사기>에 따르면 제환공의 시체가 썩어 구더기가 문 밖까지 기어 나올 정도였습니다. 제환공이 총애했던 수조는 역아와 함께 권력 싸움을 하느라 주군의 장례는 고사하고 수많은 대부들을 죽이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관중의 통찰이 정확했던 거죠.

그런가 하면 진시황이 죽었을 때, 태자 책봉 관련 제왕의 명령을 위조하고 당시 재상이었던 이사를 어르고 달래어 무능력했던 이세를 황제로 앉혔던 조고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환관이었습니다. 조고는 머지않아 이사까지 제거하고, 급기야 진나라 이세 황제 앞에서 사슴을 가리켜 말(馬)이라고 우길 수 있었던, 지록위마(鹿馬)라는 유명한 고사의 주인공입니다. 황제보다 더 큰 권력을 가졌던 환관! 권력 장악 면에서 조고는 역대급 환관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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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잠시 말했지만, 환관과 황제는 여러 면에서 상관적이고 공모적입니다. 본래 환관 제도는 황실의 규모 및 제왕의 사치와 비례하게 마련입니다. 국가의 규모가 커지면 그만큼 황궁의 크기가 커지고 그 안에서 필요한 일들이 많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 제왕(및 황실)의 사치가 늘어날수록 그 기호에 맞춰 동원되어야 할 인적 물적 규모 또한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명나라 황실이 멸망할 즈음 환관의 수는 무려 10만 명 정도에 이릅니다. 이쯤 되면 살림의 규모는 보통의 깜냥으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지경이 됩니다. 상상할 수 없는 폐해가 있다는 뜻인 거죠.

특히 명나라는 역대로 환관 부패 지수가 가장 높았던 왕조로 지적됩니다. 이는 명나라의 캐릭터랄까, 여하간 초대 황제였던 주원장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미천한 출신으로 중국 대륙의 지존이 된 주원장은 지역 기반이 약했기 때문에, 전통적이고 뿌리 깊은 지방의 명문 토호들을 제어해야 했습니다. 하여 명나라는 초반부터 모든 권력을 황제 중심으로 집중화시키는 데 전력을 기울입니다. 홍무제 주원장으로선 이유가 없지 않았고, 관점에 따라서는 의도의 측면에서 공과를 함께 논할 만한 부분입니다만 명나라는 이를 통해 사대부들이 무력해졌고(이는 지방관의 권한이 축소되었을 뿐 아니라, 중앙 조정의 재상 또한 폐지시켜 버렸기 때문입니다), 환관 세력이 발호하게 됩니다.(중앙집권화된 권력이라는 건 정치에 대한 제왕의 관심과 능력이 시들해져버리는 순간 제왕과 내각 사이를 매개하는 메신저의 역할이 결정적인 힘을 갖게 됩니다.)

환관과 권력, 왕의 목소리를 독점하다

환관의 세력화 혹은 환관들에 대한 절대 권력의 견제는 역대 왕조들에서 꾸준히 지적되어 왔고 또 시행되어 왔습니다. 물론 명나라도 그걸 모르지 않았고 방안을 모색하지 않았던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막을 수는 없습니다. 왜일까요? 그건 그들을 견제하는 권력이 다른 한편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동력으로 그들을 필요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환관의 입장에서는 어떨까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환관들은 권력에 관심이 있거나 권력을 가질 수 있을 거라는 느낌조차 보여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오랜 역사가 보여주듯 불가능합니다. 환관들은 대대로 공공연하게(혹은 은밀하게) 멸시되는 존재들이었고, 이것은 무엇보다 생식 기능의 부재(무능력)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혹은 가정을 이루기도 하고 혹은 양자를 들여 후사를 결정하기도 하지만, 거세된 자라는 근원적 결핍은 상쇄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이 은밀하게(혹은 공공연하게) 권력에 집착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황제(황실)가 절대적 충족감에 따라 방탕과 무절제로 치닫는 표상을 보여준다면, 환관들은 절대적 결핍감에 따른 탐욕의 표상입니다.

정덕제 무종이 15세에 명나라 황제로 즉위했을 때, 유근은 55세의 환관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그가 베테랑 환관이었다는 사실 이외에 정덕제 무종을 출생에서부터 보아온 인물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근은 영락제 성조 및 성화제 헌종, 그리고 홍치제 효종 시대 등을 두루 거치면서 황실 내부의 권력 관계를 충분히 경험했을 뿐 아니라, 무종의 성향과 자질 또한 깊이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놀기 좋아하고 괴팍한 망나니 황태자만큼 상대하기 쉬운 주군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무종은 예상 외로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여하간에 무종 시대에는 유근을 포함한 여덟 명의 막강한 환관 세력이 있었습니다. 이들을 팔호(八虎)라고 부르는데(마영성, 고봉, 나상, 위빈, 구취, 곡대용, 장영), 유근은 팔호의 리더였습니다. 환관 신분으로 호랑이에 비유된 것을 보면 이들이 얼마나 방자하고 사납게 권력을 휘둘렀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유근은 사람의 안색을 잘 살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것은 그가 매우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는 얘기일텐데, 그러면서 종종 구설에 오르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유근의 이런 재주는 무종이 한창 음주 가무에 젖어들어 있을 때를 노려 복잡하거나 혹은 자신의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문제를 보고하는 식으로 발휘(!)됩니다. 이는 환관들이 자신의 주군을 길들이는 전형적인 방법인데, 특히 눈치가 빨랐던 유근으로선 이런 방법을 통해 금세 자신의 지위를 내외적으로 각인시키는 소득을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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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정덕제 무종을 이야기하면서 잠시 언급했던 내용이지만, 무종의 아버지였던 홍치제 효종은 조정의 충직한 원로대신들인 유건, 사천, 이동양 등에게 어린 황제가 될 자신의 아들을 바른 길로 인도해달라고 부탁했었습니다. 정덕 원년에 팔호는 이들 조정 대신들에게 탄핵을 당합니다. 하지만 유근이 이 위기를 극적으로 극복하게 되면서 탄핵을 청원했던 조정 대신들은 좌천되거나 사직하게 되고, 유근은 거꾸로 승진하여 사례감의 수장인 장인태감의 지위를 획득하게 됩니다.(이 대목은 사실 매우 중요하고, 왕양명이 유근과 마주치게 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만, 이 주제는 다음으로 미룹니다). 사례감은 환관들의 부서를 총괄책임하는 곳이고 사대부들의 내각과 함께 당시 조정의 권력을 좌지우지하던 핵심이었습니다. 요컨대 국정에 전념하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일이 많은 황제(정덕제)와 다른 무엇보다 권력을 손에 쥐고 싶었던 환관(유근)의 공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환관들의 권력은 1차적으로 황제로부터 나옵니다. 그리고 권력은 부(富)의 축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환관들이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는 먼저 황실을 부유하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를 늘리는 방식은 강제로 민간의 토지를 빼앗는 경우도 있고, 합법(?)적인 각종 세금을 만들어내거나 이권이나 인사 청탁 등에 온갖 뇌물을 수령하기도 합니다. 나쁜 일은 금세 많은 것을 물들이기 때문에 부정부패는 늘 창의적으로 되살아나면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부패 사슬을 이룹니다.

예컨대 명대에는 수공업과 상업 등이 발달했습니다. 이로 인해 당연히 이에 따른 세금이 신설되어 주요한 국가 재원이 됩니다. 소금 등 국가적 전매품에 대한 세금이 대표적입니다. 일상생활에서 늘 필요로 하는 소비품이었기 때문입니다. 명나라는 환관들을 통해 각지에서 염세를 거두었습니다. 또한 북경을 수도로 삼고 도성에 아홉 개의 문을 두었는데, 이 아홉 개의 문 모두에는 세금을 감독하는 환관들을 파견합니다. 일반 상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과거 시험을 보러 온 이들까지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도성 출입 통행료를 내야 했는데, 일종의 톨게이트 비용인 셈입니다. 이러한 통행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간악해져서 각종 도로와 다리 혹은 항구 등에서 징수되었고, 사람은 물론 수레와 나귀 등에 각각 세금을 물려 엄청난 수입을 올리는 돈벌이 창구로 활용되었습니다. 이런 곳에 파견된 관리들이 환관들이었습니다. 이밖에도 광산 채굴권이라든가, 벌목 및 목재 유통, 기타 각종 이권 사업에는 언제나 환관들이 관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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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유근으로! 정덕제 무종의 집권과 함께 권력의 핵으로 부상한 환관 유근은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권력자형 환관이었습니다. 왕양명과 유근이 만나는 대목도 이 지점입니다. 유근은 정치적 야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출신이랄까, 여하튼 환관이라는 그의 존재적 출발에 대한 콤플렉스는 일반적인 방식을 좇아서는 정치적 야망을 실현할 수 없는 조건이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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