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스님 8월 선물강좌 중

꿈과 실제의 영상을 만드는 메커니즘

밤에 꿈꿀 때도 눈동자가 계속 움직입니다. 그래서 그 상태를 이렇게 불러요. 렘수면이라고. Rapid, 영어로 ‘빠르다’고 말하죠. Eye Movement. 머리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들은 저것하고 똑같아요. 다만 내일 만난 현실과 얼마나 접합점에 있느냐가 우리는 실제라고 하는 거고, 접합성이 없으면 꿈이라고 이야기해요. 그런데 꿈과 실제의 영상을 만드는 것은 메커니즘이 똑같아요.

어떻게 만들어지냐 하면, 여기에 보면 시상이라고 하는 부분과 뇌관이라고 하는 부분을 연결하는 뇌교라는 부분이 있어요. 밤에 꿈을 꿀 때는 저 뇌교라고 하는 부분에서 굉장히 강한 전기파동을 막 방출하기 시작합니다. 깊은 잠이 들면 그런 일이 안 일어납니다. 의식에 세 가지 단계가 있어요. 깊은 잠을 자는 상태, 꿈꾸는 상태, 칠흙같은 상태. 꿈꾸는 상태에서는 이 뇌교에서 굉장한 전기파장을 발산시켜요. 그럼 이 전기파장을, 시상에 보면 실상체라고 좌측, 시상의 왼쪽 끝에쯤에서 실상 모양으로 생긴 감극을 접수하는 곳이 있어요. 이 접수처에서 뇌교에서 생산된 감각 자료들을 분석을 해가지고 시각 정보를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꿈에 들리거나 맛보는 것보다 훨씬 많이 보이는 이유는 뇌교에서 발생되는 전기 신호 덕분이에요. 전기 신호가 시각 정보를 수집하는 데로 가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그것이 뒷통수로 가서 이런 정보를 ‘시각 이미지로 해석하세요’라고 말하는데 평소하고 달리 뒤죽박죽되는 이유는 그 해석이 보여주는 게 뒤죽박죽이기 때문이에요. 그냥 아무 일들이 막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티베트에서는 명상할 때 기왕이면 이 명상의 내용들을 수행 내용으로 바꾸자고 해서 ‘꿈 수행’이라고 하는 것을 굉장히 강하게 하는 파가 있어요. 바꿔 말하면 아무거나 뒤죽박죽 일어난 이 전기 신호를 자신을 받아들이는 영역을 확장하는 인지를 평소에 계속해서 꿈에도 그런 파장이 나오도록 조건화한단 말이에요. 그렇게 하면 꿈에서도 낮에 자신을 확장합니다. 하나밖에 없어요. ‘우리’라는 말은 약간 회피적인.. 자기 자신을 너무 탓하지 말라는 말이에요. 아무리 책임감을 강조했고 그렇다 하더라도, 실제 생물의 삶은 그렇지 않더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낮에 각성된 의식 상태에서 계속해서 자신의 삶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영역을 확장시키는 영역을 계속하면, 꿈에서도 자기를 너그럽게 볼 확률이 점점 커진다는 거예요. 그 말은 뭡니까? 확장된 자기가 신체화 됐다는 말이에요.

신체화 되는 것을 통해서 내부 이미지가 만들어지면, 그 이미지를 통해서 말도 하고 생각도 하고 행동도 합니다. 그게 자기의 현재 상황이죠. 그런데 여기서 만든 이미지는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만들었지만 미래를 준비했으니까 준비된 미래가 현재화되는 것이죠. 나를 너그럽게 보는 마음이 자신의 괴로움을 떼 내고 자기 자신한테 즐거움을 주는 거예요. 그것을 신체화 시키는 훈련을 계속하는 것이죠. 꿈에서도 그런 일이 나타나도록 그렇게 하면 자기 모습이 신체화 되는 거예요. 그렇게 신체화 되면 어떻게 되냐면, 아까 말한 앞이마 뒤쪽에 ‘너 잘했어. 그렇게 한 건 훌륭한 일이야.’라고 말하는 보상시스템을 깨우도록만 딱 되면 그 다음부터 그런 행동을 하는 게 너무나 자연스러워져요.

삶의 가치를 다르게

그래서 시스템화가 됐어요. 그런데 아까 말한 대로 이제 행동의 논리나 이유에 대한 정밀한 살핌이 있어야 돼요. 이 살핌은 어디서 하냐면 양 옆에서 해요. 한 가운데 뒤쪽에서는 상과 벌의 체계에 많이 움직여서 작동하는데, 양 옆은 판단하고 논리적으로 구성하는 최종 추론을 만드는 일을 해요. 그러니까 보상시스템만 만들어가지고는 아주 원시적인 뇌가 가지고 있는 보상 체계를 따라가기가 굉장히 힘들어요. 그런데 추론, 논리성 이런 등등을 확장해서 이해하게 되면 굉장히 강한 인상을 줘서 여기에서 보상시스템으로 가는 자리를 만들어내는 일에 도움을 주는 거예요.

그것이 여러분이 생각하는 인문학적 성찰이에요. 인문학을 잘하면 자기 행동의 정당성을 확보해서 그것이 너는 상 받을 만한 행동이다 라고 하는 내부적 수신 통로를 만들어주는 거예요. 그래서 그 전에는 우리가 먹고 사는 일이 바쁘다 보니까 그냥 막 이렇게 하다 보니까 그것이 하루 세 끼 먹는 것이 바빠 가지고 이 행위가 나한테 의미가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를 물을 시간이 없어요. 그런데 그 행위가 논리적이고 통찰적으로 ‘맞아, 이건 충분히 인간다운 행위고 존중받을 행위야’라는 것이 겹쳐집니다. 이것이 안 겹쳐지면 뭔가 빠진 것처럼 보여요. 이 앞에 나란히 세 개가 있는데, 그냥 보상과 벌로 움직이는 것은 200만 년 전에 호모 에렉투스가 잘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행위가 아까 말한 자비의 배경, 인류의 삶, 개체의 삶에 있어서 가치적 판단을 내리는 것을 이 옆에서 안 거예요. 이 옆에가 ‘니가 하는 행위가 가치 있는 행위다’라고 자기한테 말해주기 시작하는 순간, 보상체계가 달라지는 거예요.

아까 말한 대로 몇 천 년 전에 인류의 스승들이 삶을 새롭게 보는, 즉 삶에 대한 가치를 다른 식으로 등가 하는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먹고 마시고 놀고 하는 것만이 최고 가치가 아니다. 우리 삶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나 다 부처가 되고, 누구나 다 한 사람이라면 우주의 무게를 갖고 태어났다 라고 깨달은 사람이 생겨난 이후로는 가치체계가 그것하고 동반됐을 때 비로소 상도 ‘아 난 충분히 상 받을 만한 일을 했어’라고, 벌을 받아도 ‘벌 받을 짓을 충분히 했어’라고 하면서 자기의 삶의 궁극적인 가치성을 만듭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지나고 나면 어떤 분이 그런 말을 하더군요. 미술관을 가고 그러는 이유가 생존의 어느 순간부터 그 생존의 가치는 다른 것으로 확장되지 않으면 뭔가 부족한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뇌 구조 자체로도 반드시 그런 식으로 확장되어야만 삶이 ‘그래, 충분히 보상 받을 만 해’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 중의 한 예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예가 나오는데 그 분이 이제 정부에서 원하는 대로 뭔가 글을 안 쓰거나 뭘 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 시대에 짜르라고 하는 황제 계열의 사람들이 총살대에 세 사람을 앉혀놓고 도스토예프스키랑 누구랑 몇 사람들이 이렇게 와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어요. 얼마 지나도 사형을 집행하지 않고 있어요. 저 뒤에서 뭔가 신호 소리가 울려요. 이 신호 소리가 뭐냐면 집행을 연기하시오, 취소하시오 라는 신호 소리인 거예요. 그 소리를 듣기 전에 죽음의 저 끝까지 갑니다.

죽음이 이제 세 사람한테 몰려오는 거예요. 세 사람이 있고, 다음 세 사람에 도스토예프스키 차례가 있고 그런 거예요. 그래서 죽음으로 가는가. 근데 갑자기 뒤에서 뭔가 신호가 울려요. 근데 도스토예프스키가 이 신호를 알아차리더라고요. ‘아 저것은 이 집행을 연기하라는 신호구나.’ 그 순간 갑자기 긴장됐던 신호가 촥 열리면서 여기에 이상한 아까 말한 대로 두정엽과 측두엽이 함께 어울리고 있으면서 자아를 생성해내는 이 부분이 갑자기 확장됩니다. 그래서 내가 죽는다라는 사건이 사라지면서 갑자기 자기가 전체가 되는 자기로 바뀌어버려요. 한 순간. 왜냐하면 자아를 만들어내는 기관 중 하나가 섭렵이라고 하는 기관이 있는데, 그 섭렵이 측두엽과 전두엽 사이 걸쳐서 밑에 있어요. 이놈이 긴장해서 계속 자아를 움츠렸다가 갑자기 이 긴장이 어느 정도 푹 퍼져 버리는데, 아~~ 해방된 상태를 느끼는 거예요.

그래서 대부분의 전일적 자아를 느끼는 사람은 그런 것이 열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앉아가지고 잠깐 자기를 봐가지고 자기 내부의 스위치가 하나 꺼지면 줄어들어가는데, 줄어들어가다가 아까 말한 대로 점점점 다른 식의 체계가 열리면서 확장된 자기로 열리기 시작합니다.

이걸 해석할 때 이제 부처님은 ‘누구나 다 이렇게 될 수 있구나’라고 말하죠. 화엄경 말대로는 ‘누구나 다 그런 상태에 와 있구나.’ 특정한 사람만 되는 게 아니고. 심지어 법화경에서는 중도함경이라 해가지고 그냥 꿈틀꿈틀하고 있는 것들은 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우리한테는 뭔지는 다 보이진 않지만 1미리도 안 되는 것들이 꿈틀꿈틀 하고 있잖아요. 그것도 다 그렇게 만들어지고 있어요.

여기가 열리면서 전적으로 자기가 확대된, 완전히 확장된 자기를 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자비는 궁극적으로 인지의 보상체계하고 생존의 체계 위에서 굉장히 제한된 나를 살아가는 이 나가 확장되면서 함께 삶을 살아가는 그런 신체로 바뀌어가는 게 근본적인 출발점이에요.

그래서 천상의 노래라고 하는 ‘바가바드 기타’에서는 이런 자기를 뭐라고 부르냐면 유일자라고 합니다. 아까 같은 완벽하게 확장된 나들이 중첩되어 있는 세계라고 합니다. 우린 지금 한 공간에 한 시간을 점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근데 이것이 의식의 확장을 통해서 완벽하게 전일적 자아로 다 존재하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한테 믿기지는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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