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혜 숙 (감이당 금요대중지성)

두려움이라는 허상

죽음은 몸의 소멸입니다. 이 세상에서 몸이 사라져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더 이상 보고 듣고 말하고 맛보고 감촉하고 생각하는 일도 없습니다.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이렇게 구체적으로 자기 몸이 없어진다는 사실에서 오는 것 같습니다. 헌데 정작 죽으면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정녕 두려워하는 건 죽기 전, 죽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대면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왜 몸이 이 세상에서 소멸한다는 사실이 두려움을 줄까요. 그건 죽음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존의 어떤 의식, 고정된 상 때문이겠지요. 붓다는 두려움을 느끼는 자아란 실체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런 자아란 없다고. 그건 오온(五蘊:색・수・상・행・식이라는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라는 인식과정이 만들어놓은 허상이라고요. 오온은 쉽게 말해 자아의 다른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이런 허상을 붙들고 두려워하는 겁니다.

두려움은 대상에 대한 무지에서 옵니다. 상대의 정체를 모르면서 함께 살아야 하고 가야할 길을 모르는데 가야만 한다면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이란 그런 것입니다. 삶의 동행자, 삶의 길에서 만날 수밖에 없는 것, 아니 모르고는 삶을 제대로 살 수 없는 그 ‘무엇’임에도 배제해 온 어떤 것입니다. 모르니까 두렵고 그럴수록 더욱 죽음을 밀쳐놓고 눈앞에서 배제하려 하지요. 죽음과 분리된 근대인인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실상을 직시하라

이천오백여년 전, 붓다 시대엔 훨씬 죽음이 삶 가까이 있었습니다. 집이나 들판 혹은 화장터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나 이미 죽은 이들을 보는 일은 익숙한 삶의 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만큼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덜 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붓다는 가혹하리만치 몸의 실체를 직시하라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몸에 대한 부정관(不淨觀)입니다. 처음 출가한 수행자들에게 거의 공통적으로 주어진 명상과제였습니다. 몸을 구성하고 있는 기관과 성분들을 32가지로 낱낱이 해체하여 관觀하는 것. 또 자주 등장하는 장면의 하나가 공동묘지나 들판에 버려져있는 다양한 모습의 시체(그 묘사도 참으로 디테일합니다)를 관하여 깨닫는 것입니다. 평생 죽음의 모습 한번 대면하기 쉽지 않은 지금 이 시대의 정서와는 한참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하나?라는 생각도 듭니다. 허나 이러한 명상법이 주효했던 걸 보면 그만큼 사람들의 몸에 대한 애착은 시대를 떠나 각별한 건 분명합니다.

오늘날 과학으로 보면 몸은 분자나 원자의 조합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붓다 당시에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사대요소와 오온의 집적체가 몸이었습니다. 유전자의 제 일의 명령이 생존과 번식이니 자신의 몸에 대한 애착은 일견 당연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 애착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한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게 붓다의 가르침입니다. 애착은 바로 우리 몸인 오온의 작용 때문입니다. 하여 그 오온, 몸의 실상을 직시하고 통찰하여 허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수행의 요체입니다.

매 순간의 관찰과 숙고로써

빠따짜라와 끼싸고따미는 출가하여 수행녀(비구니)가 되었습니다. 인연담에서 그들이 깨닫는 과정을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빠따짜라는 발을 씻다가 단지에 있는 물을 땅에 부었다. 처음에는 물이 조금 흘러가다가 땅에 흡수되어 사라졌다. 다음에는 좀 더 멀리 흘러가다 사라지고, 세 번째에는 좀 더 멀리 흘러갔다. 빠따짜라는 그것을 명상주제로 삼았다. 관찰 대상으로 삼아 마음을 집중하고 숙고했다. 그리고 누군가는 단명하고 누군가는 장수하는 뭇삶의 수명도 그와 같다는 사실을 알았다.(게송113의 인연담 중)

끼싸고따미는 어느 날 포살당에서 램프 불을 켜게 되었다. 어떤 불꽃은 확 타오르고 어떤 불꽃은 가물거리며 사그라져 갔다. 그녀는 앉아서 타오르는 불꽃을 깊이 관찰하며 숙고했다. 그리고 “이 촛불처럼 세상의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도 불꽃처럼 확 피어올랐다가 가물가물 거리며 사라져간다. 열반에 도달한 사람만이 불꽃처럼 일어났다 사라지는 생사가 없다”라고 깨우쳤다.(게송114의 인연담 중)

빠따짜라와 끼싸고따미는 이런 관찰과 숙고 후 결국 깨닫게 됩니다. 사실 이들의 깨달음이 지금 시대의 우리에게 곧바로 수긍되고 이해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물줄기가 흘러내려가는 걸 보다가, 등잔불의 불꽃을 관찰하다가 어떻게 깨달음에까지 이를 수 있는지 말입니다. 법구경의 인연담들은 그저 있었던 사실을 나열할 뿐입니다. 지금과는 너무 다른 그 당시 인도의 언어와 표현방식으로요. 그 사이를 메꾸는 일은 우리의 몫입니다.

물줄기가 짧게도 길게도 흘러가는 걸 보고 인간 수명의 차이를 깨달았다는 빠따짜라. 두 어린 자식과 남편과 부모형제를 한꺼번에 잃은 그녀는 관찰하면서 깊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내 자식 내 가족만이 아닌 보편적인 인간의 목숨과 수명에 대해서요. 또 끼싸고따미는 램프 불꽃을 보며 삶의 불꽃을 계속 타오르게 하는 인간의 욕망에 대해 숙고했습니다. 탐진치라는 욕망의 불꽃을 피우다가 사라져가는 인간들. 그 속에 자식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어 몸부림치던 자신의 모습이 보였겠지요. 그 고통이 컸던 만큼 탐진치의 불꽃을 끄는 열반의 서늘하고 평온한 상태가 어떤 것인지 이해했을 겁니다. 진리에 비추어 관찰하고 사유하는 만큼 인식의 지평은 넓어집니다.

빠따짜라와 끼싸고따미는 매일 발을 씻고 물을 버리고, 반복해서 램프 불을 켰겠지요. 그들의 일상이었으니까요. 매일 물을 버리면서, 램프 불을 켜면서 그들은 관찰하고 생각하며 스승 붓다의 가르침을 적용했을 겁니다. 글도 책도 없었던 때이니 오로지 붓다의 입을 통해 나온 ‘진리의 말씀’이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아무리 가르침이 위대하다해도 깨우치는 건 온전히 자신의 몫입니다. 관찰과 숙고를 거듭하던 어느 날 자신만의 발견과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일상의 매 행위에 대한 관찰과 사유없이 깨달음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말하고 있습니다.

매 순간 관찰하고 사유하는 과정은 수행의 과정에 다름 아닙니다. 몸(오온)이 만들어낸 애착과 자아라는 허상, 그리고 죽음의 두려움이라는 허상에 갇혔던 과거의 자신을 부수는 과정입니다. 빠따짜라와 끼싸고따미는 관찰하고 숙고하여 인식의 전환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정화스님의 말로 표현하면 뇌의 신경회로가 바뀐거지요. 붓다는 매 찰나찰나 조건 속에서 생멸하는 변화의 과정만 있다고 말합니다. 아침에 눈을 떠 밤에 잠들기까지 그 매 순간 일어나는 마음하나 관찰하고 숙고하여 진리의 방향으로 트는 것이 곧 깨달음의 과정이자 완성임을 빠따자라와 끼싸고따미의 이야기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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