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보순(감이당, 화요대중지성)

외척이 권력을 휘두르는 시대! 위로는 연이은 천재지변이 민심을 흉흉하게 하고 아래로는 기근과 궁핍이 온 나라를 뒤덮었지만 누구하나 발 벗고 나서지 않았다. 군주는 실권 없이 무능했고, 외척은 실권이 있되 무능했다. 그나마 유능하여 인재라 부를만한 자들의 상당수는 외척에 줄을 서느라 여념이 없었기에, 그들이 갖고 있는 유능은 사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 한나라의 대의차원에선 사실상 무능에 가까웠다. 그야말로 몰락의 시대였다.

게다가 이 시대는 누가 충신이고 누가 간신인지도 명확하지 않았다. 멀리서 보면 충신인데 가까이서 보면 간신이고, 분명 간신인데 그렇다고 딱히 간신으로 치부하기 어려운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이에 반고는 『한서』에서 몰락의 시대를 살아가는 신하들의 삶에 주목했다. 몰락하는 줄도 모르고 자기영달만을 추구했던 자부터, 몰락의 흐름 위에서 무엇인가를 해보려는 자와, 끝내 몰락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자에 이르기까지. 반고는 몰락의 시대를 살아가는 신하들이 대체 무엇을 하며 몰락을 겪어내야 하는지, 몰락이 시대의 대세라면 대체 어떻게 잘 몰락할 수 있는지에 대해 묻고 성찰했던 것이다. 지금부터 이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1. 정의를 외치고 비리를 저지른, 승상 적방진

몰락의 시대에, 그것이 몰락인 줄 모르고 자기영달만 추구하다 몰락한 인물이 있다. 그는 승상 적방진으로, 정의를 외치지만 가장 정의롭지 않은 인간부류다. 젊어서 소사(小史)일을 했으나 행동이 굼떠 욕을 많이 먹었던 적방진은, 자신이 제후에 봉해질 골상이란 말을 듣자 소사직을 그만두고 경학공부에 전념한다. 출세하고자 마음 낸 것이다. 그렇게 학문하기를 10년! 방진은 여러 유생들의 칭송을 받는 인물로 성장하여 낭관을 시작으로 박사, 승상사직, 어사대부, 승상에까지 오른다.

방진의 승진엔 이유가 있었다. 법문과 행정업무에 탁월했고, 모든 크고 작은 일에 밝았으며, 유가 사상으로 법률을 해석하여 법 적용이 법도에 맞았다. 게다가 공평 청렴하여 남에게 청탁하지 않았다. 해서 방진의 운신엔 거침이 없었다. 비리를 저지른 자들에 대해 고발할 건 고발했고, 탄핵할 건 탄핵했다. 사예교위인 진경과 연훈의 탄핵을 시작으로 구경의 반열에 오른 인물들에 이르기까지 방진의 탄핵레이더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작동했다.

누구도 감히 입에 올릴 수 없었던 외척 왕립에 대한 탄핵을 주청한 것도 바로 방진이었다. 이에 성제가 자신의 외삼촌이라 법대로 할 수 없다고 말하자, 방진은 포기하지 않고, 왕립이 안 된다면 왕립의 욕망에 편승해 공익을 배척하고 사익을 추구한 왕립의 붕당이라도 탄핵하여 악의 근원을 끊어내야 한다고 다시 주청한다. 결국 방진의 집요한 주청으로 후장군 주박, 거록태수 손굉, 전 광록대부 진함이 탄핵되기에 이른다. 이 일로 방진에 대한 성제의 총애는 하늘을 찌른다.

죄다 적폐인 시대에 비리에 눈감지 않는 방진의 등판은 그야말로 한나라의 구원투수처럼 보였다. 그러나 태중대부 평당처럼 방진의 실상을 꿰뚫은 자들은 방진을 그렇게 보지 않았다. 적방진의 정치행위를 공적 차원의 행동으로 해석하지 않은 것이다.

방진은 나라의 사직으로 자신을 신칙하며 여러 신하에 솔선하지도 않고 지난번에는 치도를 달리는 죄를 저질렀으며 사예교위인 진경이 공평한 마음으로 탄핵했는데도 방진은 자책하며 뉘우치지 않고 사적인 원한을 품고서 진경이 조용히 하는 말을 엿들었다가 헐뜯어 죄를 만들었습니다. 뒤에는 승상 설선이 북지군의 부도한 살인범을 잡으려고 속연을 보내 사예교위를 감독케 하겠다고 하자 사예교위인 연훈이 조정에서 이의를 제기하자 방진은 이번에는 연훈을 탄핵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방진은 도덕으로 승상을 보좌하려 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아부로 승상을 도우며 기어코 이겨 권위를 세우려 하니 그 근원을 막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반고, 진기환 역주, 「적방진전」, 『한서』7권, 469쪽)

평당이 보기에 방진의 탄핵은 비리 척결이 아니라 사적인 원한감정에서 비롯된 분풀이였다. 방진은 스스로 법을 어겼으면서도 반성하기는커녕, 진경이 그에 대해 고발하려하자 오히려 자신의 비리를 감추려 진경의 비리를 몰래 엿듣고 선수를 쳤다. 연훈에 대한 탄핵도 마찬가지였고, 진함에 대한 탄핵도 마찬가지였다. 방진의 탄핵은 공평하고 법도에 맞았던 면도 없진 않으나, 대부분의 경우 방진 자신을 향한 타인의 비방을 참지 못해 어떻게 해서든 죄로 엮어 좌천시킨 정치행위였다. 허나 성제는 평당의 주청을 듣지 않았다. 방진의 정치가 곧 정의라 믿었던 까닭이다.

water-1246527_1920

그런 방진에게도 위기가 찾아왔다. 위기의 발단은 순우장이 폐위된 허황후에게 다시 좌황후(左皇后)로 만들어주겠다며 뇌물을 받고 그녀를 농락한 일이 밝혀지면서부터다. 폐위된 황후라도 황후는 황후였기에, 농락은 그 자체로 대역죄였다. 성제는 진노하여 순우장은 물론 순우장과 교제하던 이들을 전부 연좌해 주살 파직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건, 이 순우장의 교제명부에 적힌 적방진의 이름이었다. 어찌된 일일까?

사실 방진은 청렴한 재상이라는 평이 무색할 정도로 간신 순우장과 막역했다. 서로 간에 칭찬하며 천거하던 사이였으니 두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권력에 영합하지 않는 척 했지만, 뒤로는 승상의 권위를 이용하여 온갖 사심을 채웠던 것이다. 연루가 명백해 방진의 파직은 분명해 보였다. 허나 방진은 이 화마에서 홀로 살아남는다. 성제가 방진을 너무 아낀 나머지 살려준 것이다. 구사일생!

허나 방진은 자신을 살렸던 군주의 자비를, 타인을 살려내는 힘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승상으로서 자신의 허물을 덮고 권위를 회복하고야 말겠다는 듯, 순우장과 교제했지만 그 친분이 드러나지 않아 살 수 있었던 인물들에 죄를 만들어 탄핵하고야만 것이다. 그 수가 모두 20여명에 이르렀다. 모든 도리에 밝은 승상이라며 칭송이 자자했지만, 방진의 선택은 이렇듯 늘 사적인 감정들의 반동일 뿐이었다.

그렇게 승상으로 일하길 10년! 성제의 마음도 변했다. 때마침 형혹성이 심수에 합쳐지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는데, 의조에서 근무하던 이심과 낭관 비려는 성제에게 공적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대신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라 상서했다. 방진은 걱정이었다. 무위도식하는 자가 자신이어도 문책을 당하고, 자기가 아니어도 문책을 당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승상의 위치가 바로 그런 자리였다. 방진은 진퇴를 고민했다. 허나 성제는 방진이 거취를 정하기도 전, 궁으로 불러 다그친다.

성제는 방진이 승상으로 올라있던 10년간 있었던 온갖 나쁜 일을 방진의 탓으로 돌리며 책임을 물었다. 성제 본인의 행실도 만만치 않았음에도, 그 모든 일이 방진 탓이라며 문책한 것이다. 이에 방진은 무슨 뜻인지 알아듣고, 그날로 자살한다. 죽음으로서 책임을 진 것이다. 몰락의 시대, 대의가 없는 권력이 어떻게 비겁하게 쓰일 수 있는가를 보여주며 방진은 그렇게 쓰러져갔다.

2. 두흠, 외척 왕봉의 조련사

시대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충신과 간신의 구별은 비교적 분명하다. 그러나 때론 충신과 간신으로 포획되지 않는 인물들이 있는데, 혹리 두주의 후손 두흠은 바로 그러한 자의 대표라 부를만하다. 두흠은 집이 부유해 어려서부터 경서를 공부하여 박식했지만 관리가 되려 하진 않았다. 한쪽 눈이 실명한 탓이다. 허나 평소 두흠의 형과 가까이 지내던 왕봉이 심원하고 광박한 두흠의 재능을 알아보고 일찍이 자신의 군무고령(軍武庫令)으로 삼아 자신을 보좌케 한다.

최고 권력가 왕봉의 특채였으니, 두흠도 여타 신하들처럼 왕봉을 위해 기꺼이 뼈를 묻을 각오가 되어 있진 않았을까. 그러나 두흠은 한가함을 즐기던 인물! 주어진 일은 했지만 그렇다고 애써 일거리를 만들진 않았다. 두흠에겐 ‘열심’이란 없었다. 하기야 벼슬에도 큰 욕심이 없어 이러저러한 핑계를 대며 자주 사임하는 인물이었으니 무슨 ‘열심’이 있었겠는가! 그럼에도 반고는 두흠에 주목했다. 시대의 조류로 보면 분명 외척에 빌붙은 간신이었지만, 참모로서의 두흠은 간신으로 치부하기 어려운 훌륭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왕봉은 늘 두흠과 함께 의논하였다. 명사인 왕준, 위안세, 왕연세 등을 자주 불러 칭찬하고 격려하였으며 풍야왕, 왕존, 호상의 허물을 변명 구원하였으며 공신의 절세를 계승케 하고, 사이(四夷)를 진무하는 등 당시의 여러 선정(善政)이 두흠에게서 나왔다.

(반고, 진기환 역주, 「두흠전」, 『한서』5권, 96쪽)

두흠은 시대의 형세를 읽어 자신의 거취를 정했다. 시대의 조건이 외척이 득세하여 군주가 미약할 수밖에 없는 형세라면, 미약한 군주를 위해 강대한 외척과 맞서기보다 어떻게 하면 그 외척을 잘 활용하여 나라를 바르게 이끌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게 더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대부분의 인재들이 외척과 왕봉에 빌붙어 자기영달만을 꾀했던 시대였음을 감안하면, 두흠의 행보는 무척이나 예외적이다. 외척에 빌붙어 선정을 이끌어내는 신하라니.

두흠은 왕봉의 과실을 고치고 선행을 장려하는 방향으로 왕봉을 이끌었다. 왕봉이 막강한 권력행사로 군주와 신하들을 두렵게 했을 때, 장군께서는 주공의 겸손함과 걱정하는 조심성을 따르고 양후가 위세를 낮추었던 일과 무안후가 욕심을 버린 일을 본받아서 범저와 같은 무리가 중간에 들어와 말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같은책, 96) 라고 말하며 왕봉을 깨우칠 정도였다. 두흠은 권력 옆에서 비굴하지 않았다.

물론 두흠이 이렇듯 깨우치는 말만 왕봉에게 했던 건 아니었다. 두흠은 책략에도 능했다. 예전에 경조윤 왕장이 조서를 올려 왕봉이 탄핵 위기에 처해있을 때,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는 상서를 올려 성제로부터 선처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이 책략 역시 두흠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책략은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calligraphy-brush-2884392_1920
스스로의 허물을 되돌아보고, 자신의 정치가 부끄러운 수준임을 아는 가장 좋은 방법 중에 하나가 글쓰기 아닌가.

두흠이 왕봉을 위해 처세를 지도해준 건 맞지만, 이걸 몰락의 시대를 살아가는 간신의 처세로 매도하긴 어렵다. 두흠은 그 어떤 사심 없이, 왕봉이 주공과 같은 섭정을 하도록 진심으로 바랐다. 왕봉에게 글쓰기를 제안한 것도 그 때문이다. 스스로의 허물을 되돌아보고, 자신의 정치가 부끄러운 수준임을 아는 가장 좋은 방법 중에 하나가 글쓰기 아닌가. 두흠은 왕봉이 글쓰기를 통해 한 단계 더 성장하길 바라며, 진정한 충심은 왕봉 스스로 군주가 의심할만한 일을 하지 않고 늘 겸사를 자처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고 자주 일깨웠다.

과연 이러한 삶을 간신을 보좌했다고 간신으로 치부해야 할까. 쉽지 않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두흠의 삶은 외척을 보좌하되 비굴하지 않았고, 책략을 쓰되 선정과 연결하려 했다는 점이다. 두흠의 이러한 면모는 우리가 알아줘야 하지 않을까.

3. 책까지 써가며 끝까지 극간한, 유향

적방진이 권력에 영합하여 자기 영달을 꾀했다면, 두흠은 권력에 영합은 하되 그 권력을 올바르게 쓸 수 있도록 이끈 인물이었다. 그러나 몰락의 시대엔 이런 인물들만 살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 이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면서 몰락에 대처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유향과 매복이다. 이들은 몰락의 시대에 권력에 영합하지 않고, 어떻게 자신이 놓인 조건에서 최선의 자기윤리를 발휘할 것인가를 고민한 자들이었다. 우선 유향부터 살펴보자.

Liu_Xiang_(Han_scholar)

유향은 한고조 유방의 아우 유교의 증손 유덕의 아들로, 그 유명한 유학자 유향이 바로 이 사람이다. 선제 때에는 이렇다 할 활약이 없었지만, 원제와 성제 때에 이르러 자주 충언을 올려 명성이 있었다. 원제 때에는 환관 홍공과 석현에 반대해서, 성제 때에는 외척에 반대해서 간언을 올렸다. 허나 유향의 외침은 통한 적이 없었고, 심지어 원제 때에는 환관에게 역공을 맞아 면직되어 서인으로 강등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러한 좌천이 유향의 충언을 멈추게 하진 못했다. 유향은 충언하고 또 충언했다.

그러던 유향이 멈춘 건, 동료들의 죽음을 통해서다. 자신과 뜻을 같이 했던 광록대부 주감이 말을 하지 못하는 병에 걸려 죽고, 태중대부 급사중 장맹은 모함에 의해 공거에서 자살한다. 이를 본 유향은 더 이상 뭔가 해볼 수 있는 때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자신과 동료들을 애도하며 10년간 출사하지 않았다. 유향은 의리가 있었다.

유향의 극간본능이 되살아난 건 성제 때였다. 성제가 유향을 불러다가 삼보지역의 수리사업을 총괄하는 중랑에 제수한 것! 유향은 다시 관직 생활이 시작되자, 예전처럼 적재적소에 상소를 올렸다. 그런데 이번엔 좀 달랐다. 원제 때에 자신의 상서가 채택되지 않은 것에 대한 성찰이었을까. 유향은 상서로 그치지 않고, 역사와 천문에 밝은 자신의 재능을 십분 발휘하여 책을 집필해 헌상한다. 군주를 깨우치기 위해 책까지 써가며 간언한 것이다.

유향은 상고 이래로 춘추시대와 육국을 거쳐 진과 한에 이르는 시기의 여러 징조와 재이의 기록을 모아 그와 관련된 일들을 추적하고 화복을 연결하며 그 징조와 증거를 정리하여 비슷한 종류로 분류하고 각각 조목을 붙여서 모두 11편으로 엮어 <홍범오행전론>이라 이름을 지어 황제에게 상주하였다.

(반고, 진기환 역주, 「유향전」, 『한서』2권, 357쪽)

한나라의 무너진 질서를 회복하고, 황실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자 한 유향의 행보는 진심 그 자체였다. 간언만으론 군주와 작금의 형세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 판단한 유향은, 시대를 이해하는 탁월한 안목으로 밤낮으로 책을 읽고 책을 썼다. 시대의 적폐를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붓끝을 가다듬은 것이다. 외척이 득세했을 때는 <홍범오행전론>을 지어 외척의 비리와 사심을 들추어 황실을 외톨이로 만드는 조정의 형세를 꼬집었고, 조씨 자매에 빠져 정사를 게을리 할 때에는 <열녀전><신서(新序)><설원(說苑)>등 총 50편을 지어 현숙한 부인들이 어떻게 군주를 보필해 나라를 번영케 하고, 음란한 여인들이 어떻게 나라를 망쳤는지를 일깨워주었다.

그러나 주색잡기에 빠져 있는 군주에겐 책도 소용없는 일. 성제는 유향의 책을 받고 감탄은 했으나, 아무것도 실천하지 않았다. 유향의 천금 같은 간언도, 성제에겐 변화의 계기가 되진 못했던 것이다. 성제는 그저 유향을 가까이에 두고 종친으로서 대우하며 자주 좋은 이야기만 들었을 뿐, 유향을 더 높은 관직에 임명하여 큰일을 맡기진 않았다. 외척과 승상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킬 만큼 성제는 단호한 군주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유향의 충정은 멈추지 않았다. 군주가 받아들이던, 받아들이지 않던 끊임없이 책을 쓰고, 수정하고, 미비한 부분을 채워 다시 올리기를 반복했다. 몰락하리라는 걸 알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떠나지 않고, 현실이 뭐라던 그저 자기의 길을 끝까지 걸어내는 것! 이것이 유향이 택한 몰락의 시대를 걷는 자기본위의 삶이었다.

usa-2777088_1920
현실이 뭐라던 그저 자기의 길을 끝까지 걸어내는 것!

4. 몰락을 받아들이고 양생을 택한, 매복

매복은 상서와 곡량춘추에 밝아 젊은 시절 군(郡)의 문학(文學)으로 천거되어 한때 남창현위로 벼슬살이를 했다. 허나 현위에 머물러서는 백성들의 삶이 개선될 거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는지 매복은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인 수춘현에 은거한다. 제 아무리 비방과 탄핵이 난무할지라도 벼슬만은 꼭 쥐고 놓지 않으려 했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스스로 관직을 내버리고 일상으로 돌아간 매복의 선택은 분명 이례적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그렇다고 매복이 정치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삶을 살아간 건 또 아니라는 점이다.

매복은 일상을 충실히 살면서, 나라가 돌아가는 사정은 항상 예의주시했다. 급한 사안이라면 길을 지나가는 사자들을 멈춰 세워서라도 그들에게 상서를 올려보냈고, 사자가 지나가지 않을 때에는 직접 초거를 빌려 타고 행재소에 찾아가 붓을 들었다. 허나 매복의 상서는 늘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였다. 하기야 왕봉이 조정을 좌지우지하는 마당에 바른 소리가 군주의 귀에 들어갈리 만무했고, 설혹 군주의 귀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관료가 왕봉에 줄을 대고 있었기에 정언(正言)이 오히려 사언(詐言)으로 간주되어 해를 입던, 누구도 바른 말을 하려 하지 않는 시대 아닌가! 매복이 보기에 이는 몰락의 조짐이었다. 환난은 도적이 봉기하고 제후들이 배반하는 데에서 오는 게 아니라, 군주가 간쟁하는 신하의 입을 막고, 천하 사람들이 벌 받을까 두려워 말하기를 꺼려하는 것에서 시작되는데, 지금이 정확히 그러한 시대였던 것이다.

이에 매복은 수차례 반려되면서도 끊임없이 성제에게 ()는 나라의 보배이니, 득사(得士)하면 나라가 튼튼하지만 실사(失士)하면 허약해집니다.’(반고, 진기환 역주, 매복전, 한서5, 550) 라고 간언하며 인재를 귀히 여기라 설파한다. 직언하는 신하의 지조를 꺾는 진나라의 망도(亡道)를 따라가지 말고, 충언을 듣고서 혹 따라가지 못할까를 걱정했던 한고조나 직언을 들으면 너무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던 한무제와 같은 패자들의 도를 따르라는 것이다.

viburnum-4015821_1920
‘잘 듣는’ 건 서경에서 말한바, ‘사방의 문을 열고 사방을 보는 눈을 밝게 가지라’ 했듯,

매복이 보기에 ‘잘 듣는’ 건 그저 귀를 열고 호응을 잘 해주는 것에 있지 않았다. ‘잘 듣는’ 건 서경에서 말한바, ‘사방의 문을 열고 사방을 보는 눈을 밝게 가지라’ 했듯, 인재의 과실에 연연하지 말고 지모를 취하는 것에 힘쓰는 것에 그 핵심이 있었다. 즉 이는 잘못은 잘못이고, 직언은 직언이고, 능력은 능력이니, 간언을 받아들이는데 그 능력과 행적을 연결하지 말고 오직 간언으로써 취하라는 뜻이다.

이를 위해서 매복은 기본적으로 군주가 인재 채용에 확고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고 항변한다. 친해야 할 사람을 가까이하지 않고, 친하게 지내지 말아야 할 사람을 가까이 하고 있는 지금과 같은 인재 채용으론 한나라의 미래가 없다고 본 것이다. 친친지도(親親之道)의 확립이 필요했다. 그러나 성제는 늘 그래왔듯 역시는 역시였다. 끝내 매복의 상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에 매복은 단념했다. 그리고 더 이상 붓을 들지 않았다. 그저 무엇을 하되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어떻게 자신을 바로 세울 수 있는 윤리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고민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매복은 소모적인 상서를 멈추고 가향에 홀로 거쳐하여 일상을 살아가기로 마음을 낸다. 양생을 벗 삼고 독서를 일삼기! 훗날 왕망이 정권을 탈취한 이후, 항간에는 매복이 신선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하고, 어떤 마을에 문지기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으나 그 끝에 대해선 남은 바가 없다. 홀연히 사라진 매복.

water-lilies-1825477_960_720

몰락의 시대에 신하로 산다는 것에 정답은 없다. 어떤 삶이 더 고귀하고, 어떤 삶이 더 비천한가는 오직 후대에서 바라보는 가치평가일 뿐, 결코 진리가 아니다. 중요한 건 공자가 말했듯, 도가 있을 때만 무엇을 하고 도가 없을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이 아니라, 도가 없다 하더라도 여전히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그렇게 계속하더라도 군주와 세상이 변하지 않으면 신하된 자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후한시대를 살아가던 반고의 고민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유향처럼 계속 가야 하는가 아니면, 적방진처럼 시류에 영합하여 자기영달만이라도 꾀해야하는가, 그도 아니면 유흠처럼 차선이라도 걸어야하는 것인가, 매복처럼 완전히 떠나서 양생의 길을 걸어야 하는가. 생각해 볼 일이다.

0 0 vote
Article Rating
guest
0 Comments
Inline Feedbacks
View all comments
0
Would love your thoughts, please comment.x
()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