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소유욕의 화신, 연두 - 2)

이호정(남산강학원 청년스페셜)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리는

잠깐 시간을 내어 상상해본 적이 있다. 정말로 그 애가 ‘나만’ 본다면? 마치 스토커처럼 계속해서 내 옆에만 붙어있고, 내 얼굴만 쳐다보고 있고, 내 말만 들으려 하고, 다른 사람은 일절 만나려고도 하지 않는다면…? ‘나만 봐줬으면 좋겠다’는 그 주문이 실제로 이루어진다면, 과연 나는 어떨까? 내가 아무리 그 애를 좋아한다고 해도,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애의 그런 모습들이 지긋지긋하게 느껴질 것 같다.

아무리 값비싸고 몹시 갖고 싶었던 물건도, 막상 손 안에 들어오면 금세 그 가치를 잊어버리기 마련이다. 연인과도 소유적 관계를 맺고 있는 한, 그 법칙을 피할 수 없다. ‘둘만의 연애’는 잘 ‘깨진다.’ 좀 만나보다가 뭔가 서로의 뜻대로 안 되거나 생각이 조금만 다르면, 감정이 확 식어버린다. 요새 마치 자연스러운 현상인 양 여기는 ‘금사빠’ 기질 역시, 바로 이런 소유적 욕망을 기반으로 한다. 내가 원하는 모습, 내 입맛에 맞는 상대의 모습을 보며 금방 마음이 동하고 사랑에 빠지는 건, 그 상대를 ‘갖고 싶어 하는’ 마음과 다르지 않다. 금사빠의 마음이 식는 순간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상대의 실제 모습이 다를 때다. 그런 건 ‘갖기 싫으니까’ 마음이 홱 돌아서는 것이다.

내가 원했던 연애, 둘만의 연애가 향하는 곳도 금사빠가 도달하게 되는 곳과 크게 다르지 않다. 둘이서만 놀고, 둘이서만 얘기하고, 둘의 관계만을 중요시하다보면, 어느 순간 서로에게 몹시 익숙해지고 지루함을 느끼게 된다. 같은 패턴으로 다툼을 반복하고, 비슷비슷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나중에는 비슷한 얘기 또 들어주는 것도 귀찮아지면서 점점 대화가 적어지고……이거, 어디서 많이 본 얘기…? 그렇다. ‘부부’가 딱 그렇다.

나와 그 애는 이제 나이도 꽤 됐고 연애한 지도 오래 돼 가다 보니, 슬슬 같이 살아볼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런데 어째 내게는 설렘이나 기대보다, 두려움이 살짝 더 앞선다. 같이 살게 되면서 우리 사이도 내 머릿속에 자리 잡은 ‘부부’와 비슷한 모습이 되어가지는 않을까 하고 걱정하는 탓이다. 자라오면서 내가 많이 보고 들은 부부의 모습은 굉장히 희한하게 느껴지는 데가 있다. 같이 살면서 서로의 얼굴을 보기 싫어하고, 같이 있기 싫어하면서 ‘그래도 같이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말하고, 말도 잘 안 통하면서 ‘정(情)’이라는 이름으로 근근이 같이 살고…. 이렇게 이상한 의존관계가 다 있다니, 도대체 왜 이러고 살아야 하지? 싶어서 결혼은 꿈도 안 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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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잘 안 통하면서 ‘정(情)’이라는 이름으로 근근이 같이 살고…. 이렇게 이상한 의존관계가 다 있다니, 도대체 왜 이러고 살아야 하지?

나는 드라마, 현실에서 접하는 부부 사이를 보면서 아무리 못한 친구 사이도 이 정돈 아닐 것 같다고 느꼈다. 같이 사는 사람에 대한 존중감, 예의, 소중함 같은 것들은 가볍게 무시되는, 서로의 존재 자체가 서로에게 에너지를 주지 못하는, 상대를 처음 만났을 때의 호감이 무진장 퇴화되어 있는 관계. 이런 관계에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다. 오로지 동일한 것들을 반복하게 될 뿐이다. 이 관계를 그냥 ‘유지해야한다’는 것 말곤, 그 어떤 동력도 생겨나지 않는 허약한 관계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소유’는 필연적으로 ‘지루함’을 낳는다.

결혼한 부부는 연인 사이보다 훨씬 더 서로를 구속하려는 힘이 강하다. 바꿔 말하면, 훨씬 더 서로를 ‘가졌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는 뜻이다. 그렇게 더 완벽히 가졌는데, 왜 불륜은 그렇게 많을까? 왜 가진 것에 만족할 줄을 모르고, 또 새로운 사람에게 끌리게 되는 걸까?

그건 바로 상대를 ‘소유했기’ 때문이다. ‘소유’는 필연적으로 ‘지루함’을 낳는다. 상대를 물건처럼 내 수중 안으로 들어오게 하면, 그 사람은 ‘활기’를 잃는다. 남편보다 연인일 때가 더 매력적이게 느껴지는 이유는, 연인일 때 그 사람이 좀 더 자유롭기 때문이다. 내가 모르는 모습도 있고, 내가 좀 모르는 관계도 있고, 거기서 그 사람은 나와 있을 때와는 또 다른 즐거움을 느끼기도 한다. 그 사람이 능동적으로 맺는 다른 관계들은 그 사람에게 활력을 주는 소중한 통로다. 우리는 그런 곳에서 생기를 얻는다. 사람들과의 다양한 만남에서.

하지만 상대가 ‘내 손 안에만’ 들어오는 순간, 그 사람이 활기를 얻는 통로는 차단된다. 방구석에만 드러누워 있고, 귀찮다고 아무도 만나지 않고, 그러다보니 매일을 똑같이 살고…그런 모습을 보면서 도대체 어떻게 매력을 느끼겠는가? 둘 사이에 남은 것은 ‘반복된 삶을 사는 서로’뿐이다. 서로를 온전히 가졌지만 안타깝게도 정말로 서로가 전부인, 그것밖에 안 남게 된 이 허무함을 어찌하오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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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을 연두에게 빼앗긴다면, 그 애와 나 사이에는 장차 이런 세계가 펼쳐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그 애를 계속해서 멋진 사람으로 보고 싶다. 배우는 걸 좋아하는 그 애에게 반한 것처럼, 적극적으로 삶을 배우고 싶어 하는 그 애의 모습에 믿음이 가 함께 살아보고 싶어진 만큼, 앞으로도 그 애와 같이 공부하며 매일 매일을 새롭게, 멋진 삶으로 꾸려나가고 싶다. 서로를 믿고, 배울 수 있고, 함께 걸어갈 수 있는, ‘동반자’라는 말 그대로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건, 그 애와 나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존중하는 일이다. 사실, 우리 삶의 욕망은 결코 소유를 향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뭔가를 갖게 되면, 금세 질려한다. 그리고는 금방 다른 새로운 것을 찾고, 거기서 또 재미를 느낀다. 이것도 참, 독특한 특성이다. 그렇~게 뭔가를 가지려고 들면서, 막상 가지면 흥미를 잃다니? 나는 좀 전에 ‘우리 삶의 욕망이 결코 소유를 향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삶의 욕망? 자, 이제 ‘기계’라는 새로운 캐릭터가 등장할 때가 되었다.

연두 vs 기계

‘기계’는 프랑스의 짝꿍 철학자들,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가 내게 살포시 안겨준 세계다. 사실 살포시는 아니고, 엄청나게 큰 충격과 공포와 뒤흔듦을 동반하긴 했다.^^; 어느 날 『안티 오이디푸스』라는 제목도 희한한 책을 읽고 있는데, 들뢰즈-가타리란 사람들이 나에게 불쑥 “넌 기계다!!”라고 말했다. 나를 잘 알지도 못하는 서양 사람들이 말이다.

이게 웬 말이여? 하고 쫌 더 들어보는데, 들으면 들을수록 공포스러웠다. 내가 ‘나’가 아니라니? 게다가… 내 입과 가슴 같은 게 다 ‘기계’라니??

  “젖가슴은 젖을 생산하는 기계이고, 입은 이 기계에 짝지어진 기계이다.”

(질 들뢰즈‧펠릭스 과타리, 『안티 오이디푸스』, 민음사, 23쪽)

정말 이상한 말이지 않은가? 난 생명이 있는 사람인데, 내가 왜 기계라는 거야ㅠㅠ..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건 간에 나는 수업 커리 상 이 책을 가지고 글을 써야 했기 때문에, 이런 말들을 계속해서 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 이곳저곳을 보고 ‘욕망기계’라고 말하는 들뢰즈-가타리, 그리고 이 욕망기계는 끊임없이 ‘생산’하고, ‘짝짓기’를 한다고 말하는 들뢰즈-가타리. 나는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 학인들과 계속해서 읽고, 쓰고, 수다를 떨면서 이 짝꿍 철학자들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아주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들리면 들릴수록, 어딘가 세상 시원~해지는 느낌이 드는 게 아닌가! 이건 또 뭔 효과지??

  “그것은 도처에서 기능한다. 때론 멈춤 없이, 때론 단속적으로, 그것은 숨 쉬고, 열 내고, 먹는다.”

(같은 책, 23쪽)

『안티 오이디푸스』의 본문 첫 줄이다. ‘그것’은 바로 욕망기계다. 기계는 도처에서 ‘기능’하고 있다. 숨 쉬고, 열 내고, 먹으면서. 또, 짝짓기하면서. 아기를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된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는, 무슨 이유인지 엉엉 울다가 간식 하나를 입에 넣어주면, 뚝 그치고 얌얌 녹여 먹는다. 또, 눈으로는 저 멀리를 보고 있다가 손은 입에 막 집어넣는다. 아기의 눈-기계는 저 앞의 외계인 같이 생긴 아저씨와 짝을 짓고 있고, 아기의 입-기계는 아기의 손-기계와 짝짓는다. 아기를 이루고 있는 욕망기계는 정말이지 도처에서 기능한다. 어떤 기계는 숨을 쉬고, 어떤 기계는 열을 내고, 어떤 기계는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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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는 도처에서 ‘기능’하고 있다. 숨 쉬고, 열 내고, 먹으면서. 또, 짝짓기하면서.

이게 바로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생산’이다. 우리는 이렇게 끊임없이, 도처에서 ‘생산’하고 있는 기계들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기계들은 ‘임시변통 재주꾼’이다. 입-기계는 음식이랑 만나면 먹는-기계가 되고, 사람이랑 만나면 수다-기계가 되었다가도, 어떤 사람이랑 만나느냐에 따라 뽀뽀-기계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 입-기계는 신중해야 할 것이다. 사람을 착각하지 않도록.^^

그런데 이 모든 욕망기계들이 ‘나’라는 한 단어로 환원되는 순간, 욕망은 ‘생산’이 아니라 ‘획득’의 문제가 된다. “이것은 나야. 따라서 저건 내 것이야! 나는 저것을 원해.” ‘나’라는 주체는 ‘내’가 무엇인가를 ‘욕망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순식간에 욕망의 본질이 ‘결핍’이 되어버린다. 뭔가를 생산하고 짝짓는 힘이 아니라, 채우고 가져야 하는 어떤 게 되는 것이다.

‘기계’는 짝짓는다. 반면, ‘나’는 원한다. 삶을 무엇으로 볼지에 따라 방향은 아주 달라진다. 나는 공동체에 살면서, 들뢰즈-가타리와 만나면서 이 삶이 실제로 ‘기계’들의 짝짓기 대향연이라는 걸 온몸으로 느꼈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글만 해도 그렇다. 이 글은 ‘내’가 ‘나’로서 쓰는 게 아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 글쓰기 모임에서 근영샘-기계와 수정-기계, 그리고 호정-기계가 우글우글 짝짓기를 일으키고 있다. 기계들은 올 봄부터 함께 읽어 온 안티 오이디푸스-기계와도 활발히 접속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서로의 입-기계들이 다양한 연애사에 대해, 성욕에 대해 이야기를 뿜어대고 있다. 그 파동들이 내 손-기계와 만나 지렁이 같은 필기를 만들어 내고, 그 필기가 노트북 위에 앉은 손-기계에 의해 글로 펼쳐져 나간다. 이렇게 글이 쓰일 수 있다니, 생산하는 힘이란 참으로 경이롭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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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라는 관계는 기계들이 더욱 강하고 밀도 있게 접속하는 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계들을 ‘나’로 보기 시작하는 순간, 너무나 쉽게 소유의 대상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 연인과의 사이에서 강렬하게 ‘생산’하고자 하는 힘이, 연인을 절대적으로 ‘획득’하고자 하는 힘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그 힘 안에 머무르는 한 연인과의 짝짓기는 시들어갈 수밖에 없다. 무엇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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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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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彬

반복된 삶을 사는 서로가 아닌 생산하는 기계로!
원하는 게 아니라 생산하고 짝짓는 것이라…!
멋지네요~~!! 곱씹어 봐야 겠어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