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니체] 청년과 에로스 - 2)

근영(남산강학원)

약자는 하나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 자신을 고양시키지 않되 우월해지기. 이 막다른 골목에서 약자는 어떻게 길을 낼까?

자신을 고양시키는 출발점은 자기 자신과의 대면이다. 하지만 약자는 두려움과 귀찮음으로 자신과 마주하지 못한다. 그의 시선은 자신이 아닌, 외부 세계를 향해 있다. 때문에 약자의 삶의 척도는 외부 대상들이며, 힘에의 의지를 실현하는 방식 또한 외부 대상들을 통해서다. 우리는 ‘2부 약자가 살아가는 법’에서 그 실현 방식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여기서는 몇 가지 대표적인 것들만을 간단히 소개해 보려 한다.

약자의 기쁨 - 인정욕망과 갑질, 평등과 동정

약자는 스스로 자신의 존재에 대한 긍정을 끌어내지 못한다. 자기 자신에게 눈을 감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약자에게는 자신이 잘났음을 증명해 줄 외부가 필요하다.

이를테면 다른 사람들의 인정. 약자는 타자의 인정이 있어야 자신의 잘남을 확인할 수 있다. 해서 약자는 인정욕망에 시달린다. 그의 신경은 온통 타자들의 욕망에 가 있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들려 애쓰며, 행여 책잡힐까 전전긍긍하며, 일이 잘 마무리될 때에도 사람들의 인정이 없으면 괴로워하거나 인정해주지 않는 사람들을 원망한다. 이렇게 타자들의 눈치를 보내며 지내려니 인정을 받아 기분 좋은 것도 잠시 잠깐뿐. 하여 약자는 늘상 고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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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방식도 있다. 약자의 궁여지책! 기발하고 교묘하기는 해도 우리 시대에 아주 흔한 방식. 우선, 약자는 두렵고 귀찮다. 혹여 자신에게 있을지 모를 못난 면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그런 것을 그냥 모른 척하며 살고 싶은 게으름이 약자의 자기 대면을 가로막는다. 그런데 만약 그런 자신을 새삼 확인해야 한다면 어떻겠는가. 당연히!! 싫을 거다.

약자가 강자처럼 자신을 탁월하게 하려는 사람들이 싫은 이유는 이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 앞에 서면 알게 모르게 느껴지는 자신의 나약함, 이로부터 올라오는 열등감이 그를 괴롭히는 것이다. 여기서도 외부를 향해 있는 약자의 시선은 그 불쾌감의 원인을 자기 밖에서 본다. 강자 같은 사람이 없다면 내가 그런 기분을 느낄 일이 없지 않겠는가. 해서 약자는 어느 누구든 탁월해지지 않길 바란다. 자신처럼 자기 존재를 고양시키는 일 따위는 모른 채하며 살아가길 원한다.

이제 약자는 존재를 고양시키려는 사람들을 끌어내리려 든다. 하지만 약자는 그런 일을 직접적으로, 대놓고 하진 못한다. 그러기엔 그는 힘이 없고 두렵다. 하여 그는 다른 명분을 내세운다. 이를테면 ‘평등’. 우리는 평등이라는 말을 들으면 일단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상황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니체는 평등을 강하게 비판한다. 평등이란 약자가 자기 자신을 고양시키려는 사람들을 끌어내리기 위한 명분일 뿐이라는 것. 평등이라는 가치를 가지고 약자는 말한다. 굳이 그렇게 자기 존재를 운용하는 고된 일을 해야 하냐고, 그냥 평범하게 살자고, 그래서 비슷비슷해지자고, 다들 고만고만해지자고. 그렇게 약자는 자신의 약함으로 인해 느껴지는 불쾌감을 피하려 든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면 좀 더 공격적으로 타자를 끌어내리는 방법도 있다. 갑질이 그런 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발아래 있게 되면 자동으로 자신의 위치가 올라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약자는 존재적으로 한 치도 고양되지 않고, 지금 그 자리 그대로 고양된 기분을 맛볼 수 있다. 자기와 대면하지 않고도, 조금의 탁월함이 없이도, 우월감을 느낄 수 있는 마법! 이 기만적인 고양감을 위해 상대를 깔아뭉개며 자신의 우월함을 입증하려는 약자들이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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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과 같은 마음자리이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정반대의 것처럼 여겨지는 방법도 있다. ‘동정’(연민). 당연한 얘기지만, 우리는 결코 우리보다 잘난 사람을 동정하지 않는다. 동정의 대상은 언제나 자신보다 못났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다. 여기에서 또 하나의 기만적인 우월감이 생겨난다. 자신보다 못났다는 것, 그것이 역으로 자신이 잘났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게 해서 동정을 즐기는 약자들이 또한 생겨난다.

약자는 못난 사람, 불쌍한 사람을 좋아하고 찾는다. 혹여 그런 사람들을 발견하지 못하면, 만들어서라도 찾아낸다. 그의 눈에는 유독 사람들의 상처나 힘든 면들이 크게 들어오는 것이다. 그렇게 약자는 누군가를 불쌍해하며 동정한다. 그 속에 담긴 안도감을 느끼며, 자신은 상대적으로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우월감을 느끼며 말이다.

약자는 이렇게 다른 사람들을 보잘 것 없게 만듦으로써 자신의 우월함을 확보한다. 너는 못났다, 고로 나는 잘났다. 혹은 네가 나쁘다, 그러니 나는 착하다, 라는 식이다. 타자를 부정하는 방식으로밖에는 자기 자신을 긍정할 줄 모르는 약자. 누군가를 못나게 만드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 약자. 니체는 이러한 약자의 길을 거부한다. 그 길이 부도덕하기 때문은 아니다. 단지 그 삶이 누구보다 약자 자신에게 해롭다는 것, 그 때문이다.

약자의 고통 - 불안과 두려움, 자괴감과 원한감정

타자를 끌어내림으로써 느끼는 기만적 우월감. 약자는 다른 이들을 슬프게 함으로써 자신의 기쁨을 얻는다. 여기서 약자는 한 가지 사실을 놓치고 있다. 그 우월감은 부정적인 감정 위에 세워져 있다. 해서 그 자신을 부정적인 감정으로 내몬다. 생각해보라. 못난 것만 봐야 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들에 둘러싸여 사는 기분을. 눈을 돌리는 모든 곳에서 슬픔과 마주해야 하는 기분을. 그런 상황에서 유쾌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 때문에 약자의 기쁨에는 우울과 짜증 같은 묘한 불쾌감이 따라붙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 나이가 오십인 사람이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들의 대장이 된다면 좋아라 할 수 있을까. 그래도 자신이 대장이라며 뽐낼 수 있을까. 그러기는 정말 쉽지 않을 거다. 마찬가지다. 못난 사람들 위에서 느끼는 우월감으로는 자존감을 가질 수가 없다. 각자 마음 깊은 곳은 알고 있는 것이다. 무능력한 사람들 위에서만 자기 능력을 확인하는 그 무능력을. 약자의 우월감은 충만함이 아닌 헛헛함과 열패감을 그에게 안겨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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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의 우월감은 충만함이 아닌 헛헛함과 열패감을 그에게 안겨줄 뿐이다.

자신을 괴롭히는 이런 감정들에서 벗어나는 근본적인 방법은 강자의 길로 삶의 방향을 트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약자는 두려움과 게으름에 발목을 잡힌다. 그는 지금껏 해오던 방식을 고수하려 든다. 덜 두렵고, 더 편하기 때문이다. 약자는 이런 자신을 다시금 합리화한다. 더 열심히 하지 않아 그런 것뿐이라는 자기반성으로.

약자는 그렇게 가던 길을 더 열정적으로 걸어간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약자는 더 큰 불안과 두려움에 내몰린다. 언제든 누군가의 발밑으로 끌어내려질 수 있다는 불안, 상대를 끌어내리지 않으면 자신이 끌어내려 질 거라는 두려움. 그럴수록 더더욱 누군가를 끌어내리는 일에 열심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불안감. 그리고 이로부터 생겨나는 세상 사람들에 대한 극도의 경계와 두려움까지.

게다가 외부 대상을 통해 느끼는 우월감은 불안정하고 취약하다. 외부 세계는 내 뜻과는 상관없이 굴러가기 마련이다. 내 맘대로 붙잡을 수도, 가지 못하게 막을 수도 없다. 그렇게 하려면 정말이지 피나는 노력을, 자기 존재를 완전히 바치고 태우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 하지만 그런다고 원하는 대로 된다는 보장은 1도 없다. 그저 초조해하고 발만 동동 구를 뿐이다.

그렇게 약자는 안팎으로 시달린다. 자신을 운용할 수 없으니 자기 자신에게 휘둘리고, 잘 나지기 위해 외부 대상들에 또한 휘둘린다. 요컨대, 약자는 자기 자신에게도, 세상에도 한없이 끄달리며 노예적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고단하고 힘들지 않을 수 있을까. 약자는 지친다. 진절머리가 난다. 그리고 밉다.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자신이 밉고,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세상이 밉다.

하지만 그 미움은 약자가 살아가는 힘이기도 하다. 그런 미움 속에 자신의 나약함을 숨길 수 있기 때문이다. 니체는 이를 ‘원한 감정’이라 부른다. 원한 감정은 약자가 붙잡는 마지막 동아줄이다. 비록 썩은 동아줄일지언정 약자는 그것에 매달리고, 그것으로 자신을 지킨다. 아무리 약자라도 자기 존재에 대한 비루함을 가지고 삶을 이어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다시 약자는 결국 약자일 수밖에 없게 되는 악순환. 약자는 힘에의 의지를 끝까지 놓치지 않도록 원한 감정으로 자신을 합리화한다. 문제는 내가 아니다. 나는 ‘원래’ 이렇게 살 사람도, 이렇게 살고 싶은 사람도 아니다. 난 어쩔 수 없었고, 해서 억울할 뿐이고, 피해자일 뿐이다. 그렇게 약자는 삶의 위기를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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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썩은 동아줄일지언정 약자는 그것에 매달리고, 그것으로 자신을 지킨다.

약자의 삶은 이렇다. 잘 나지려고 하면 할수록, 삶은 엉망이 되어간다. 불쾌감과 낮은 자존감, 초조함과 불안, 그리고 두려움과 원한 감정으로 꽉 들어차 있는 삶. 누가 이 길을 가고 싶을까. 누가 그 삶을 자처할까. 하지만…. 하지만…그런 시대가 있다. 약자의 방식이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시대, 사람들이 기꺼이 그 고단하디 고단한 약자의 길을 걸어가고자 하는 시대, 그래서 모두가 힘들며, 모두가 억울함을 토로하는 시대. 바로 그런 시대와 니체는 마주했고, 우리는 살아간다. 약한 놈들의 전성시대, 을들의 세상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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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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쩡하오
Guest
쩡하오

제목 보고 문샘 글인 줄 알았어요..ㅎ
자기 자신의 생명력으로부터 눈을 감게 만드는 약자적 삶의 방식이 전성기인 시대…
이 시대에 망치를 쾅쾅쾅! 뚜드려주시는^^
‘을’도, ‘갑’도 중요치 않은 활기 속에서 살고 싶어집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