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하 (남산강학원 청년스페셜)

연암이 자신의 호 ‘연암’을 따온 ‘연암협’은 개성 부근 황해도 금천군의 한 깊은 산골이다. 연암은 후일 살림이 더 어려워지면 그곳에 터를 잡고 살아볼까 했었는데, 실제로는 예상보다 빠르게 그곳으로 이사해야 했다. 당시 정조의 신임을 받으며 권력을 잡고 있던 홍국영이 연암을 제거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1778년, 목숨이 위태로워진 연암은 급히 가족들을 데리고 산속으로 들어간다.

그런 곳에서도 연암을 찾아오는 이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개성의 부유한 양반 집안, 남원 양씨 양호맹, 양정맹 형제였다. 연암은 개성에 있는 양호맹의 별장에 머물기도 하고, 둘을 통해 양씨 집안사람들과 교유하기도 했다. 연암은 이때 호맹에게 「죽오기」와 「양 호군(양호맹의 백부) 묘갈명」을 지어주고, 정맹에게는 「만휴당기」, 양씨 집안에는 「영사암기」를 지어주었다. 그리고 그때 만난 (역시 남원 양씨) ‘양현교’라는 청년(?당시 27세)에게도 글 하나를 지어준다.

양군은 본성이 게을러 들어앉아 있기를 좋아하며, 권태가 오면 문득 주렴을 내리고, 검은 궤 하나, 거문고 하나, 검 하나, 향로 하나, 술병 하나, 다관 하나, 옛 서화축 하나, 바둑판 하나 사이에 퍼진 듯이 누워 버린다. 매양 자다 일어나서 주렴을 걷고 해가 이른가 늦은가를 내다보면, 섬돌 위에 나무 그늘이 잠깐 사이에 옮겨 가고, 울 밑에 낮닭이 처음 우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궤에 기대어 검을 살펴보고, 혹은 거문고 두어 곡을 타고 술 한 잔을 홀짝거려 스스로 가슴을 트이게 하거나, 혹은 향 피우고 차 달이며, 혹은 서화를 펼쳐보기도 하고 혹은 옛 기보를 들여다보면서 두어 판 벌여 놓기도 한다. 이내 하품이 밀물이 밀려오듯 나오고 눈시울이 처진 구름처럼 무거워져 다시 또 퍼져 누워버린다.

박지원, 『연암집』(하), 「주영렴수재기」, 돌베개, p328

양현교의 초당(집 옆에 작게 지은 집채) ‘주영렴수재’에 써준 이 기문은, 읽는 것만으로도 여유로워지는 기분이 든다. 이 집 이름은 晝永, 낮이 길고 簾垂, 발이 드리운 집. 이 글에서 가장 놀라운 문장은 맨 마지막에 나오는 다시 나무 그늘과 처마 그림자를 바라보면 해가 여전히 서산에 걸리지 않았다이다. 온갖 게으름을 다 부리고, 누워 자다가, 손님이 오면 손님을 맞이하고, 그렇게 해도 아직 낮(!)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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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지 놀랍게도 연암이 묘사하는 이 선비의 ‘권태’에서는 아무 결핍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렇게 게을러도 되나?’ 라던가, ‘벌써 또 하루가 다 갔네’ 라던가. 우리 현대인이 바쁘게 살면서 늘 달고 사는 이런 말들이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대체 이 길고 긴 낮을 향유하는 내공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우리는 열심히 일을 하거나, 공부하거나, 계속해서 ‘무언가를 한다.’ 그렇지 않은 시간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무언가 하지 않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sns와 채팅창 속에서 부유하거나 음악과 영상의 바다 속으로 자신을 던져 넣는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를 ‘고독이 사라진 시간’이라고 말할 정도다. 그러니 저렇게 “퍼져 누워”있는 양현교의 모습을 보면 우리는 어쩐지 불안해지는 것이다.

그는 게으름을 부리고 싶어지면 초당에 들어가서 자다가 곁에 있는 거문고를 타거나, 검을 살핀다. 하나도 급하지 않으니 시간이 많은 건 당연하다. 술 한 잔을 마시며 ‘스스로 가슴을 트이게’ 한다. 그때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향을 피우고 차를 달인다. 무얼 위한 게 아니라 그저 재밌어서다.

우리는 이 ‘길고 긴 낮’ 시간을 잃어버렸다. 늘 어딘가에 도달해야 하고, 시간을 쪼개서 ‘알차게’ 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할 일을 줄이고, 천천히 사는 것으로 해결해보자는 말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어떤 것을 잃어버린 것 같다는 말이다. 특별하지 않은 일상을 충만히 보내는 힘, ‘고독’ 속에서 혼자 사유하는 힘, 그리고 낮을 길게 쓸 수 있는 능력 같은 것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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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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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영
Guest
다영

그 많은 걸 하고도 낮이라니..ㅋㅋㅋㅋ 참 재밌는 부분이다ㅋㅋ!! 동지섣달 밤이 길어서 낮이 짧은 줄 알았더니, 고독속에서 사유하는 힘을 키워야겠군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