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스님 10월 선물강좌 중

도반1. 자기자신 — 발명된 자아

저한테 (종이를) 이렇게 주면서, ‘친구’ 이렇게 쓰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강의 주제 부탁드릴 때를 말씀하시는 듯함.] 우리가 ‘도’ 그러면 굉장히 이제 갑자기 어려워지는 말처럼 보이긴 하는데, 이와 같은 추상적 사고를 본격적으로 하게 되면서부터 문화라고 하는 것이 형성됐다라고 이야기를 한다고 합니다.

저는 그 책을 안 읽었는데 다른 사람 책 읽다보니까 ‘사피엔스’ 라고 하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고 하는군요. 몇 만 년 전에, 대개 7만 년 전이라고 하는데, 추상적 사고를 하게 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규정하는 사람에 따라서 시간이 조금씩 다른 것 같긴 하더군요.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사람들이 ‘도’라고 하는 그런 추상적인 사고를 하게 되면서, 바꿔 말하면 우리가 현실적으로 직접 보고 듣고 만지고 하는 게 아니고, 뭔가 현실이 아닌데 즉 현실에서는 없는 것인데 그 없는 것을 일반화시켜서, 즉 문자화 할 수 있는 능력이 발현되는 때부터 문화가 싹트기 시작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문화라고 하는 말을 조금 바꿔보면 문자화 할 수 있는 능력이죠. 물론 글 자체가 생긴 건 아닙니다만, 우리 머리에서 사고가 언어를 중심으로 추상적 사고가 형성되는 그 시대를 문화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주제를) 인생길을 함께 걸어가는 반려자들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라고 하는 것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실상 사람이 함께 인생의 길을 살아가는 것에서 거의 뭐 우주적 조건이 있고 전 지구적 조건이 있고 국가적 조건이 있고 그런 굉장히 넓은 범주도 우리 한 사람이 살아가는 길에 영향을 주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걸 계속 좁혀보면 일단은 자기죠. 그 다음에 가족, 가까운 친구, 또 좀 가면은 별로 이제 함께 인생의 길을 간다 라고 현실적으로 느끼기가 어렵습니다. 바꿔 말하면 자기 자신을 어떻게 볼 것인가가 아마 인생길을 살아가는 데 굉장히 중요한 인식의 토대 중 하나입니다.

근데 이 책을(사피엔스) 읽다보니까 무슨 말이냐면 여기 보니까 돈이 마음이니 자아라는 것들은 발견된 것이 아니라 발명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문자화 되면서부터 자기가 매일매일 바뀌고 인연 따라 변하고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 문자로 자아라고 하는 말을 쓰게 되면서 발명된 자아라는 거예요. 이 발명된 자아의 개념 범주에는 이렇다 저렇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와 같은 나를 일생동안에 만날 수가 별로 없어요. 매일 매일 만나는 자기가 매일 매일 변하고 있는 그 자기를 자기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일을 하는 이면에 주체로서의 자아가 있다라고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 자아를 발견하는 것은 발견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사용에 의해서 발명된 것이기 때문이에요. 사실을 만나는 게 아니고 발견하는 게 아니고, 이미지에 의해서 발명된 사건이에요. 그래서 매일매일 동일한 자아를 찾는다고 하면 그것은 거의 실패할 확률이 굉장히 많겠죠.

도반2. 가족, 친구… — 직접 체험할 수 없는 세계

그 다음 두 번째, 가족입니다. 방금 자기도 잘 모르는데 가족도 마찬가지죠. 가족과의 관계는 직접적으로 가족의,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행위나 느낌을 직접적으로 절대로 체험할 수가 없어요. 자기가 만들어진, 자기가 발명한 세상 보기라고 하는 틀을 통해서 보는 거예요. 바꿔 말하면 자기 자신도 온전히 보기가 어려운데, 자기 자신 아닌 다른 사람을 본다라는 것은 거의 성립되기 어렵죠. 더구나 그 사람이 내가 생각해볼 때는 세상을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 것 같애, 이 말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그렇게 말해놓고 상대한테 그렇게 좀 살아주십시오 라고 요구하기 시작하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판단하는 것이 100프로 맞다 할지라도 그 판단조차도 바른 판단이라고 말하기 어려운데, 절대적으로 직접적으로 완전하게 상대라는 것을 알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 이한테 그런 이야기가 가기 시작하면 인생길을 같이 손잡고 간다라고 하는 게 그렇게 쉽지는 않습니다.

더 나아가서 친구까지 간다 하면, 삶을 살아가는 배경이나 환경 등이 달라지면서 점점 이해의 폭이 줄어듭니다. 바꿔 말하면 한 사람을 자기라고 하면, 다른 사람이 자기라고 들어올 때 이 겹치는 부분만큼은 그래도 자기가 세계를 인식하는 인식틀이기는 하지만 뭐 어느 정도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일 때는 더 많은 것처럼 보여요. 자 그러면서 세 사람이 끼어듭시다. 그러면 이게 (겹치는 부분이) 점점 줄어듭니다. 이렇게 넓었던 게 줄어드는 거예요. 자, 네 사람이 끼어들면 또 엄청나게 줄어드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 혼자가 이 온전한 것을 자기라고 했는데, 도반이라고 했으니까 같이 인생길을 손잡고 가는 사람인데, 같이 손을 잡자고 해도 손이 잡혀지는 면적들이 점점 줄어들어 가는 거예요. 어느 날은 자기 자신도 자기하고 손을 안 잡고 있는 것처럼 여겨질 때가 많은데, 아무리 오랫동안 함께 같이 살았다고 할지라도 이 범주를 벗어나면 저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조차도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세계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함께 인생살이를 걸어가는 사람들한테 제일 필요한 것은 ‘어떤 견해를 가질 것인가’ 하는 게 제일 먼저 필요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세계 보기’에 대한 살핌

그냥 이럴 것이다 라고 하는 것에 대한 반성이 우선 좀 필요하다는 거예요. 기본적으로 내가 가지고 있는 세계 보기에 대한 살핌, 이것이 필요한데, 약간 다른 데로 가는 이야기입니다만. 우리는 이제 눈을 통해서 보는 것인데 여기서는 머릿속으로 이해한다는 말입니다만, 이 ‘본다’라고 하는 것조차도, 우리가 눈이 생기는 것이 동물에게 눈이 생기는 것이 한 5-6억 년 전부터 시작됐다고 합니다. 그 이전의 동물에게는 눈이 없었어요. 우리는 지금 눈이 있는 것이 굉장히 당연하게 보이는 사실조차도 한 5-6억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눈이 없는 것이죠. 그러나 여기서 식물성먹이를 먹었던 동물들의 식물이 빛을 포착해가지고 해석할 수 있는 유전자가 동물 유전자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 전에는 전혀 제 얼굴에 외부를 받아들이는 눈이라는 기관 자체가 없었어요. 그러다가 아주 오랜 시간 지나가지고 제 몸의 형태가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눈이라는 것을 만들어가지고 내 안에 있는 유전 정보 가운데 눈으로 들어오는 감각 정보를 해석하는 역할이 점점 확장되고 커지면서 동시에 신체에다가도 뭘 만드냐면 ‘눈’을 만드는 거예요.

그 전엔 눈이 없었어요. 그런데 우리 사고 속에는 언제나 눈이 있어요. 귀도 마찬가지겠죠. 코도 마찬가지겠죠. 감각 기관 중에서 어떤 것이 먼저 생기고 늦게 생긴 것은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있지는 않았습니다. 나를 볼 때 ‘본다’는 것조차도 어느 시점에서 비로소 생기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이런 것들이 계속 생기면서 몸에서 이제 여러 가지 감각 자료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가 막 정보가 커지니까 그에 따라서 그런 정보를 일관되게 만들어내는 뇌가 처음으로 동물에게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 전에는 신체 자체가 그렇게 느끼고 있었던 건데, 신체가 커지고 여러 감각들이 많아지니까 그걸 종합해서 분별해내는 기구가 눈처럼 하나 생깁니다. 그것이 뇌인데 한 2-3억 년 전에 생겼다고 합니다. 영어로 번역할 때 어떤 사람은 understanding이라고 번역을 합니다. 이해하다 라고. 우리는 머리를 가지고 사건 사물들을 해석하는데 3억 년 전까지 가면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우리 신체에는 존재하지 않았어요. 지금은 너무나 당연하게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약간 세월만 올라가보면 저런 식입니다. 물론 이 시대에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선조는 아주 올라가봐야 한 600만 년 전에, 조금 올라가면 700만 년 전에 침팬지하고 사람하고 두 공통 조상인 어떤 분이 자식을 낳았는데 한 계열은 쭉 내려와서 사람이 되고, 한 계열은 여전히 다른 계열이 되고 있었는데, 현생인류가 생긴 것은 한 25만 년 전후라 하니까 인간조차도 사실상 그렇게 오래 존재하지는 않았죠.

바꿔 말하면 ‘나란 누구인가’라고 하는 말은 ‘나란 누구인가’라고 생각하는 일이 형성되면서 그것이 질문처럼 우리 앞에 등장하기 시작했어요. 그 이전에는 그런 질문을 할 사람도 없었고 그런 질문 자체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한 7만 년 전에서, 또 어떤 분은 한 5만 년 전에 비로소 그런 일을 생각할 수 있었다는 거예요. 발명된 거예요. 발명됐다는 말은 그 전에는 그것이 없었다는 말이에요. 있는 것은 내가 발견했다고 할 수 있는데 ‘자아를 발명했다’고 하는 말은 자아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자아는 없어요. 사유 속에서는 있는데 존재 속으로는 없는 거예요. 보고 듣고 맛보는 것이 분명한데 그것이 그냥 특정한 조건에 의해서 그렇게 드러난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조건만 제거하면 그것이 전혀 발생하지 않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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