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하 (남산강학원 청년스페셜)

이 지구에는 80억에 가까운 수지만 셀 수 있는, 제각각 자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온종일 사람만 만나도 그들을 채 다 만날 수는 없다. 어떻게 보면 지구는 우주 속의 작은 돌멩이라 ‘뛰어봤자 지구’고 ‘뭘 해도 지구 안’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이 작은 돌멩이는 내가 매일 이동하더라도 다 돌아다닐 수 없을 만큼 크다.

나에게는 요상한 결핍이 있다. 외국 여행을 가거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종종 생겨나는 것이다. 내 세상이 너무 좁은 것 같다는, 세상엔 더 다양한 삶이 있을 것 같다는, 그런데 그건 가질 수도 없고, 가지려 하는 게 뭔지도 모르는, 그 모른다는 것마저 결핍이 되는, 그런 결핍이다.

케이블 TV 채널을 돌릴 때 같다. TV를 켰더니 뉴스가 나와서, 두 번 정도 숫자를 올리니 제법 재밌는 예능프로가 나온다고 하자. 그럼에도 그 자리에서 50개의 채널이 있으면 50개를, 100개의 채널이 있으면 100개를 다 돌려봐야 한다. 지금 보고 있는 제법 재밌는 예능프로보다 더 재밌는 게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채널이 수천억 개라 아무리 열심히 돌려도 다 못 볼 게 뻔한 것이다. 그러니 재밌는 듯, ‘덜’ 재밌는 채널을 틀어놓고, 리모컨은 소파 구석에 던져놓고 불만스럽게 앉아있을 뿐이다.

아아! 저 주공은 / 지나간 과거의 포말인 게고 / 이 비석을 만들어 세우는 자는 / 현재의 포말에 불과한 거라. / 이제부터 아마득한 후세에까지 / 백천의 기나긴 세월의 뒤에 / 이 글을 읽게 될 모든 사람은 / 오지 않은 미래의 포말인 것을. / 내가 거품에 비친 것이 아니요 / 거품이 거품에 비친 것이며” 

정민, 『비슷한 것은 가짜다』 p227에서 재인용, 박지원 「주공탑명-게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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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공탑명」은 연암이 젊은 시절 지어낸 글이다. ‘현랑’이라는 승려가 자신의 스승 ‘주공’이 죽은 뒤 사리를 얻자 그것을 기려 사리탑을 만들려고 연암에게 탑명(塔銘)을 부탁했다. 그런데 연암은 이런 질문을 한다. 연암 자신이 지황탕을 마실 적에 벌집 같은 가는 거품들이 약 위에 활짝 퍼져 거품마다 자신의 상이 비쳤다, 그런데 약을 다 마셨더니 그릇이 텅 비었다, 네 스승이 아무리 수행을 잘 했다한들 어떻게 증명하겠는가?

이에 현랑은 “아我로써 아我를 증명하니 저 상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한다. 형상과는 관계없는 진아眞我가 있다는 것이다. 연암은 이에 위와 같은 게송을 만들어 답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지황탕 위에 뜬 포말 같은 거라면, ‘진짜’라는 건 어디 있냐고. 나도, 이 글을 읽고 있는 너도 포말이고, 포말에 비친 포말, 또 그 포말에 비친 포말(…) 그러니 그 포말(주공)을 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 명銘이란 걸 쓸 수가 있겠는가.

네 눈에도 응당 나무가 나타나 보였을 터 / 쳐다보고 없어진 줄 알았을진대 / 굽어보고 주울 줄은 어찌 모르나 / 과일이 떨어지면 필시 땅에 있는 법 / 발밑에 응당 밟힐 터인데 / 하필이면 허공에서 찾으려 드나 / 실리란 보존된 씨와 같나니 / 씨를 일러 인이라 자라 하는 건 / 낳고 낳아 쉴 줄을 모르기 때문

박지원, 『연암집』(상), 「주공탑명」, 돌베개, p395

연암은 이어서 과일이 떨어지면 땅에 있다는 아리송하고 짓궂은(?) 시를 써 보인다. 주공의 행적과 공적을 남기려는 것은 시시각각 변하고 순식간에 자취가 없어지는 포말을 돌에 새기려는 것과 같다. 허공에서 과일을 찾는 것이다. 대신 땅에서 과일을 찾으면 발견할 수 있다. 생생불식, 쉬지 않고 낳고 낳는 실리實理를 말이다. 이를테면 주공의 육신은 죽었지만 주공은 ‘현랑’과 그 제자들의 수행으로 변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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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 안에도 수많은 세상이 있어 다 만날 수가 없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사람들의 삶과 세상은 케이블 TV의 채널 같지가 않다. 한 사람 안에도 수많은 세상이 있어 다 만날 수가 없다. 사람은 매일 변하고, 또 매일 태어나고, 매일 죽는다. 세상도 그렇다. 건물은 매일 세워졌다 부서졌다, 거리의 나무는 베어졌다 심어졌다, 이 지구는 매일 변하고 매일 뭐가 생기고, 매일 뭐가 부서진다.

내가 보는 세상이든 내가 보지 못하는 세상이든, 내가 살고 있는 삶이든 내가 살지 못하는 삶이든, 포말에 비친 포말처럼 뭐라고 규정 지을 수가 없다. ‘ebs’ 같은 고정된 채널이 있을 수가 없다. 어느 날 무언가는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새로운 것으로 불쑥 변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있는 곳에서 생생불식하는 무한한 세상이 열리는 것이다. 내 세상은 좁은 게 아니라 무한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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