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양명의 마이너리티 리포트 - 슬기로운 유배생활

3. 귀주 가는 길 – 급할수록 돌아가라? 급해서 돌아가는 수밖엔!

문리스(남산강학원)

주역, ‘지금, 이 나’의 길을 묻다 (2)

죄수로 산다는 건 어떤 걸까? 지난 허물을 돌이켜 반성하고, 배부르고 편안했던 삶이 떠올라 두려워지는 것.

囚居亦何事, 省愆懼安飽

눈을 감고 정좌하며 복희씨의 <주역>을 떠올려보는데, 마음을 씻어낼수록 미묘하고 깊은 이치가 드러난다네.

瞑坐玩羲易, 洗心見微奧。

이렇게 복희씨의 <주역>을 알아가노라니, 한 획 한 획 가르침이 지극하구나.

乃知先天翁,畫畫有至教。

어리석음을 품어 도적이 되지 않도록 경계하고, 어린 송아지 뿔막이 나무를 대는 일은 마땅히 서두르라하네.

包蒙戒爲寇,童牿事宜早。

지금의 고난은 제대로 절도에 맞아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지만, 두려운 상황이어도 아직 도를 어긴 것은 아니라네.

蹇蹇匪爲節,虩虩未違道。

둔괘 4효로 내 마음을 붙잡아 놓고, 고괘 상효로 스스로를 지키려네.

遁四獲我心, 蠱上庸自保。

우러르고 굽어보는 천지간에, 눈에 닿는 것마다 호연한 기상이 갖추어지네.

俯仰天地間, 觸目俱浩浩。

일단사 일표음 소박함 속에도 남는 즐거움이 있으니, 이 뜻은 진실로 바꾸지 않겠노라.

簞瓢有餘樂, 此意良匪矯。

아련하여라, 양명동 기슭이여. 그곳에서라면 내 늙음이 찾아오는 것도 잊을 수 있으련만.

幽哉陽明麓, 可以忘吾老。

 

왕양명(王陽明), <주역을 읽다(讀易)> (*번역 : 양문영/남산강학원)

<주역을 읽다>라는 이 시에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4행에 등장하는 어리석음의 몽괘 두번째 효(구이)입니다. 포몽(包蒙), 어리석음을 포용해야 길(吉)하다는 뜻입니다. 이를테면 유근과 같은 이를 일단 참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계위구(戒爲寇). 자칫해서 자신이 도적이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나란히 대축괘의 네 번째 효(육사)를 병치시키는데, 여기 말하는 동곡(童牿)은 송아지가 뿔이 나기 전에 미리 뿔막이 나무를 대어놓는 것을 뜻합니다. 사나운 힘을 미리 억제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큰 덕의 축적이라는 대축괘의 의미를 상기해보면 무엇보다 양명 자신에 대한 경계의 말로 선택한 듯합니다. 요컨대 일단 참아내고, 힘을 억제하면서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고난과 시련의 건(蹇)괘의 두 번째(육이)효와 두려움의 진(震)괘 첫 번째(초구)효입니다. 건건(蹇蹇)은 건괘의 둘째 효, ‘왕의 신하가 고난 속에서 더욱 어렵지만, 이는 자신의 잘못 때문이 아니다’에서 왔습니다. 비록 자신의 잘못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지금 자신이 겪는 고난이 제대로 어떤 절도에 딱 맞아 떨어지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혁혁(虩虩)은 우레의 진동이 올 때 놀라고 두려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놀라고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을 잘 돌아본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양명은 비록 자신의 처지가 혁혁(놀라고 두려운)한 상황이지만 그 자신이 아직 도를 어기지는 않았다(未違道)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양명은 물러남의 둔괘 사효(구사)에 마음을 붙잡아놓고, 부패하고 벌레 먹은 상황인 고괘의 상효(상구)를 통해 스스로를 지키겠다는 뜻을 밝힙니다. 둔괘 사효는 ‘좋아하면서 은둔하는 것(好遯)’입니다. 그것은 군자에게는 길하지만 소인에게는 나쁩니다. 그러니 양명이 일단 이 이상은 자신을 드러나지 않게 해야겠다는 좀 더 구체적으로는 자신을 숨겨야겠다는 다짐을 했던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고괘의 상효는 ‘왕과 제후 등의 일을 섬기지 않고, 자신의 일을 고결하게 숭상한다’는 것입니다. 고(蠱)는 그릇 속에 독벌레들이 번식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특히 고괘의 상효는 그 부패함이 극에 이른 상태입니다. 그 자신을 지키는 일 외에는 군자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둔괘 사효와 연결시켜보면, 중앙 정치 등에서 물러나 자신을 지키겠다는 뜻으로 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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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할 땐 돌아가라, 귀양길!

연보에 따르면, 양명의 감옥 생활은 정덕 원년(1506/36세) 겨울부터 이듬해(1507/37세) 봄까지 입니다. 처음 상소문을 올렸을 때 감옥에 투옥되었고, 두 달 여가 지나 장형 40대가 집행되었으며, 이후로도 다시 감옥에 갇혀 지냈습니다. 정덕 2년 봄, 양명은 귀주성(貴州省) 용장(龍場) 역승(驛丞)으로 좌천됩니다. 역승은 서신이나 문서 등을 전달하는 관리들이 잠시 들러 말을 교체하거나 휴식을 취하는 지역 역참(驛站)의 관리자입니다. 하루아침에 정6품 중앙 관료(병부주사)에서 품계조차 없는 최하위직 역승입니다. 게다가 귀주는 북경에서는 서남쪽, 고향인 절강 여요현에서는 서북쪽 방향으로, 유근의 입장에서 보면 보내버릴 수 있는 가장 먼 곳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상 귀양길이었던 셈입니다.

장형의 후유증을 채 추스리기도 전에 양명은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양명의 연보와 행장 등에는 이 귀양길을 몇 가지 버전으로 전합니다. 세부적인 차이들을 일단 괄호쳐본다면 양명은 북경에서 귀주(용장)로 곧장 나아간 것이 아니라 고향(소흥) 지역을 경유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크게 동선만을 추려보면 북경에서 남경 지역으로, 그리고 남경에서 다시 귀주로 이어지는, 거의 1년여에 걸친 긴 여정이었습니다. 아무리 중국 땅이 크다고 해도, 임지에 도착하기까지 1년이 걸릴 수는 없습니다. 돌아 돌아 아주 멀리 돌아간 셈입니다. 왜 그랬던 걸까요?

일단 시간을 좀 들여서라도 몸을 추스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양명은 상소 사건이 있기 전에 이미 큰 낙마 사고를 당해 몇 년간 휴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겨우 추스리고 복귀한 참이었는데, 혹독한 장형과 북경의 겨울 추위, 그리고 금의위 감옥의 열악한 환경 탓에 회복이 쉽지 않았습니다. 한편 양명이 귀양길을 자신의 고향 방면으로 멀리 돌아 잡은 건, 당시 남경에 근무 중이던 부친을 경유한다는 계획도 있었습니다. 일종의 마지막 인사 같은 의미도 있었을 것입니다. 귀주로의 귀양은 그렇듯 생사의 문제가 걸린 문제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결정적이었을 원인, 그것은 이후가 아닌 지금 당장 그의 생사 문제였습니다. 유근의 분노는 아직 식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즉 양명은 유근의 사정권을 필사적으로 벗어나야 했습니다. 실제로 유근은 금의위 자객을 보내 양명을 쫓게 했습니다. 일찍이 장인태감 왕악도 유근에게 밀려 좌천되었을 때 부임지로 가는 도중 유근이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유근의 자객은 연보와 행장 등에 일관되게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사실이었던 듯합니다. 이 모든 일이 상소 한 장을 기점으로 순식간에 양명에게 들이닥친 현실이었습니다. 그만큼 양명은 위급했고, 위급했던 만큼 그의 귀양길을 자신의 살 길을 찾아내며 나아가야 했던 길이었습니다. 그러니 돌아가야 했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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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문일까요. 양명의 귀양길은 그 자체로 굉장히 드라마틱하고 환상적인 서사가 됩니다. 금의위 자객의 추격을 받으며 양명은 항주 지역 전당강(錢塘江)에 이릅니다. 이때쯤이 되었을 때, 양명은 도저히 이 추격을 피할 수 없겠다고 판단합니다. 연보는 결국 왕양명이 유언을 남기고 강에 투신했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부터 이 다큐멘터리는 매직 리얼리즘으로 바뀝니다. 일단 투신은 사실이라는 기록, 아니 양명이 ‘절명시(絶命詩)’ 쓰고 강기슭에 신발을 남긴 채 투신한 것처럼 자객을 속였다는 기록, 아니 아니 돌덩이를 던져 투신한 것처럼 속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전당강은 중국 저장(浙江)성의  항주를  휘돌아 흐르는 큰 강입니다. 물살도 셉니다. 그런데 정말 하늘이 도왔는지 어쨌는지 양명은 지나는 상선(商船)에 의해 구조되는데, 주산(舟山) 군도를 향하던 그 배는 또 우연히도 태풍을 만나 표류하게 되고, 급기야 배는 복건(福建)성으로 양명을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양명은 이곳의 한 절에서 스님들에게 투숙을 거절당하고 인근의 다른 폐사에서 하룻밤을 보내는데, 그곳은 밤마다 호랑이가 출몰하는 곳이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양명이 무사히 하룻밤을 지내고 나자, 다시 스님들에게 인도되어 주지스님을 만나게 되는데, 이때 만나게 된 인물은 뜻밖에도 20여 년전 양명이 결혼을 위해 처가의 고향인 강서성에 갔을 때 철주궁이라는 도교 사원에서 만나 밤새 대화를 나눴던(그 바람에 결혼식 당일 신랑이 없어져 한바탕 큰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었죠^^) 그 고승이었습니다. 우연과 우연과 또 우연으로 연속된 이야기들의 연속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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