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다영 (남산강학원 청년스페셜)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로 난리다. 연일 늘어나는 확진자와 접촉자, 거리에는 하얀 마스크를 쓴 사람들. 인터넷상에서도 워낙에 떠들썩하니, 이 바이러스 관련 기사에 눈길이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다. 그런데 기사를 보다가 한 번 더 놀랐다. 분 단위까지 확진자의 동선을 세세히 알려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예인도 아니고 앞으로 마주칠 가능성이 거의 없는 낯선 사람인데도 생활동선을 이렇게 훤히 꿸 수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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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알게 모르게 많이 공유하게 되었구나 싶었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이렇게 정보가 넘치고 넘치는 세상인데, 다른 사람의 상황, 마음 하나는 왜 이리도 헤아리기가 어려운건지 말이다. 확진자의 동선을 보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생각하기보다는 ‘대체 거길 왜 가?’라는 댓글이 먼저 달리고 원망만 더 커지고 있는 것처럼 왜 상대의 맥락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 잘 일어나지 않는 걸까? 어쩌면 우리는 정보가 많다는 이유로 정작 읽는 법은 잊어버린 게 아닐까.

그러므로 늙은 신하가 어린 임금에게 고할 때의 심정과, 버림받은 아들과 홀로된 여인의 사모하는 마음을 알지 못하는 자와는 함께 소리(聲)를 논할 수 없으며, 글에 시적인 구상(構想)이 없으면 함께 『시경』 국풍의 빛깔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 이별을 겪지 못하고 그림에 고원한 의취가 없다면 글의 정과 경을 함께 논할 수 없다. 벌레의 촉수나 꽃술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문장의 정신이 전혀 없을 것이요, 기물(器物)의 형상을 음미하지 못한다면 이런 사람은 글자를 한 자도 모르는 사람이라 말해도 될 것이다.

( 박지원, 『연암집』(하), 「자서」, 돌베개, 47~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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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세상과 닮았다. 당연하다. 애초에 포희씨는 하늘을 살피고 땅을 관찰해서 『주역』을 만들었고, 창힐씨가 사물의 정(情)과 형(形)을 곡진히 살펴서 문자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세상만물은 살아있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아주 작은 미물까지도 저마다 각자의 소리인 성(聲), 빛깔과 모양인 색(色), 본성인 정(情), 위치인 경(境)을 지니는데, 글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글은 그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오감은 물론 마음, 시공간적인 감각까지도 총 동원해서 읽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흰 종이에 검은 무늬들이 다인 글이 살아있는 듯 나에게 다가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그렇다면 글에도 소리가 있는가? 이윤이 대신으로서 한 말과 주공이 숙부로서 한 말을 내가 직접 듣지는 못했으나 글을 통해 그 목소리를 상상해 보면 아주 정성스러웠을 것이며, 아비에게 버림받은 백기의 모습과 기량의 홀로된 아내의 모습을 내가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글을 통해 그 목소리를 상상해 보면 아주 간절하였을 것이다.

( 박지원, 『연암집』(하), 「자서」, 돌베개, 46쪽)

내가 직접 보지도 듣지도 못한 일이지만, 마음으로 함께 겪어보려고 상상하고 그려보는 것. 그래야 글에서 말하는 이가 어떤 심정으로 했는지 그려지고, 들릴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도 마찬가지 아닐까. 그 병에 걸리기 전엔 어떤 마음이었을지, 걸리고 나선 어떤 마음이었을지 조금 더 헤아린다면, 단순히 확진자들을 감염시키는 사람, 고립시켜야 하는 사람으로만 보기 보다는 어떻게 이 바이러스를 함께 이겨나갈 수 있는지로 초점이 더 맞춰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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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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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팽
Guest
이달팽

언니 글을 읽으면서 사람은 정보가 아니라 세상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연암이 말하는 ‘읽는다’는 것도 정보를 캐내는 것이 아니라 한 세계와 마주치는 일일테지요!
매순간을 그런 “마음으로 겪는” 만남들로 채워갈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