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니체] 청년과 에로스 - 3)

근영(남산강학원)

노동이 된 공부, 노동을 위한 공부

따분한 공부, 그럼에도 우리는 꾸역꾸역 그 공부를 한다. 왜?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다니까. 이걸 참으면 그럴싸한 직장이 생길 테니까. 그래서 넉넉한 수입을 보장받을 테니까. 늘 이런 식이다.

공부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매력이 없다. 오직 공부에 대한 ‘보상’으로 돌아올 그것이 우리를 공부로 이끄는 동력이 된다. 고되고 지루한 일을 꾹 참고하면, 그 다음에 보수가 돌아오는 ‘노동’처럼 말이다. 노동처럼? 그렇다. 공부는 그 자체가 이미 노동이다. 노동이 된 공부!

모든 노동이 그렇듯 공부를 열심히 하면, 우리는 더 많은 돈을 손에 넣을 수 있다. 뭐, 더 많은 돈이 아니라면 안정적 수입을. 여하튼 경제적 풍요를 그 대가로 갖게 된다. 이것이 공부가 주는 이득이다. 이처럼 “소득과 가능한 한 최대의 화폐 수입”이 근대 교육기관의 목적이자 목표다.

그렇기에 근대 교육의 공부는 그 자체가 노동이면서, 또한 노동을 준비하는 작업이다.

  이 방향에 따르면 원래 교양의 과제는, 우리가 보통 동전을 ‘쿠란트’라 부르듯이, 가능한 한 ‘쿠란트’적 인간을 키우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한 민족은 더욱 행복하게 됩니다. 개개인을 그의 본성적 성향보다 더 ‘금전적’이 되도록 장려하는 것, 그가 자신이 가진 인식과 지식의 양으로부터 되도록 많은 양의 행복과 이익을 얻어내도록 교육시키는 것, 그것이 근대 교육기관의 목적입니다. 각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정확한 견적을 뽑아야 하고, 그가 자신의 삶에서 얼마나 많이 요구할 수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들의 견해에 따라 우리가 주장하는 ‘지성과 소유의 결합’은 바로 도덕적인 요청으로 간주됩니다.……여기서 통용되는 도덕에 따르면……빠른 시간에 돈을 버는 존재가 될 수 있도록 속성 교양이 요구됩니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 전집 3, 유고』 중 「우리 교육기관의 미래에 대하여」, 이진우 역, 책세상, 1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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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니체를 인용했으니, 니체를 따라 좀 솔직해져 보자. 공부해야 잘 산다고 말할 때, 그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을 염두에 둔 말일까. 결국 돈을 안정적으로, 그것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 아닌가. 이 교육이 약속하는 것, 그것은 “관직이나 생계 수단”이다. 그것은 “생활고를 극복하기 위한 제도”로서, 교양 기관이 아닌 “생활고의 기관”이다.

우리는 이 기관에서 공장이나, 회사, 혹은 국가에서 쓸모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한 과정을 밟는다. 쓸모 있는 인간이 된다는 것, 그것은 더 많은 이익을 뽑아낼 수 있는 인간이 되는 것이며, 그렇게 쓸모가 많아질 때 우리 역시 경제적 보상을 더 많이 받을 수 있게 된다. 금전적 본성이 비대해진 쿠란트적 인간, 한 마디로 가성비 좋은 인간. 이것이 근대 교육이 목표로 삼는 인간이다. 예리한 니체씨!

이쯤에서 꼭 들려오는 질문들. 생활고를 해결하는 것이 왜 나쁜가. 생활고란 반드시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 아닌가. 금강산도 식후경, 먹고 살아야 자기 고양이든 뭐든 할 게 아닌가. 그러니 이왕이면 가성비 좋은 인간이 되는 것, 쓸모 있는 인간이 되는 것이 좋은 것 아닌가.

맞는 말이다. 우리는 먹고 살아야 한다. 생계를 위한 노동은 필요하고, 또 충분히 존중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생계를 위한 노동의 필요가 삶의 목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삶은 노동을 위해 있는 게 아니다. 노동이 삶을 위해 있는 거다. 다시 말해 우리는 먹어야 살 수 있지만 그렇다고 먹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닌 것처럼. 그런데 근대 교육은 이 구도를 뒤바꿔 필요를 목표이자 목적으로 만들어버렸다. 근대에 일어난 또 하나의 가치의 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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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노동을 위해 있는 게 아니다. 노동이 삶을 위해 있는 거다.

전도된 이 가치에 따라 우리는 공장에서, 회사에서, 그리고 국가에서 쓸모 있고 능력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 온 힘을 쏟는다. 그런데 이 말, 내 삶을 무언가‘의’ 쓸모로 만든다는 건 내 존재를 하나의 수단으로 만든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노예들의 삶이 주인을 위해 쓰이듯, 우리 삶이 공장이나, 회사, 국가를 위해 쓰인다면? 요컨대, 쓸모 있게 된다는 건 삶이 예속된다는 뜻이다. 그러니 그 쓸모 있음을 교육의 목적으로 삼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이상한 일 아닌가.

더욱이 우리는 그렇게 무언가에 쓸모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점점 더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무능력해진다. 모든 힘을 그 쓸모에 올인하는 데, 우리 자신을 돌볼 여력이 있겠는가. 이것은 근대 교육이 약자를 만드는 방식이기도 하다. 쓸모라는 말로 자기 삶을 수단이 되도록 자발적으로 노력하게 하고, 그렇게 노력하는 동안 자기 자신을 돌볼 시간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것. 그런 공부는 “고차원의 이기주의”, “부도덕한 교양 쾌락주의”로 냉대 받게 하는 것. 근대 교육은 교양을 위한 교육기관의 종말이다.

평균적 인간, 또는 전문가를 길러내기

다시 원점에서 생각해보자. 살아가려면 우리는 반드시 생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만큼 노동에 필요한 것을 배우는 장 또한 요구된다. 해서 생활고의 기관이 있다는 것 그 자체는 문제가 될 게 없다. 문제는 근대 교육이 생활고의 기관을 교양을 위한 교육으로 둔갑시킨다는 데 있다. 생활고의 해결이 곧 존재의 고양이라는 듯, 자신을 교양 교육인 듯 위장하는 것. 근대 교육의 이 기만성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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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고의 해결이 곧 존재의 고양이라는 듯, 자신을 교양 교육인 듯 위장하는 것.

교양 기관과 생활고의 기관은 서로 다른 비전을 가지고 있다. 교양 기관은 자기 고양을 통한 존재적 독특성을 만들어내는 인간을 길러내려 한다. 반면 생활고의 기관은 “평균성”을 지향한다. 모두를 엇비슷하게 만들어 사회에 내보내는 것. 그것이 생활고의 기관이 목표로 삼는 것이다.

생활고의 기관이 평균성을 지향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독특한 인간은 사용하기 어렵다. 사용하기 쉬우려면 고만고만한 것이 편하다. 기계의 부품처럼, 인간 역시 규격화되어 언제든 대체 가능하게 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것. 해서 최고로 쓸모 있는 인간은 존재적 유일무이성조차 무화된 인간, 즉 구별 불가능한 인간들이다.

근대 교육은 바로 이런 생활고의 기관이 가진 비전을 자신의 비전으로 삼겠다는 거다. 그러니까 약자를 길러내는 것을 교육의 목표로 하겠다는 거다! 이게 말이 되나 싶지만,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 근대다. 가치의 전도를 통해, 기만을 통해, 사이비 교양 기관을 통해.

물론 근대 교육은 구별 불가능함 속에 차이를 넣는 것을 잊지 않았다. 모든 것에 사이비를 만드는 근대답게, 사이비 차이이긴 하지만. 여하튼, 기계들도 성능 차이라는 게 있는데 인간이라고 차이가 없겠는가. 근대 교육에는 오늘날 우리가 ‘스펙’이라고 부르는 그 차이가 독특성을 대신해 들어온다. 스펙의 원래 말은 specification, 뜻은 사양(仕樣) 혹은 설명서다. 컴퓨터에 사양이 있듯, 컴퓨터의 기능이나 용량 따위를 소개해 놓은 설명서가 있듯, 우리에게는 스펙이 있다는 거다.

그리고 인간 사회에서 최고 사양을 자랑하는 것을 우리는 ‘전문가’라고 부른다. 어떤 분야의 일을 처리하는 데 최고의 성능을 가진 사람. 해서 그는 대체 불가능한 사람으로 보이고, 그런 만큼 우리는 전문직을 최고의 직업으로 여기게 된다. 근대 “고등교육의 사명”은 바로 이런 전문가를 키워내는 것이다. 노동에서, 그리고 노동이 된 학문에서 전문가를 양성하기. 하지만 대체 전문가란 뭘까? 전문가와 삶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이제 학문 연구는 그 폭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해져, 특출하지는 않지만 우수한 재능을 가진 인재도 그 안에서 업적을 이루려면 극히 특수한 전공 분야의 연구만을 행하고 나머지 다른 영역은 건드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가 자기 전공에서는 보통 수준을 넘어선다 하더라도, 다른 나머지 분야에서, 즉 모든 중요한 문제에서 그는 그저 보통 수준에 속할 뿐입니다. 그렇게 배타적인 전공 학자는 평생 어느 연장을 위한 특정한 나사나 기계 부품인 손잡이 외에는 어떤 다른 것도 만들지 않는 공장 노동자와 비슷합니다. 물론 이 작업에서 그는 경이로운 기교적 완벽성에 이르렀지만 말입니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 전집 3, 유고』 중 「우리 교육기관의 미래에 대하여」, 이진우 역, 책세상, 1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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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그는 자기 전공에서는 보통 수준을 넘어 기교적 완벽성에 이른 사람이다. 해서 그는 대체 불가능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그의 대체 불가능성은 자기 삶이 아니라, 노동에서 그렇다는 거다. 그는 전문가여서, 너무나 전문가여서 특정한 일을 매우 잘하지만, 그 일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해서 그는 모든 중요한 문제에서, 이를테면 자기 존재와 삶의 문제에서는 그런 고등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과 아무런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근대 교육은 전문가를 마치 존재의 고양을 이룬 사람인 양 이야기하고, 우리 또한 그렇다고 믿는다. 하여 우리는 전문가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자기 존재는 일단 괄호 쳐놓고, 전문지식과 기술을 익히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렇게 정치, 경제, 또는 첨단과학 등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는 최고의 앎을 자랑하면서도, 정작 자신에 대해서만큼은 무지한 존재가 된다.

자기 분야에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자신의 삶으로부터 점점 소외되어가는 전문가들. 이는 그 누구보다 전문가 자신에게 가장 해롭다. 그들은 착각한다. 자신이 자기 존재를 운용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자기 삶의 주인이라고. 그런데 그들은 얼토당토않은 사건들의 주인공이 되곤 한다. 대로를 활보하며 음란행위를 하는 검사님, 제자를 성추행하는 교수님, 혹은 제자를 폭행하다 못해 인분을 먹이는 교수님, 몰카를 찍는 의사 선생님, 혹은 가족을 죽이고 자신도 죽은 의사 선생님, 기타 등등 기타 등등.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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